베니스와 유리공예
우리는 유리하면 투명하고 맑고 깨끗하다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러나 초기 유리는 그렇지 않았다.
원시적인 형태의 유리는 금속 불순물이 남아 색이 희끄무레하고 기포도 많았다.
현대에도 잘 정제하지 않은 저급 유리에서 이런 현상이 보인다.
이 탁한 유리를 투명하게 만든 이들이 베네치아 장인이다.
15세기경 이들은 세척을 통해 탁한 색을 제거하고 기포가 없는 투명한 유리를 만드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말 그대로 최첨단 기술을 발명한 것이다.
맑은 모습이 수정 같다 하여 '크리스타털로'라는 이름을 붙인 이 유리는 삽시간에 유럽의 상류사회를 휩쓸었다.
베네치아 인들이 크리스털로를 발명하지 않았다면 눈이 나쁜 사람도 안경을 못 썼을 것이다.
여기에 색을 입히고, 장식하는 방법도 완성도를 높여 200여 년간 베네치아는 유리 시장을 독점하게 되었다.
크리스털로는 무른 데다가 식는 속도가 빨라 순간적으로 정확하게 모양을 잡지 않으면 안 된다.
다루기 까다로웠기에 더욱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했다.
유리가 굳기 전 가위나 집게로 정교하게 모양을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 장인들은 여기에 옛날부터의 기법을 접합시켜 독특한 빛을 내는 구슬까지 만들어냈다.
이 시대 귀족이나 부호들은 의상의 소매나 가슴을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는데, 바로 베네치아 구슬은 이 보석을 모조하는 과정에서 더욱 정교하게 발전했다.
16세기 초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한층 복잡하고 환상적인 유리 제품을 만들어 내었다.
동양에서 수입되는 진주를 완벽하게 모조하는 기법도 터득했고, 유리 줄기를 뽑아 마치 하얀 레이스처럼 둥글게 감기도 하고 뜨거울 때 얼음이나 평면에 굴려 깨진 듯한 표면을 가진 모양 등 마술과도 같은 아름다운 장식품을 만들었다.
먼 나라의 왕족과 귀족은 이 특이한 최신 물건에 열광해 베네치아로 몰려들었고 장인들의 공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한눈에 매료되었다.
프랑스의 앙리 3세도 몸소 무라노를 방문했는데 그 기술에 탄복을 거듭했다고 한다.
당연히 베네치아 유리 신기술을 빼내기 위한 스파이 활동도 극성이었다.
크리스털로 다색 유리, 우윳빛 유리. 온 유럽인들이 이 유리 기술을 빼내지 못해 안달이었다.
베네치아공화국은 이를 지키기 위해 장인의 자격뿐 아니라 고용하는 직공의 수까지 아주 엄격하게 법으로 통제했다.
특허제도도 없던 시대이니 그저 인력을 단속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결국 권력자들은 모든 장인을 외딴곳으로 이주시켜 감금했다.
그곳이 바로 본 섬에서 멀지 않으면서도 고립된 섬, 무라노였다.
13세기말부터 유리 장인들은 이 섬에 유배되어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유리 만드는 기술을 알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장인들은 평생 이 작은 섬에 갇혀 일만 해야 했다.
이렇게 해서 무라노는 유리의 섬이 되었다.
14세기경 유리 장인들은 베네치아 정부로부터 특권을 받고 검을 착용하게 되었고 섬을 떠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좋은 가문의 여자들과 결혼도 하였다.
물론 탈출을 시도하다 목숨을 잃은 사람도 수백 명에 달했다.
그러나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
결국 수세기 동안 비밀리에 전수되던 무라노 유리 기술은 어느 때부터인가 새기 시작하였다.
16세기경 작은 섬에 갇혀 단조로운 생활밖에 할 수 없었던 답답함에 몇몇 장인들이 필사적으로 무라노를 탈출하여 제노바 근처 알타레 지방에 정착했다.
이들과 합세해 의욕적으로 기술을 전수받은 그 지역 사람들은 유리 기술을 온 유럽에 전파시켰고, 무라노는 유명무실해져 점차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하지만 가장 유명한 공방은 계속 무라노 섬에 남아 있다.
바로비에&토소, 베니니, 파울리, 세구소 등으로 이중 바로비에&토소는
전 세계에 수백 개만 남은 오래된 가족 회사 중에서도 다섯 번째 순위를 기록하고 있다.
거미줄 같은 운하로 연결된 베네치아는 대중교통도 배로 운행된다.
이를 바포레토라고 하는데 산마르코 광장 근처에서 타고 20~30분 정도 가면 무라노 섬에 이른다.
세상의 다른 곳 속의 또 다른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마을이다.
한 바퀴 돌아보았자 얼마 걸리지 않는 작은 섬인데 곳곳에 있는 조각상이나 분수대도 모두 유리 일색이다.
유리 부는 대롱을 '칸네'라고 하는데, 1,500도가량의 고온에서 녹여 길쭉한 유리 반죽에 칸네를 통해 숨을 불어넣어 부풀리면서 순식간에 아름다운 모양을 만들어낸다.
이 움직임 자체가 예술인데, 순간적이고 정확한 단 한 번의 동작으로 모양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리를 부는 장인은 호흡량도 좋아야 한다.
그가 부는 힘만큼의 크기가 작품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현재 관광업을 주 수입원으로 하는 베네치아의 상점들은 싸구려 작품들로 뒤덮였다.
관광객들의 구미에 맞춘 중국이나 인도산 짝퉁 유리 제품이 무라노 브랜드를 위협하고 있다.
베네치아에 가서 진정한 무라노 제품을 사려면 '베네치아 셀렉션'과 '무라노 유리'라는 직인을 확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