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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내 Aug 22. 2024

시니어 패션모델 도전기(3)

체인징 파트너

체인징 파트너

1학기 마지막 수업 날, 발표회를 위해 팀별로 컨셉이 정해졌다.
내가 속한 A반은  첫 무대는 ‘골뱅이’, 두 번째 무대는 드레스 컨셉으로 정해졌다.  


골뱅이 컨셉은 ‘One By One’으로 개개인이 일정한 간격으로 무대에 오르지만 드레스 컨셉에서는 처음 출발한 모델이 탑에서 포즈를 취하고 뒤를 돌아와 중간 턴을 하고 기다리면 다음 모델이 똑같은 과정을 거쳐 첫 번째 모델이 기다리는 중간 지점에 도착하여 두 사람이 나란히 탑으로 나가 포즈를 취하고 보조를 맞추어 돌아오는 과정으로 파트너와의 호흡이 중요하다.  


나의 파트너는 늘씬한 키에 우리 반 모범생이었다.  

계속된 연습으로 달랐던 보폭과 턴 방향, 그리고 속도까지 맞추어 발이 맞아 가는 시점이었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 반장의 손에는 작은 쪽지가 들려 있었고 그 쪽지에는 드레스 무대에 오를 순서부터 파트너까지 정해져 있었고 그에 따라 모든 것이  일순간에 바뀌었다.  

지금까지는 나의 파트너가 1번을 맡았고 그 뒤 2번이 내 자리였지만 나의 순서는 6번으로 밀려났고 나의 파트너는 마지막 주자가 되었다.   


뒤로 밀려 난 서운함 보다는 또다시 발을 맞추고 연습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반장에게 다가 가,

“반장, 지금까지 애써 발을 맞추어 왔는데 하루아침에 파트너와 순서를 바꾸면 어떡해?”라며 불평하자,

“순서를 바꾼 것은 무대를 좀 더 멋지게 꾸미기 위해서고 진정한 모델은 100명의 다른 파트너와도 호흡을 맞출 수 있어야 해.”


똑 부러진 성격에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반장의 한 마디에 ‘깨갱’ 
겁먹은 강아지 마냥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다.


‘그래 니는 잘하니까 그런 말을 하지. 
내 한 몸도 가누기 힘든 초보자가 새로운 파트너와 호흡을 맞추기가 그리 쉽냐?  

혼자 중얼거리며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가 발을 맞춘다.

1학기 마지막 수업은 6월 24일, 그 후 여름방학을 거쳐 9월에 2학기 수업이 시작된다.  

6월 24일에는 지인들과 관계자들이 참석하는 패션쇼가 예정되어 있고 오늘은 리허설이 진행되었다.                                                                                                                       
우리 반 남자 모델들의 복장은 슈트 차림으로 정해져 있어 안에 받쳐 입을 샤츠를 고르던 중 “남자 모델들은 슈트 안에 살짝 목까지 올라오는 졸티도 괜찮을 것 같은데...”라는 교수님 말이 생각나

옷장 한 구석에서 하얀 목티를 꺼내 입어 보니 평범하진 않지만 잘 어울린다.  


옷을 차려입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챙겨 강의실에 도착하니 먼저 온 여자 모델들이 담당 강사 주위를 둘러싸고,

“리허설 날인데 기본 컨셉을 바꾸면 어떡해?”라고 항의하자

“골뱅이는 초보자들이 간격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고, 뒷모습이 너무 많이 보여 처음에는 전 인원이 원 바이 원으로 돌고 그다음에는 3인, 2인, 1인, 순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교수님과 상의 끝에 내린 결론이니 불평하지 말고 먼저 온 사람부터 연습해 봐."
“그래, 교수님과 상의해서 내린 결론이라면 할 수 없지.
먼저 온 사람들이라도 먼저 연습을 해 보자.”

 

이렇게 시작된 연습은 계속되었고 바뀐 컨셉을 다 소화하기도 전, 우리 반 차례가 되어 무대에 오른 팀원들은 큰 실수 없이 자신의 역할을 소화했지만 나는 탑에서 돌아올 때, 다음 모델을 위해 왼쪽으로 빠져나가야 하는데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는 실수를 범했다.  

이런 나의 실수를 본 강사는  탑 포즈를 취한 후, 발을 왼쪽으로 빼라는 가르침을 주었고 그렇게 리허설이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저녁을 마친 늦은 시간 오늘 리허설에 찍은 동영상이 단체 카톡으로 올랐고, 내가 실수로 오른쪽으로 도는 모습이 그대로 영상에 비쳤다.

나는 그 영상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멈춤 버턴을 눌렀다.

내가 멈춤 버턴을 누른 이유는 나의 실수 때문만이 아니었다.  

무대에서 나타나는 나의 우쭐함과 거만함이 영상에 그대로 나타나 도저히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리고 한동안 나의 거만함이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었다.




패션쇼 - 종강


무대에는 빨간 카펫이 깔리고 먼저 나온 수강생들이 마지막 연습에 바삐 움직인다. 

손님들과 귀빈들의 자리가 마련되고 간식거리도 테이블 위에 내놓는다.
무대 위에는 리허설이 한창이고 무대에 설 수 없는 반원들은 복도와 빈 공간을 찾아 조별로 또는 파트너와 발을 맞춘다.


쇼 시작 시간이 가까워지자 무대 주위로 청중들이 자리 잡는다.

이제부터 모델들은 청중들의 눈에 띄지 않는 대기실로 옮겨 자신이 무대에 오를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  

긴장과 기대의 시간이 지나고 사회자의 오픈을 알리는 멘트가 무대 뒤로 울려 퍼진다.

 


가장 먼저 무대에 오르는 ‘A’ 반의 ‘티파니의 아침’ 컨솁은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이다. 
까만 의상에 긴 손장갑 그리고 은빛 왕관을 쓴 모델들이 무대를 경쾌하게 걸어 나가자 청중들이 힘찬 박수로 화답한다.  

한 사람씩 무대에 오르는 ‘원 바이 원’가 끝나고 3, 2, 1인이 조를 이루는 공연이 막을 내리자 우아한 드레스 차림의 ‘B’ 반의 ‘드레스’ 공연이 이어졌고, ‘C’ 반의 ‘톰 레이더’ 공연은  야성적인 컨솁을 잘 소화해 많은 박수를 받았다.  


1부 순서를 마치고 의상을 갈아입는 시간, 남자 모델 두 분이 색소폰 연주을 연주한다. 

찢어진 청바지에 카우보이 모자를 쓴 두 연주자는 ‘사이먼과 카펑클’을 닮았다.  


2부 순서는 ‘A’ 반의 ‘드레스’를 시작으로 헐렁한 양복에 중절모를 눌러 선 ‘B’ 반의 ‘매니시’로 이어졌고 B반 전원이 무대에 나와 중절모를 손가락 사이로 돌려 머리에 쓰는 마지막 퍼포먼스는 청중들의 환호를 자아냈다. 

 
‘C’ 반의 ‘드레스’를 마지막으로 반별 공연을 마쳤고 전체 모델이 무대를 돌며 마무리 인사로 오늘 시니어 모델들의 데뷔 무대가 막을 내렸다.   


학교 근처 식당에서 쫑파티를 마치고 돌아와 책상에 앉으니 옛 생각이 난다.
직장 생활시절, 담당하던 프로젝트에서 경쟁자와 치열하게 싸워 마지막 승자가 되었을 때, 온몸에 소름이 돋는  희열을 느꼈지만 그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공허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오늘 무대에서도 그 못지않은 짜릿함을 느꼈지만 그때 같은 공허함이 밀려오지는 않았다.
혹시 이 무대를 위해 혼신을 다한 교수님은 그런 공허함을 느낀 건 아닐까?


동료들과 마신 술에 기분 좋게 취기가 오른 귓가로 ‘드레스’ 배경 음악인 ‘바람이 분다’가 들려온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그래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시니어 모델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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