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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내 Nov 25. 2021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10)

이스라엘의 탄생, 6일전쟁 그리고 나세르

<이스라엘 탄생과 6일 전쟁, 그리고 이집트의 나세르>

1948년 5월 15일,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포했다. 


 아랍 군대는 그 새로운 국가가 첫 숨을 내쉬기도 전에 짓밟을 결심으로 

삼 면에서 공격해 들어갔다. 


 하지만 적을 짓밟은 것은 도리어 이스라엘이었으니, 

그들은 아랍의 적수들인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 군대를 패주 시켰고, 

그로 인해 사산아가 된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이었다. 

 

나세르

1948년 완패에 가담했던 한 남자가 이집트 육군 장교인 가말 압델 나세르였다. 


 나세르는 이집트 남부에서 우편집배원 아들로 태어났는데, 

소년 시절부터 자신의 나라가 유럽인들에게 복종하는 현실에 깊이 상처를 받았다. 


1948년에 아랍이 패배하면서 나세르는 이집트 왕에게 책임이 있다고 비난하며, 

다른 육군 장교 몇 백 명(자유 장교단)과 왕을 몰아내고 공화국을 세우기로 공모했다. 

 

1952년 어느 여름날 아침, 

그 자유로운 장교들은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 폐지에 성공했다.


하지만 왕을 없애는 것은 쿠데타에서 쉬운 부분이었고 

정작 어려운 단계는 이집트에서 영국을 쫓아내는 것이었다. 


당시는 냉전 중이라 거의 모든 신흥 민족국가가 초강대국 미국과 소련, 

둘 중 한쪽에서 무기를 얻을 수 있었다. 

 나세르는 미국에 접근했지만 거절하자 소련에 접근해서 무기를 원하는 만큼 받아냈다. 


그 후 미국이 이집트가 중요하다는 판단을 내려 

아스완에 나일강을 가로지르는 큰 댐을 지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미국이 이집트 재정을 감독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어, 

나세르는 자력으로 댐을 건설하기로 결정했고, 

자금 마련 해결 방법으로 수에즈 운하를 선택했다. 


그 당시 수에즈 운하는 약 9000만 달러의 수입을 거둬들였지만, 

이집트는 고작 630만 달러 정도를 받을 뿐이었다. 
 1956년에 나세르는 운하 구역으로 병력을 투입해서 수에즈 운하를 점령했다. 

그러자 유럽이 격분했다. 


 영국은 나세르를 또 다른 히틀러라고 했고, 

프랑스 언론은 이집트는 너무 미개해서 세계 경제를 침몰시킬 것이라 했다. 


 두 유럽 국가는 이스라엘과 결탁하여 카이로에 폭탄을 터트려 나세르를 죽인 다음 

수에즈 운하를 되찾으려는 음모를 꾸몄다. 

 

때마침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그 음모를 듣고,

 그 작은 계획 때문에 중동 전체가 소련에 넘어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수에즈 운하를 이집트에 돌려주라는 결정을 내렸다. 

나세르는 원하는 댐을 건설해 그의 나라에 전기를 공급했다. 


 또한 인도의 네루, 인도네시아의 구카르노, 스리랑카의 반다라나이케를 

비롯한 몇몇 다른 지도자들과 힘을 합쳐서 비동맹 운동, 

냉전으로 대치하는 두 초강대국을 견제하는 중립국들의 연합을 전개해 나갔다. 

 

한편 무슬림 형제단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1952년에 이집트 왕을 폐위시키는 것을 도왔지만, 

나세르의 정부가 업무를 시작하자 무슬림 형제단은 나세르에게 등을 돌렸고,

 심지어 그를 암살하려고 시도했다. 


무슬림 형제단 설립자 하산 알 반나는 나세르가 정권을 잡기 전에 암살당했지만, 

사이이드 쿠트브가 반나를 대신해 형제단을 맡았다. 

나세르는 이 사내를 감옥에 가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결정은 큰 실수였다. 
 감옥에서 쿠트브는 희생양이라는 명분을 얻었고, 자신의 교리를 계속 설파했다. 


 나세르는 이 잔소리꾼은 참아줄 이유가 없다고 결단을 내려, 

1966년 8월 쿠트브를 교수형에 처했다.

그 때문에 놀라울 정도로 멀리까지 퍼져 있던 그의 추종자들이 그를 순교자로 포장했다

 

1967년 5월, 나세르는 이스라엘을 향해 전쟁의 가능성을 내뿜기 시작했고, 

진심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홍해로 가는 경로를 봉쇄하기까지 했다. 


그 해 6월 5일, 아무런 경고도 없이 이스라엘이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를 일제히 공격했다. 
 첫 24시간 동안 이스라엘은 사실상 이집트 공군 전체를 격추시켰다. 
 그 뒤로 5일 동안은 UN이 팔레스타인의 나라라고 선을 그었던 영토를 전부 점령했다. 

 7일째에 전쟁은 끝났고, 이제 세상은 결코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

6일 전쟁은 나세르에게 모욕적인 사건이었고. 

그의 경력은 끝장났다. 


나세르는 4년 안에 말 그대로 죽었다. 

 

6일 전쟁


종합해 보면,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영토를 얻었다. 
 그 영토는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완충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가로 그 영토 안에서 갈수록 늘어나는 반란에 부딪쳤는데, 

이스라엘은 갈수록 더 잔인한 방법으로 대처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공격과 반격은 이스라엘의 진을 뺐으며 

국제사회에서 도덕적 입지를 위태롭게 했다. 

 

맞은편에서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과격해지고, 

무슬림 형제단이 힘을 얻었으며, 

그로 인해 지하드 주의자 분파가 파생되었다. 


이들은 극단적인 광신자들로 결백한 방관자들뿐만 아니라, 

전쟁에 말려든 제삼자가 더 결백할수록 더 좋은 목표물이라 여겨 끔찍하게 공격했으니, 

이것이 테러리즘이라고 불리는 폭력의 형태로 발전했다. 


 요컨대 6일 전쟁은 세계 평화를 위태롭게 만든 퇴보였으며, 

무슬림 세계에 떨어진 재앙이자, 

결국 이스라엘에게도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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