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짝이었던 유일한 친구가 떠나고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저 혼자 다니는 평온한 일상이 계속 되었고 그렇게 초등학교 4학년까지 흘러 보내고 5학년이 되었다.
5학년이 되어 마음에 맞는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그 애는 나처럼 체구가 작았으나 나와 달리 활발했고 짖궂은 남자아이들과도 서스럼 없이 어울리고,
거침없이 자기주장을 하는 등 여장부 스타일이었다.
이렇듯 성격적인 면모로만 보면 우리 사이에는 친해질 수 있는 접점이 없었으나
그 당시에는 키 순으로 자리를 배치했기 때문에 반에서 작은 순서대로 3~4위를 했던
그 애와 나는 가까운 자리라 친해질 수 있었다.
보여지는 성격은 다르지만 그래도 속으론느 꽤 맞는 면이 있었는지 급속도로 친해졌다.
나중에는 방과 후에 서로의 집에 초대하기로 했었다.
3학년 때 친구를 초대한 이후로 처음으로 친구를 데려가는 상황이었는데,
그때보다 시간이 꽤 흘렀고 이제 엄마도 조금은 달리지지 않았을까 해서 마음놓고 집으로 데려갔다.
그러나 그 선택은 최악이었다.
지금도 마음 깊이 짙은 수치심과 트라우마로 남아있어,
할수만 있다면 그 기억을 통째로 도려내고 싶을 정도다.
사건은 평범하게 전개되었다. 친구를 집에 데려와서 조용히 방에서 대화를 나눴다.
이때도 엄마는 친절하게 인사를 한다거나 간식을 챙겨준다거나 하는 모션은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전처럼 대놓고 무안을 주진 않아서 다행이다 싶었다.
방에서 놀고 있는데, 엄마가 여러 차례 큰 목소리로 나를 불렀었나 보다.
그러나 나는 당연히 듣지 못했고, 그 친구는 내가 귀가 좋지 않은걸 몰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내가 대답을 안하는 것에 당황해서 그랬는지 엄마가 부른다고 따로 얘기해주지 않았다.
열받은 엄마는 방문을 열고 내 머리채를 잡고 그대로 끌고 나가 김치냉장고에 몇 번이나 내 머리를 내려쳤다.
그 전에도 사랑의 매 성격으로 몇 번 회초리로 체벌을 받긴 했으나,
이렇게 무자비하고 감정적이게 나를 학대한 건 처음이었다. 당연히 친구도 내가 맞는 모습을 다 지켜봤다.
당연히 내가 잘듣지 못하는 걸 알텐데 대답을 안했다는 이유로 분노한 것도 이해되지 않았고,
친구를 집으로 데려온 것이 그렇게 엄마의 심기를 거슬렸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초등학교 5학년 이제 막 사춘기가 시작되려는 소녀에게 그 일은 너무 잔혹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친구가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사실 이상한게 맞지만,
엄마에게 폭행당하는 모습을 들킨게 부끄러웠고, 걔가 학교에서 '이 일을 말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을 먼저 했던 것 같다.
차라리 친구가 가고 난 뒤 나를 분풀이했으면 좋았을텐데.
하여간 때리는 엄마와 맞는 나나 둘 다 정상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그렇게 한참 머리통이 김치냉장고에 짓이겨지고 엄마의 분노가 조금 진정되었을 때,
나는 울지도 않고 조용히 방에 들어와 당황한 친구에게,
'우리 엄마가 좀 그래... 놀랐지...'같은 말 따위를 하며 친구를 오히려 진정시키고
아무것도 아닌 일인양 행동했다.
그리고 친구를 집으로 바래다 주고,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화도, 슬픔도, 그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은채 아무 표정 없이 걸었다.
비로소 내 방에 들어와 혼자가 되었을 때 그때서야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약간 알게 되었다.
나는 무력했고 우울했다.
이런 미치광이 같은 엄마와 산다는게,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빠와 오빠를 두고
그들과 함께 있을 때면 아무일 없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다.
그리고 훗날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 큰 용기를 내서 초등학교 때
엄마가 이렇게 행동해서 나는 너무 힘들었다고, 지금도 그 생각이 나서 얼굴을 보는 것이 힘들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얘기를 꺼냈을 때, 엄마는 금시초문인듯한 표정을 지었고, 당연히 사과의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일 때문에 지금도 힘든데, 가해자는 까맣게 모르고 사는 것이 억울하고 한스러워 감정이 점점 격화되었다.
그때까지도 부모님은 내가 얼마나 힘든 기억에 갇혀 사는지, 얼마나 작정하고 꺼내는 말인지
사안의 심각성을 모르시다가 이제 부모님을 보기가 힘들다고, 연을 끊어야 내가 살 것 같다는 얘기까지
하게 되었을 때서야,
비로소 아빠가 울면서 그래도 '연은 끊지는 말자. 우리가 노력할게.'라며 나를 달랬던 것 같다.
나에게 가장 큰 고통을 준 엄마는 여전히 자신은 그 일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그래도 너가 상처를 받았다면 미안하다고 성의없이 말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부모님은 계속 '용서해라'라는 말로 나를 한번 더 상처 입혔다.
이 중에서 나야 말로 가장 당신들을 용서하고 싶고, 나의 유년기를 통째로 잊고 싶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용서가 하루 아침에 쉽게 되는 것도 아니고, 많은 시간이 지나 그 감정이 아주 조금씩 희석되어 가는 것인데
용서해라라니 참으로 무책임하고 우스운 말이다.
나는 한 때 벌레같은 부모와 같이 사는 유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