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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드로 Jan 16. 2024

EP. 13 첫 번째 재회, 영상편지

그때는 그렇게 만나기만 하면 행복할 줄 알았지, 참 멍청했구나 내가.

그녀:"오빠가 이런 것까지 할 줄은 몰랐어"


2021년 7,8월 무더운 날씨가 한창인 가운데 나는 스터디카페에서 동영상을 촬영하고 있었다.


주인공은 다름 아닌 나, 사건의 줄거리는 아래와 같다.


여태까지 내 에피소드를 보신 분이라면 알겠지만 나는 수능중독으로 인해 헤어졌었고, 위 영상은 첫 번째 수능도전 때 발생한 일이다.


나는 호기롭게 시험을 보겠다고 외쳤지만, 쏟아지는 미적분과 과학탐구의 괴랄함에 지쳐 시험을 포기하고 만다. 사실 어쩌면 그때는 헤어져서 멘탈이 박살 난 것도 기여했겠지.


그녀에게 수십 번 전화와 문자를 보냈지만 그녀는 묵묵부답이었고, 나는 최후의 수를 꺼내기로 한다. 그건 바로 영상편지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나는 대한민국에서 저런 면으로는 1% 안에 들지 않을까 싶다. 전 여자친구를 잡으려고 영상편지를 쓰다니, 기발하긴 한데, 옳은 처방전은 아니었지. 그녀도 그때 나에게 속은 것이 아닐까. 나는 나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했어야 했는데 상처를 숨기기에 급급했었다. 영상편지를 제작하자라고 마음을 먹자, 순식간에 며칠이 지나갔다. 스터디카페에서 셀프캠을 사용해서 영상을 찍고, 대본을 쓰고, 전반적인 계획을 세우고 영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부터 영화와 각종 동영상매체를 좋아하던 나에게는 즐거운 일이었다. 목적성도 뚜렷했고(재회) 만드는 과정자체도 즐거웠다. 자막과 간단한 특수효과 및 그리고 얼굴상태 체크(?)를 마치고 전송을 눌렀고, 대답을 기다렸다.


영상편지의 내용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다시는 시험 같은 걸 준비하며 널 떠나지 않겠다, 네 신뢰를 무너뜨려서 미안하다.라는 내용이었을 거다. 그때도 물론 어느 정도는 반성했겠지만 진짜 반성은 아니었겠지.


며칠이 지났을까, 그녀에게 대답이 왔고 내가 이렇게까지 할 정도는 몰랐다고 하며 얼굴 한번 보자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하고 우리는 우리가 처음 만난 장소, 춘천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잡는다.


나는 최대한 꾸며서(?) 그녀를 만나러 갔다. 전에 대학교에 다닐 때 그녀는 내가 염색을 한 것을 좋아해서 급하게 염색도 하고 만나러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만난 장소는 남춘천역 EDIYA 커피였다.


그녀보다 먼저 도착했고, 그때는 아마도 날씨가 서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음료를 시키고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면서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가 들어왔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너는 흰 티에 청바지를 입었던 것 같은데, 옷 색깔은 잘 모르겠네. 시간이 오래돼서 그런가.


나는 당연히 다시 만나자는 이야기를 하려고 나오는 줄 알았는데, 그녀는 지금 당장 만날 마음으로 나온 것은 아니라고 했다. 순간 나는 어이가 없었고, 그럼 왜 나온 것이냐고 약간 화를 내며 물었다.


그때에는 화가 났는데, 지금은 그녀의 심정을 알 것 같다. 마치 아이에게 용돈을 주는 부모님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뭔가 해주고는 싶지만 이 아이가 선물을 받을 준비가 되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겠지. 하지만 아이는 선물을 눈앞에 보이면서 주지는 않는 부모님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내가 그랬다. 그러나, 그때는 그녀가 하는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그래도 군대를 다녀와서 조금은 철이 들어서가 아닐까. 그녀는 나의 생각이 궁금하다고 앞으로 어떡할 거냐는 식으로 대화를 이어나갔고, 나는 그 대답을 찾아보겠다고 대답한다.


이제 와서 보니 그 대답의 무게는 참으로 가벼웠다. 두 번째 재회의 대답보다 첫 번째 재회의 대답은 참으로 가벼웠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만나기로 했고, 나는 그때 그녀를 그녀의 집에 데려다주고 싶었는데 그녀는 오늘은 혼자 갈 것이라 그랬고, 나는 아깝지만 그녀를 혼자 보내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우리는 며칠의 적응 기간을 거친 뒤에 다시 잘 만나게 되었다.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다시 만난 그 직후에는 오랫동안 못보다 만나서인지, 더 행복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행복할 자격이 없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행복했다.


재회기념으로 우리는 서울의 장미공원에 가서 그녀의 사진을 찍어주고, 즐거운 데이트를 즐기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아, 물론 거기 가는 길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정문에 내려야 되는데 내가 길을 잘못 찾아서 좀 헤매긴 했다. 근데, 잘못 내린 곳에도 꽃은 있었고, 그때 마침 햇살이 좋아서였을까. 인생샷을 찍어주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그때의 사진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표면적으로는 잘 만나고 있었는데, 나의 해결되지 못한 문제는 내 안에서 스멀스멀 고개를 내밀 타이밍만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때 당시, 다시 만났다는 생각에 모든 문제가 해결된 듯싶었다. 하지만 해결된 것 아무것도 없었고, 오직 잠시 그 문제를 잊었을 뿐.


재회를 하고 나서 나는 학교를 다녔고, 그녀는 학교 근처의 회사에 다니며 우리는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서 데이트도 하며 즐거운 나날들을 보내게 된다. 그녀는 회사 셔틀버스를 타고 춘천 근처 정류장에 내렸고, 나는 그 근처 스타벅스에서 학교 과제를 하며 그녀를 기다리다가 그녀를 데려다주곤 했다. 데려다주는 길에 개천이 하나 있었는데, 그녀는 그런 길을 좋아하곤 했다. 그때 우리는 결혼하면 이런 길을 같이 걷자는 이야기도 많이 하며 미래를 그려나갔는데, 나는 그 미래를 지우개로 지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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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9월, 그렇게 우리는 재회했으나, 2022.6월, 동일한 이유로 다시 이별하게 된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아마 강남역 무신사스탠더드점이 마지막으로 같이 갔었는데, 거기서 나오면서 2번째 이별이 이뤄졌다.


3년간 연재를 목표로 하는데, 벌써 소재가 바닥나고 있는 것이 실감 난다. 그녀와의 사생활을 노출시키면서까지 이 글을 적고는 싶지 않아서 소소하게 그녀와 행복했던 기억들을 적어보고자 한다.


오늘 카페에 가서 다음 주 논문발표를 준비하다가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데, 한강에 여의도가 비친 것이 보였다. 다시 만난 2022년 말, 또는 2023년 겨울 즈음 그녀는 내가 한강을 좋아한다고 말하자, 퇴근 후에 피곤함에도 나와 같이 한강을 가주었다. 그때 너는 여의도를 보면서 저기 용산 아니냐고 물었는데, 내가 아니라고 여의도라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


동작대교 위에서 여의도와 다른 건물들이 한강에 비친 것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강에 해와 여러 건물들이 선명하게 비치는 것처럼, 억이라는 강에 비친 나는 아직 네가 옆에 있다"


아직도 많이 좋아하는데, 많은 것들이 우리는 달랐고, 그 다름을 감당하지 못해 헤어졌지. 다시 만난다고 해도 그 다름을 전부 지울 수는 없겠지만, 그 다름을 인정하고 미래를 그려나가고 싶다.


기다리는 길이 고되고, 힘들다. 그래도 나는 기다리겠지,라는 생각이 드네. 의지가 아닌, 내가 그렇게 될 거라는 걸 이제는 인정하는 것 같다. 약속한 시간 동안 널 잊지 못하고 기다릴 거고, 누군가는 바보라고, 할 거고, 왜 그렇게 사냐는 핀잔도 듣겠지. 뭔가 불가항력적인 힘이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제일 힘든 생각은 그녀가 이미 다른 사람을 만났으며, 나는 이제 다시는 그녀와 엮일 수 없다는 생각.

아직까지는 많이 두렵고, 마주하기 싫은 미래이다. 온 우주가 바라면 이뤄준다는데 과연 그게 될까.

위 글을 읽는 독자분들도 작가가 재회하기를 빌어주기를 바란다. 그럼 이 글은 3년이 아니고 신혼일기, 부부일기로 제목이 바뀌며 내 인생을 그려나가겠지.


오늘도 재회주파수 따위를 들으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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