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함께 지지배배(遲㢟蓓㟝) - 더디게 걸어갈지라도 너와 함께 꽃 피울
잠결에 풋내가 스며들어 왔다. 버스에서 꾸벅꾸벅 졸던 내 두 뺨을 바람이 쓰다듬었다. 깔깔깔 하고 웃는 소리는 귓가에 뱅글뱅글 맴돌았다. 눈을 반쯔음 떠보니 바로 옆의 차창이 활짝 열려 있었다. 풋내음을 가득 실은 싱그러운 바람이 나에게 몰려들었다. 잠이 덜 깬 탓이었을까. 풋내가 여름의 푸릇한 나무들에게서 나기도 하고 풋풋한 여고생들의 웃음소리에서 나기도 했다. 그 풋풋함이 부럽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가 기분 좋은 바람이 어르듯 토닥여주자, 나는 다시 잠이 들었다.
나는 교복이 좋다. 정확히는 현재 학생들이 입고 다니는 세련된 교복이 좋다. 펑퍼짐하고 구리구리 했던 내 학창 시절 진녹색의 칠판 같은 교복과 요상한 푸른색의 체크무늬 교복과는 다르게 요즘 학생들의 교복은 참 예쁘다. 해리포터같이 영국 사립학교 스타일의 교복도 귀엽고, 세일러복 스타일의 교복도 사랑스럽다. 이런 교복이라면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서처럼 다시 교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내 학창 시절의 교복을 다시 입으라고 한다면, 방바닥에 팽개치고 입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의 옛 교복이 요새 교복처럼 예쁘지 않고 입으면 입을수록 엉덩이가 반짝거리게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쩌면 꼭 그 이유만이 아닐 것이라는 의문이 들었다.
친오빠는 아주 어린 아기였던 시절까지 기억하는 반면에 나는 대체로 학생 때를 포함한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다. 어릴 적 매년 갔던 오대산의 은하수가 무척 아름다웠다는 기억과 그 하늘을 보고 내려오다 빙판을 미처 보지 못하고 대자로 뻗어버린 기억이라든가 추운 겨울 현관 앞 계단에 앉아 키우던 병아리의 죽음을 슬퍼하던 기억 등 열 손가락 안팎 정도로만 또렷이 기억한다. 약간 그런 느낌이다. 분명히 오래되고 낡은 일기장이 있는데 대부분의 내용이 비어있거나 물에 번져 글씨가 보이지 않는 달까? 과거를 회상하면 머리가 멍하고 새하얘진다. 전에 이 원인이 너무도 궁금해서 심리학 서적들을 찾아 읽어 본 적도 있었다.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때 짧은 공부로 내려진 결론은 이랬다.
‘스스로 외부적, 내부적 요인으로 과거를 기억하고 싶지 않아 하기 때문에 뇌에서 기억하기를 거부하고 저장하지 않는다.’
심리학 서적을 통해 얻은 이 결론은 정답이었다. 그동안의 난 스스로도 사랑하지 않는 데다 이상과 틀만 높아서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았고, 이 모든 게 담긴 과거를 지워버리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인생을 리셋시킬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수차례 했다. 요새 유행하는 회귀물의 라이트 노벨처럼 과거로 돌아가 내가 했던 행동들, 선택들을 고치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다시 풋풋하던 중학생으로 돌아간다면, 늦은 저녁 엄마와 단둘이 마주 앉아 내 진로에 대해 얘기하던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민요를 선택했을까? 아님 그림을 선택했을까? 그림을 선택했다면 지금의 내 모습이 달라졌을까? 고등학생으로 돌아간다면, 좀 더 자신 있게 먼저 모르는 친구에게도 말을 걸어봤을까? 좁다란 마음으로 까불거리던 친구들을 겉으로는 부정하면서 속으로는 부러워했던 그 못난 뿔이 안 솟지 않았을까? 하고 이루어질 수 없는 후회와 궁금증들이 자꾸 몰려들었다. 그때에는 몰려드는 생각들에 밀려 정처 없이 흔들거렸다. 현재, 지금부터 바뀌면 되는 것인데 자꾸 과거를 바꾸려 들었다. 하지만 과거는 바뀌지 않았고 주홍글씨가 되어 내 가슴에 새겨졌다. 이미 새겨진 과거는 바뀔 수가 없으니, 결국 내 스스로가 과거의 나를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버린 것이었다.
나는 아직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부럽다. 내 낡은 교복보다 더 예쁜 교복을 입고 있으며 내가 가질 수 없는 해맑고 풋풋한 청소년기의 시간을 보내고 있기에 나는 그들이, 그 시간이 부럽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웅크려 앉아 염미하지 않을 것이다. 내 낡은 일기장이 계속 텅 빈 채로 남아있는다면, 세상에 나라는 존재가 단 한 글자도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낡은 교복을 꺼내보기를 시작으로 다시 잊어버린 어린 날의 일기들을 다시 찾아보고자 한다. 비록 상쾌한 풋내가 아닌 오래되고 쾌쾌한 좀약 냄새가 날지라도.
글 쓴 시누이 - 율힌 yulhin
그림 그린 새언니 - 전포롱 jeon polong
시누이와 새언니
파랗게 염색했던 머리가 점점 물이 빠졌다.
여름에도 따듯한 물로 샤워하는 게 좋은 시누이가
차디 찬 냉수로 샤워하며 지키려 했건만,
야속하게 머리는 희끗희끗해졌다.
그렇게 속상해하던 시누이에게 새언니가 말했다.
"어머, 소피 같아요!"
시누이의 머릿속에 하울의 움직이는 성 OST가 울려퍼졌다.
거울을 들고 들여다 보니 색이 바래가던 머리칼이
은타래마냥 반짝반짝 아름답게 보였다.
시누이는 반짝이는 눈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새언니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