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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힌 Aug 08. 2021

#8 해바라기

너와 함께 지지배배(遲㢟蓓㟝) - 더디게 걸어갈지라도 너와 함께 꽃 피울

 세상 모든 자연에 신과 요정이 머물던 시절, 윤슬을 반짝이며 춤을 추던 물은 태양을 사랑했다. 물은 태양이 누구보다 빛나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지 자신을 빛내주는 태양을 사랑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태양을 열렬히 갈구하는 자신의 마음은 확고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물의 마음이 보이지 않을 만큼 하늘 높이 떠있던 태양은 인간의 딸을 좋아했다.


 물은 인간의 딸을 질투했다. 그래서 물은 태양과 인간의 딸이 만나고 있으며, 태양은 사랑에 눈이 멀어 세상은 곧 한 줌의 빛도 없이 밤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 소문을 들은 인간들은 처음엔 겁이 났다가 이윽고 인간의 딸에게 분노하기 시작했다. 모든 인간들이 몰려가 딸의 아비에게 화를 내며 딸을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태양이 무섭기보다 눈앞의 인간들이 두려웠던 딸의 아비는 딸을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인간의 딸은 군중들에 의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영원히 파묻히고 말았다. 물은 인간의 딸이 사라졌으니 태양이 자신을 봐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태양은 세상 구석구석 빛을 쬐이며 인간의 딸을 찾기에 바빴기에 물을 쳐다보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태양은 물의 존재를 알지도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강렬한 태양빛에 물은 점점 메말라갔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태양만 바라보던 물은 바닥까지 말라버려 태양에 대한 갈망만 한 움큼 남았다. 물의 갈망은 땅 속에 스며들었고, 그 자리에 새싹이 돋았다. 새싹은 자라나 꽃이 되었다. 꽃은 버릇처럼 태양이 보이는 순간부터 사라지는 순간까지 그를 쉼 없이 좇았다.


 인간들은 이 꽃을 발견하고는 ‘해바라기’라 이름 붙이고 줄기를 꺾어 태양의 제단 위에 바쳤다. 해바라기는 제물이 되어 불에 태워졌다. 해바라기는 붉게 타오르는 불 속에서 춤을 추었다. 이 광경 속에서 어떤 이는 해바라기의 찢어지는 웃음소리를 들었으며, 어떤 이는 조잘대는 울부짖음을 들었다. 어떤 이는 그 춤이 환희의 춤이라고, 어떤 이는 비나리라며 서로 얘기해댔다. 홀로 그 진실을 아는 이는 까만 재가 되어 온 하늘에 흩날렸다.     






 중학교 때 명절이나 방학이면 둘째 이모네 집에 놀러 가면 꼭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나출판사)』라는 만화책을 봤다. 그때만 하더라도 나는 신화 속 해바라기 이야기를 좋아했다. 어쩜 저렇게 지고지순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나라면 하나에 저렇게나 몰두하는 할 수 있을까? 하고 부러워하며, 해바라기는 그 모양새만큼이나 멋있는 꽃이며 그 이야기 또한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 겪었던 아주 사소한 계기로 그동안 묵혀두었던 해바라기에 대한 관념이 뒤바뀌게 되었다.     


 햇살이 따사로운 여름날의 아침이었다. 우체국에 들릴 일이 생겨 길을 나섰다. 근무 중에 잠시 나오게 되면 나는 으레 아버지와 짧은 안부 통화를 한다. 그래서 그날도 아버지와 수다를 떨며 걸어가고 있었다. 아버지와의 통화에 집중한 까닭일까? 가는 길은 항상 가던 좁고 높은 건물이라곤 없는 구시가지의 골목길이었다. 통화와 업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 되어서야, 나는 발견할 수 있었다. 눈부신 햇살 아래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치켜들고 고고하게 황금빛 자태를 뽐내던 해바라기들을.


 해만 바라보기에 해바라기라 이름 지어졌는데, 같은 텃밭에서 저마다 다른 하늘을 쳐다보는 해바라기들이라니 신기했다. 어쩌면 사람이 모르는 해바라기의 숨겨진 이면은 해바라기 씨앗만큼이나 많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읽어 보았다. 그랬더니 그 내용이 굉장히 색다르게 다가왔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만 읽을수록 달라지는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서른 살의 내가 재해석한 해바라기는 열 몇 살의 내가 본 해바라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태양신을 사랑하는 일편단심에 끝없이 기다리는 가련하고 수동적인 구시대적 여성상의 모습이라기보다 비록 일그러져 다분히 스토커의 기질을 띄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직접 행동하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시간이 흘러 사회가 바뀌니 사랑 이야기가 잔혹동화가 되었다. 사람들의 잣대와 시선이 달라지니 같은 이야기에서 두 가지 장르가 나와 버렸다. 신화 속 하나의 이야기마저 한 가지의 얼굴만 가지고 있지 않은데, 실제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이야기는 얼마나 다채로울 것인가. 이토록 수많은 길이 존재하는데 한 가지 길로 그 사람의 자유를 좁히려 함은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나는 과거엔 내가 부끄러웠다. 어렸을 때부터 변덕이 심했던 건지 하고 싶은 게 많았던 건지 나는 가야금을 쳤다가 사물놀이도 했다가, 오빠를 따라 그림을 그리기도 했으며 나중에는 민요 전공의 예고 학생이 되었다. 일 이 년쯤 지나자, 요리 관련 만화책을 즐겨보던 나는 외식경영 쪽으로 공부해보고 싶어 전공보다 수능에 더 치중하기도 했다. 그런데 웃기게도 들어가게 된 대학교는 예술 대학교였으며, 과는 영화과 경영 전공이었다. 기나긴 휴학 끝에 대학교를 다시 다니다 보니 영화미술 쪽에 눈이 트여, 졸업하고 난 후엔 드라마 미술팀에 취직했다. 이런 중구난방인 삶을 살아왔기에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세상은 왔다 갔다 하며 방황하는 사람보다 한 길로 우직하게 걸어가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을 아는 데, 정작 내 몸과 마음은 생각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한 가지 일만 파도 안 되는 게 사람인데 그래 가지고 성공하겠니?”


“만 시간의 법칙이라고 아니? 딱 하나 잡고 꾸준하게 만 시간 채워봐.”


“이제 와서 네가 열심히 한다고 먼저 시작한 사람들 따라잡을 순 있어?”  



 이런 소리가 내 안에서도 밖에서도 들려왔다. 그러자 이곳저곳 기웃거리던 내가 불완전하게 느껴졌고, 남들과 달리 진득하니 같은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는 내가 한심해 보였다. 어중간하게 이것저것 하는 사람이기보다 하나만을 특출 나게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세상 모두에게 인정받고 반짝여 보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세상의 잣대와 나의 이상이 너무 컸던 탓인지 나이가 들어갈수록 마음이 조급해졌다. 하지 못하는 나를 타이르지 않고 오히려 더욱 호되게 채찍질했다. 그러다 보니 채찍질로 생긴 상처와 그 전에도 가지고 있던 크고 작은 고름들이 터져, 끝내 내가 잡고 있던 모든 것들을 놔버리게 되었다. 밖에 나가지 않고 가족들과 친구들과도 연락하지 않았으며, 홀로 잠자고 술 마시고 게임하며 시간을 땅바닥에 쏟아부었다. 그러면서 이것저것 해보며 버렸던 시간과 지금 버리고 있는 시간이 얼마나 아까운지 얼마나 후회되는지 그렇게 살아온 내가 얼마나 미운지 생각했다. 


난 원래 이런 사람이야. 바뀔 수 없어. 난 나쁜 사람이야. 


하고 웅얼거리며 점점 더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나를 수렁에서 건져준 말은 ‘넌 할 수 있어’ 같은 칭찬과 위로가 아니었다. 나 또한 너처럼 많은 것들을 도전해보았고 실패를 겪었으며 지금도 힘든 상황에 있지만, 완벽하지 못한 너와 내가 함께 보듬고 기대어 살아보자는 진솔하고 묵직한 말이었다. 묵직한 말의 울림에 용기가 생겼다. 한 걸음 딛고 일어나 스스로를 가뒀던 껍데기를 깨니 지금껏 못 봤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길에서 발견한 서로 다른 곳을 보던 해바라기처럼.




 지금 나는 스스로가 자랑스럽다.


거장들처럼 잘 하진 못하지만 노래도 하고 가야금도 칠 줄 알며 그림도 그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문가들이 만족 못하겠지만 요리도 척척 해내고 영화를 보며 얕게 토론할 수 있으며 사진을 수정하거나 포스터도 만들 수도 있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았기에 할 줄 아는 것도 많아졌다. 그동안 좌절도 수두룩하게 했지만, 그만큼 경험도 빽빽하게 쌓였다. 그 누가 이렇게 뒤죽박죽 파란만장하게 살아보겠는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꽃은 그저 피어있을 뿐인데 멋대로 분류하고, 꽃말을 지었다. 심지어 단편적인 잣대로 태양을 닮은 노란 꽃이 태양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꽃에게 ‘해  바라기’라는 이름을 굳고 단단하게 새겼다. 이처럼 우리 모두에게도 주변의 잣대로 붙여진 이름표가 있다. 남의 시선을 따라 스스로 만들어 채운 목줄 같은 이름표 또한 있다.     


 하지만, 내 이름이 해바라기라고 해서 태양만을 바라볼 필요는 없다. 파란 하늘의 둥근 구름도 한 번쯤, 바람에 흩날리는 감나무의 초록빛 나뭇잎도 한 번쯤, 공중을 자유롭게 나는 까만 까마귀도 한 번쯤, 두려워하지 말고 마음껏 쳐다보자. 같은 방향만 쳐다보는 일률적인 해바라기들보다 저마다의 시선으로 자유롭게 간들거리는 해바라기들이 훨씬 아름다우니.





글 쓴 시누이 - 율힌 yulhin

그림 그린 새언니 - 전포롱 jeon polong


시누이와 새언니

여름이 되자 시누이는 염색이 하고 싶었다.

가닥가닥 염색하는 솜브렌지 옴브렌지 하는 염색이 하고 싶었다.

머리를 올려 묶으면 너무 예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왠걸 미용실에 갔더니 가격이 오십만원이란다.

시누이는 결국 손을 덜덜 떨며 보다 저렴한 푸르딩딩한 색으로 염색을 했다.

며칠이 지나고 시누이는 새언니를 만났다.

새언니의 머리는 가닥가닥 염색이 되어 있었다.

미용실이 비싸서 직접 했다던 새언니의 머리는 너무도 예쁘게 물들어 있었다.

시누이는 유투브로 보고 생각만 해봤던 건데

새언니는 행동까지 했다. 심지어 예쁘기도 하다.

시누이와 새언니가 이렇게 서로 같으면서 다르다니,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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