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케이크네. 생크림으로 웃는 얼굴까지.”
은비는 식탁 위에 놓인 접시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왜 싫어?”
엄마가 싱크대에 기대선 채 짜증난 얼굴로 물었다. 은비는 어색하게 웃으며 포크를 집어 들었다. 정말이지 궁금했다.
'왜 엄만 목요일 아침마다 이러는 걸까?'
다른 요일에는 알아서 먹으라고 신경도 쓰지 않다가 목요일만 되면 이랬다. 그것도 아빠가 잘해주던 핫케이크, 샌드위치, 토르티야 같은 걸 해줬다.
처음에는 목요일만 되면 돌아가신 아빠가 떠올라서 그러는가 했다. 하지만 벌써 1년 쨰다. 엄마는 지치지도 않고 놀랍도록 똑같은 걸 잘도 만들어냈다.
‘어휴, 맛까지 똑같네.’
은비는 살짝 느껴지는 짠맛에 코를 훌쩍거렸다. 어젯 밤도 아빠가 꿈에 나와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꿈을 꾸었다. 아주 가끔 꾸는 꿈인데 그럴 때마다 기분이 축 처졌다.
“잘 먹었습니다.”
차마 남길 순 없어 꾸역꾸역 입에 밀어 넣고는 가방을 둘러맸다.
"은비야. 엄마가 오늘 데려다 준다니까!"
등 뒤에서 엄마가 소리쳤지만 은비는 못 들은 척 현관을 나섰다.
폭풍이 오고 있다더니 바람이 힘차게 몰아쳤다. 조금 떨어진 곳에 놓인 화단 위 화분들이 비바람에 엉망진창이 되어 흙이 길에 쏟아져 있었다. 세찬 바람 탓인지 아니면 짠맛 나는 핫케이크 때문인지 자꾸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은비는 걸음을 멈추고는 손으로 눈꺼풀을 어루만졌다. 그렇게 슬쩍 눈물을 털어내고는 앞을 바라보다 깜짝 놀랐다.
‘어라? 대체 뭐지?’
괴상한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은비를 지나치던 아줌마의 우산이 새것처럼 변했다.
분명 세찬 바람에 너덜너덜했는데 무슨 마술이라도 부린 듯 원래 모습대로 돌아갔다. 바람에 맞서느라 몸을 웅크리고 있던 아줌마는 눈치조차 못 챘다.
'잘못 봤나?'
은비는 걸음을 옮기다 다시 한번 놀랐다. 길가에 구르던 화분들이 하나 같이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꽃들은 기운차게 줄기를 뻗어 올렸고, 잎사귀는 싱싱했다. 아까 얼핏 봤을 때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뭐야. 대체!'
은비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조금 떨어진 차도 위들 달리던 차들이 은비 앞을 지나치는 순간 거짓말처럼 깔끔해졌다.
바람에 날아든 낙엽이 덕지 덕지 붙은 차마저 지금 막 산 자동차처럼 변해버렸다. 햇살 아래 어찌나 반짝거리는지 눈을 뗄 수 없었다.
“혹시 꿈인가?”
은비는 손으로 자신의 볼을 꼬집어봤다. 하지만 아팠다. 아파서 눈물이 찔끔나기에 훌쩍이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머리 위에서 뭔가가 푹, 은비의 몸을 덮었다.
악!
은비는 깜짝 놀라 선 자리에서 펄쩍 뛰며 몸을 막 털어냈다. 하지만 그건 벌레가 아니라 안개였다. 안개가 마치 뱀처럼 꿈틀거리며 기어 오르나 싶더니 은비의 몸을 도르르 말았다.
“확실히 꿈이군.”
은비는 세상이 하얗게 변해가는 걸 보다 휙, 돌아섰다. 몸에 감긴 건 안개라 아무런 힘도 없었다.
아무래도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는데 바닷물 갈라지듯 안개가 갈라지더니 집이 보였다. 보고 있자니 어째 소름이 돋았다.
'그래도 가야지. 어차피 꿈이잖아.'
은비는 속으로 자신을 다독이며 천천히 집을 향해 걸었다.
안개 때문인지 집은 마치 까만 그림자처럼 보였다. 은비는 두려움을 누르며 마당을 두른 대문 앞에 섰다. 활짝 열린 문 너머로 하얀 양복을 갖춰 입은 멋쟁이 신사처럼 보이는 안개들이 좌우로 나뉘어 서있었다.
어찌나 정교한지 저마다 짓고 있는 표정마저 다른 것 같았다. 어떤 안개 신사는 웃고 있고, 또 어떤 안개 신사는 은비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평소 은비가 빨래 널 때 쓰던 초록색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하얀 두루마기를 걸친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해맑게 웃고 있었다.
“안녕? 난 동쪽 학교 교장인 박재상이라고 한단다."
“안녕하세요.”
은비는 마지 못해 인사를 했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이건 좀 이상했다. 너무 생생했고 너무 진짜 같았다.
“일 년 만에 다시 보니 반갑구나. 그래 잘 지냈니?”
교장 선생님이 가볍게 묻는 말에 은비는 덜컥 겁이 나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누구세요? 제가 다니는 학교 교장 선생님은 아니신 것 같은데.”
아무리 꿈이라지만 일단 알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러자 교장 선생님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전래동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아니? 평범한 사람들이 믿지 못할 또는 믿기 싫은 경험을 했을 때 만들어진단다.”
은비는 눈을 끔뻑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요?"
교장 선생님이 대답대신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옆에 서있던 안개 신사가 은비에게 얇은 그림책 한 권을 건넸다.
[재주꾼 오 형제]
초등학교 1학년 땐가 수업 시간에 배운 적이 있는 전래동화였다. 갖가지 이상한 재주를 가진 남자아이 다섯 명이 서로 만나 의형제를 맺고 못된 호랑이를 물리친다는 이야기로 이걸로 연극도 했었다.
그때 은비는 넷째 오줌이 역할을 맡았었다. 하기 싫어서 엉엉 우는데도 억지로 해야만 했었다. 그래서 재주꾼 오 형제는 은비에게는 다시 읽기 싫은 전래동화였다.
'그런데 이걸 왜 보여주는 거지?'
은비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교장 선생님을 바라봤다. 교장 선생님은 그림책을 눈짓했다.
“이 전래도 그렇지. 평범한 사람들은 믿기 싫어한단다. 재주꾼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말이야. 그들은 너나 나 같은 재주꾼을 두려워하지. 자신들은 갖지 못한 재주를 가졌다는 이유로 말이야.”
은비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자 교장 선생님은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난 바로 그런 재주꾼을 길러내는 도제 학교를 운영하고 있지. 도제란 말이 좀 어렵지? 네 또래 아이들은 길드란 말에 더 익숙하더구나. 동쪽 시장에는 널 가르쳐줄 뛰어난 장인들이 아주 많단다.”
“그러니까 제가 재주꾼이라고요?”
은비가 물었다.
“그래. 넌 재주꾼이야. 방금 전 봤잖니.”
교장 선생님이 대답했다. 은비는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다가 풋, 웃음을 터트렸다.
"뭔가 잘못 안 거 아네요? 전 이상한 재주 따위 없어요."
“우산이 저절로 고쳐지고, 길가의 화분이 제 모습으로 돌아가고, 달리던 차가 새것처럼 바뀌는 걸 못 봤단 거니?”
“보긴 봤지만. 음, 이건 꿈이니까요.”
“꿈?”
교장 선생님은 짤막하게 반문하더니 부드럽게 웃었다. 은비가 왜 그러나 싶어 눈을 끔뻑이자 교장 선생님이 말을 이었다.
“그렇구나. 지난번에는 날 보고 도망치더니만 어째 오늘은 좀 다르다 했다. 그런데 어쩌지? 이건 꿈이 아니란다.”
“꿈 맞아요. 그러니까 저 안개가 사람처럼 저러고 있는 거겠죠.”
“음, 이건 네가 네 스승 밑에서 열심히 공부를 한다면 얼마든지 부릴 수 있는 재주란다.”
교장선생님이 안개 신사를 눈짓하며 말했다. 은비는 어깨를 으쓱거렸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교장 선생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말을 이었다.
“고집 센 건 하나도 안 변했구나. 뭐, 좋다. 1년 전 네가 떠날 때와는 상황이 달라졌단다. 그러니 시장으로 돌아와 네 재주를 갈고닦도록 하렴.”
“제 재주가 뭔데요?”
“넌 사물을 고치는 재주가 있어. 다루기도 쉽고. 사소한 잔재주로 다른 재주를 감추기도 하지. 재주꾼 중에서는 흔한 재주에 속한단다.”
교장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고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예언자는 널 아홉 번째 소녀라 부르더구나”
“............... 그거 뭔가 나쁜 거예요?”
“재주꾼의 역사에 세상을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간 여덟 명의 재주꾼이 있었단다. 그들은 모두 10대의 소녀들이었지.”
“그럼 지금 절 감방 같은 곳에 가두려고 이러시는 거에요?”
“그럴리가! 예언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계속해서 바뀐단다. 그래서 난 네가 공부를 했으면 하는 거야.”
교장선생님의 목소리는 무척 따스했다. 은비는 이런 말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건 항상 곁에 있던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아빠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아빠가 살아있다면 뭐라고 했을까?’
은비는 속으로 중얼거리다 피식 웃었다.
‘전력을 다해 세상을 멸망시켜!’
아빠라면 분명 이랬을 거다.
“책을 펼쳐보렴.”
교장 선생님이 눈짓했다. 은비는 웃음을 삼키며 시키는 대로 책을 펼쳤다.
“어라?”
왼쪽에 그려진 재주꾼 오 형제는 은비가 알던 그 재주꾼들이 아니었다. 의기양양 환하게 웃는 남자아이들이 아니었다. 대신 어두운 낯빛을 한 소년들이 거기 있었다.
팔목과 발목을 황금띠로 둘둘 동여맨 것만 빼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까맸다. 눈빛은 책장을 뚫을 듯 날카로웠고, 굳게 움켜쥔 주먹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콧구멍이 넓은 애도 없고 주먹이 큰 애도 없고. 이거 정말 재주꾼 오 형제 맞아?’
은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오른쪽 장을 보았다. 그곳에 그려진 건 호랑이 대신 우락부락하고 험상궂게 생긴 남자들이었다.
그들 손에 들린 방망이만 아니었다면 영화에 흔히 나오는 나쁜 어른들이라고만 생각했을 것 같다.
“이거 대개 안 어울리네요. 생긴 게 꼭 도깨비방망이 같은데.”
은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도깨비니까.”
교장선생님이 대답했다. 은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교장 선생님을 바라봤다. 교장 선생님은 그런 은비를 지긋이 바라보더니 조용히 물었다.
“혹시 눈꺼풀이 간지럽지 않니?”
“별로요.”
“정말? 그럼 다음 장으로 넘기렴.”
“왜요?”
은비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책장을 넘겼다.
그곳에는 도깨비들이 더더욱 크게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앞장과는 달리 그들은 재주꾼 형제들의 재주에 휘말려 허둥대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슬그머니 눈꺼풀이 간지러웠다.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은비는 눈을 비볐다.
“좋구나. 아주 좋아. 자, 다시 다음 장을 볼래?”
교장 선생님이 무슨 최면이라도 거는 것처럼 몽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손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다음 장은 더더욱 눈을 가렵게 했다. 도깨비들이 재주꾼 형제에게 싹싹 빌고 있는 모습이었다. 도깨비방망이는 모두 형제들의 손에 들어갔고, 도깨비들은 초라한 행색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갑자기 가려움증이 심해졌다. 은비는 미친 듯이 눈을 비벼댔다. 너무 가려워 견딜 수가 없었다. 한참 비벼대자 눈꺼풀에 불이 붙는 기분이 들었다.
“아파!”
은비는 책을 떨어뜨리며 두 손으로 눈을 감쌌다.
“괜찮다. 괜찮아. 자, 천천히 손을 떼렴.”
교장 선생님이 은비의 두 손을 감싸며 말했다. 시킨 대로 하자 햇살이 눈을 따갑게 했다.
어느 틈에 은비 앞에 선 교장 선생님은 은비의 손에서 뭔가를 집어 들었다.
잠자리 날개처럼 아주 얇고 속이 훤히 비쳐 보였다. 반달 모양의 그것은 두 개였는데, 그중 하나가 찢어져 있었다.
“역시 도깨비 눈꺼풀이었구나. 네 재주를 봉하고 있었어. 이게 찢어지는 바람에 그동안 쌓인 네 재주가 한꺼번에 흘러나왔고. 하지만 이상하구나. 도깨비 눈꺼풀은 그저 재주를 봉하는 힘만 있을 텐데 기억까지 지워지다니.”
교장 선생님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그게 제 눈에서 나온 거예요?”
“그래. 대체 이게 어디서 난 건지 짐작은 간다만. 어쨌거나 걱정이구나. 예언자가 네 이름을 입에 올리는 바람에 네가 왜 학교를 그만두고 사라진 건지 재주꾼 장인 협회에서 조사에 들어갈 거다. 이럴 줄 알았다면 1년 전, 네가 떠나는 걸 그냥 모른 척하지 말 걸 그랬어. 미안하구나.”
교장 선생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굉장히 속이 상한 것만 같았다.
“아뇨. 제가 아홉 번째 소녀라서 죄송해요.”
은비가 쩔쩔매며 말하자 교장 선생님이 크게 웃었다.
“됐다. 그건 사과할 문제가 아니야. 사실 난 여덟 명의 재주꾼 소녀들이 세상을 멸망시키려 했다는 기록조차 믿지 않는단다. 그러니 너 자신의 선함을 믿으렴.”
교장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더니 주머니에서 수건을 꺼내 도깨비 눈꺼풀을 놓고는 조심스럽게 감싼 뒤 덧붙였다.
“자, 그럼 이제 돌아갈 준비가 다 된 것 같구나. 지난해 같은 반이었던 아이에게 마중을 부탁했다. 그럼 또 보자꾸나.”
은비를 지나쳐 교장선생님이 대문을 나섰다. 안개 신사들도 뒤를 따랐다. 대문 앞에는 어느 틈에 차가 와서 서있었다.
교장 선생님이 타자 온통 까만색으로 창을 가린 차가 출발했다. 그와 함께 안개도 걷혔다. 폭풍마저 놀라 도망을 쳤는지 파란 하늘이 얼굴을 드러냈다.
은비는 멍한 얼굴로 차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돌아섰다. 출근하는 모양인지 화장을 한 엄마가 서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은비는 깨달았다.
‘꿈이 아니었어.’
그리고 다음 순간 머리를 쥐어뜯으며 외쳤다.
“으악! 지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