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 The *uking Manual
'RTFM'라는 말을 어딘가에서 들은 적이 있다.
Read The *uking Manual(제에발 좀 매뉴얼을 읽으세요)의 앞글자를 딴 말이라고 한다.
회사원이라면 피식할 수밖에 없는 용어. 매뉴얼을 작성하는 공급자 입장에서는 공감이 될 테고, 매뉴얼을 정독하지 않아 담당자에게 재차 확인을 하는 독자 입장에는 미안함과 머쓱함에 쓴웃음이 날 것이다. 나도 RTFM이라는 말의 진상을 알고 나서는 잊을 수가 없어서 비슷한 상황이 오면(?) 종종 이 단어를 떠올리곤 한다.
매뉴얼. 보통의 회사라면 업무 매뉴얼 한 두 개 (한 두 개만 있으면 다행이지...)쯤은 있기 마련인데, 지금의 회사에서 와서 놀란 점은 매뉴얼이라는 게 없다는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매뉴얼이 존재는 하지만 현행화가 되어있지 않아 아주 오래 전의 내용이 적혀있거나,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내용들이라 신뢰할 수가 없었다.(ex. A: 여기 적혀있는 게 사실인가요? B: 글쎄요....아무도 모릅니다.)
팀에 새로 합류하는 조직원이 도메인을 이해할 수 있도록,
협업하는 동료에게 우리 도메인에 대해서 설명하고 어떤 부분을 함께 작업해야 하는지 파악할 수 있도록 현행화된 매뉴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딱히 누가 시킨 건 아니지만 팀에 합류했던 시점에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일이라 업무 틈틈이 매뉴얼을 작성하고 있다. 목표는 누군가 업무 관련 질문을 했을 때 매뉴얼 링크를 딱! 주면서 "여기에 다 있습니다!" 하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
물론 매뉴얼 작성에도 고난은 따른다. 한 번은 QA팀을 위한 테스트 방법 매뉴얼을 작성하다가 모르는 부분이 있어서 선임자에게 질문을 했더니 "그 내용은 이미 구두로 QA팀에서 전달했기 때문에 QA팀이 알고 있는 부분."이라며 "피넛님 빼고 다 알아요.", "매번 매뉴얼 매뉴얼, 아주 다 적어놓을 기세네." 하는 말을 듣고 말았다.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았다. 나는 QA팀으로부터 질문을 받은 것이었고, 이왕이면 내용을 파악해서 문서화해놓으려던 것이었다. 선임자는 '당연히 이 내용은 모두 알고 있다'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아주 다 적어놓으려는 기세라고 발언한 부분에 대해서는 맞았다. 나는 기록에 조금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회사를 오래 다니면, 혹은 같은 말을 반복하다 보면, 당연히 모두가 다 나와 같은 지식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혼동을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현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일이 우선이므로 내 일에 대해서 나와 같은 수준의 지식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누구를 대하든 상대방이 제로베이스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 ('왜 이걸 모르지'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어떻게 이걸 알고 있지!'라고 생각하는 편이 정신 건강에 훨씬 도움이 된다)
구전되는 이야기는 왜곡되고 변질될 수 있으므로 모두가 같은비슷한 지식을 갖기 위해서는 기준이 되는 기록이 중요하다. 생각해 보면 심지어는 내가 한 이야기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가 많지 않던가. 나를 위해서라도 기록은 중요하다. 물론 타인을 위해서라면 더욱 중요하고.
매뉴얼을 만든 이후도 물론 중요하다. 기록 그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그것의 쓰임이 더 중요하니까. 팀 내에서 일관된 목소리로 "여기를 보십시오" 하고 매뉴얼에 관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사용되도록 관리를 해주어야 한다.
사용되지 않는 매뉴얼은 의미가 없다.
매뉴얼은 읽어주는 사람이 존재할 때 비소로 빛을 발한다.
아직은 매뉴얼이 없어 'RTFM' 하고 외칠 수 없지만,
매뉴얼이 있더라도 'RTFM!!!!'하고 열폭할 일 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매뉴얼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같은 질문이 반복되거나(이러면 내용을 의심하고 보완해야 한다), 혹은 매뉴얼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들은 계속 생겨난다(매뉴얼도 지속적인 홍보와 마케팅이 필요하다).
매뉴얼은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가 더 중요한 것 같다(작성자의 속죄일지도 모른다).
예전에 다니던 회사에서는 기록을 남기지 않고 꼭 본인을 통해서 업무 히스토리를 확인받도록 하던 동료가 있었다. 그는 "이 히스토리를 파악하려면 2시간은 얘기를 들어야 해요. 엣헴!"하고 거들먹거리기를 좋아했다. 나중에 술자리에서 얘기를 들어보니 그의 행동은 그 시대의 사람들의 생존방법이라고 했다. 그는 "기록과 공유는 최대한 적게 해서 사람에게 의존하면 회사 생활 오래간다. 그것이 자리보전의 노하우다."라고 말했다.
그의 생존 방식에 공감은 될지언정 동의할 수는 없다. 같은 방식으로 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통하지 않고서도 회사는 돌아가야 한다. 내가 없더라도 지식은 전파되어야 하며, 후임자들이 빠르게 도메인을 파악하고 랜딩 해서 더 좋은 서비스를 만들고 고객 가치를 높이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는 월급쟁이지만 우리에게 돈을 벌어다 주는 사용자와 고객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매뉴얼이 뭐라고.
매뉴얼 하나 때문에 이렇게 줄 줄 긴 글을 써 내려가는 이유는 결국, 매뉴얼을 만들겠다는 내 목표를 잊지 않기 위함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RTFM을 외치려는 것.... 은 아니고)
내 다음 세대(?)에는 업무의 길잡이가 있었으면 해서다.
나보다는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빠르게 파악해서 진짜 할 일에 집중하게 하기 위함이다.
내가 떠난 뒤에도, 내가 없이도 이 시스템이 잘 돌아가길 바라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사람은 떠난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