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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넛 Jan 04. 2024

지브리의 숨겨진 60가지 이야기

지브리의 천재들


도서 ‘지브리의 천재들’에 나온 에피소드 중,

새롭게 알게된 사실이나 재미있게 느껴진 사건을 모아봤다.

모아놓고 보니 총 60가지.

지브리의 숨겨진 60가지 이야기다.



1. 미야자키 하야오(이하 '미야')의 옆에는 스승이자 선배, 동료인 타카하타 이사오(이하 '타카하타')가 있었다.


2. 타카하타 이사오는 매우 느긋한 성격의 사람으로, 젊은 시절 항상 아슬아슬한 시간에 출근해 빵을 '파쿠파쿠(와구와구 라는 뜻의 일본어)' 먹어서 별병이 '파쿠'가 되었다고 한다.


3. 그들은 '세계명작극장', '미래소년 코난' '빨간머리 앤' 과 같은 작품을 함께 했다.


4. 젊은 시절, 타카하타는 똑똑하고 잘 생겨서 항상 주변인들에게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미야는 아니었다고 한다...)


5. 타카하타가 애니메이션 업계에 발을 들일 때는 애니메이터가 3D 업으로 인식되던 시기라, '도쿄대 출신이 여기에 왜...?'라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6. 미야가 타카하타에게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 프로듀서를 요청하자 타카하타는 거절한다. 그러자 미야는 "난 15년간 타카하타 아사오에게 청춘을 바쳤지. 하지만 돌려받은 건 아무것도 없어." 하고 울었다. 결국 타카하타는 프로듀서를 승낙한다.


7.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 제작회사를 찾아다닐 당시 많은 거절을 받았는데, 이유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라면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겠지만, 스태프와 회사는 엉망이 될 거야."였다. 미야는 악명 높은 감독이었다.


8. 실제로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 제작사 대부분의 직원이 퇴사했다.


9. '지브리'라는 이름은 이탈리아 군용 정찰기 'gibli'에서 나왔다. 타카하타가 '기블리 아니야?'라고 묻자 미야는 '이탈리아 친구가 지브리라고 했다'라고 대답했다. 기블리가 맞았다.


10. 지브리의 대표작 '이웃집 토토로'의 극장 성적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에 DVD판매, TV방영, 인형, 굿즈 판매의 수익이 좋아 지브리에 막대한 수익을 벌어주었다고 한다.


11. 타카하타가 감독을 맡은 '반딧불이의 묘'는 퀄리티를 높이느라 개봉일까지 일부 컷의 채색이 되지 않은 상태로 개봉했다.


12. 채색이 완료된 것은 개봉 후 한 달이 지난 뒤였다.


13. 미야가 웅장한 설정의 배경에 강하다면, 타카하타는 개인의 감정이나 일상의 장면을 표현하는 데 강했다.


14. 잇단 애니메이션의 성공으로 지브리는 '스태프 정규직화'와 '소득 2배 증가' 계획을 세우고 실행한다.


15. '추억은 방울방울'이라는 애니메이션 감독을 맡은 타카하타는 배우의 목소리를 먼저 녹음한 뒤 그에 맞춰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도입한다. 이는 더 자연스러운 장면을 연출할 수 있지만 작업 시간이 엄청 늘어나는 방식이었다.


16. 작업 시간이 늦어지자 미야는 "그림 그리는 방법을 바꿔! 이렇게 해서는 영영 안 끝나!" 하고 모든 스태프를 모아두고 소리를 질렀지만, 미야가 떠난 뒤 타카하타는 스태프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지금까지처럼 그리면 되네."하고 말하고 다녔다.


17. 그래도 미야가 소리를 지른 보람이 있었는지 작업 속도는 빨라졌다고 한다.


18. 당시 극작용 장편 애니메이션 작화에 드는 평균 소요일은 3개월이었다. '추억은 방울방울'은 2년이 걸렸다.


19. '붉은 돼지'는 '일본항공'에 비행기 내에 상영될 15분짜리 기획으로 시작했다. 콘티를 그리다 보니 설정에 설정이 붙어 결국 장편 영화가 되었다.


20. ‘붉은 돼지'의 스태프 대부분은 여성으로 구성되었다.


21. 영화 속 비행정을 고치는 정비사들은 모두 여성으로 그려졌다.


22. '붉은 돼지'에 투자한 일본항공은 영화가 완성될 때까지 주인공이 돼지인지도, 제목이 '붉은 돼지'인지도 몰랐다고 한다. 다행히 사전 상영회에서 평이 좋았다고.


23. "내가 돼지로 영화를 만들었으니까 타카하타 씨에게는 너구리로 만들게 하자!"가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의 시작이 되었다.


24. 미야가 경영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다면, 타카하타는 경영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25. 타카하타는 느긋한 예술가 기질이 강했다.


26. 역시나 일정이 늦어지는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에 화가 난 미야는 "제작을 중지하지 않는다면 내가 지브리를 관두겠네.", "너희들 다 해고야!" 하고 소리치기도 했다.  스트레스를 받아 쓰러진 적도 있다. (다행히? 스태프들은 해고되지 않았다)


27. 이런 우여곡절 끝에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영화가 완성되고 첫 상영일... 미야는 처음부터 끝까지 울었다. 그 영화에 등장하는 너구리는 도에이동화(애니메이션 제작사) 시절 당시 노동조합 운동을 하던 그들의 모습을 투영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28. 미야와 타카하타는 과거에 노조 간부로 활동한 적이 있다.


29. '귀를 기울이면'에서는 미야가 시나리오와 콘티를 담당하고 '곤도 요시후미(곤 짱)'을 감독으로 앉혔다.


30. 미야가 그림콘티에서 주인공이 뛰어가는 장면을 그리면, 곤 짱은 천천히 걸어가는 연출을 하곤 했다. 미야는 몸이 먼저 움직이는 소녀고, 곤 짱은 천천히 곱씹은 후에 생각하는 소녀의 이미지를 추구했다.


31. 시사회에서 어느 기자의 질문에 곤 짱이 대답한 것에 대해 미야는 "그게 아닙니다. 감독은 아무것도 모릅니다."하고 곤 짱을 부정한 적이 있다.


32. 그럼에도 불구하고 곤 짱은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


33. 곤 짱은 미야의 후계를 이을 재목이었으나, 몇 년 뒤에 건강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다.


34. '모노노케 히메'의 광고 카피는 '살아라'였다.


35. 미야는 '모노노케 히메'시사회 투어를 하던 당시 피로로 쓰러졌는데, 그는 침대에 누워 종이에 자신의 얼굴을 그리며 "내 대신 이걸 쓰고 내일 무대 인사를 해주게..."라고 말한 적이 있다.


36.  지브리는 규율이 엄격한 회사였지만, 회사의 기풍에 맞지 않는 애니메이터도 있었다. 실력은 뛰어나지만 제시간에 출근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감독의 말을 듣지 않는 애니메이터들이 모여있는 제4스튜디오라는 곳이었다.


37. 제4스튜디오의 애니메이터들은 실력이 뛰어났지만 행동이 불량했다. 막상 필요한 경우에 도움을 거절하는 경우도 많아서 프로듀서들이 고생을 하기도 했다고.


38. '이웃집 야마다 군' 감독을 맡은 타카하타는 여기서도 여러 가지 기법과 CG 기술을 접목하느라 일정을 많이 지연되었다.


39. ‘이웃집 야마다 군’의 흥행이 잘 되지 못한 상황이었는데 뒤풀이에서 타카하타가 "가령 히트하지 않더라도, 이 영화에 관여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시다!"라고 말해서 프로듀서가 속이 많이 탔다고 한다. 정말 느긋한 성격의 사람.


40. '이웃집 야마다 군'은 작품성을 인정받아 뉴욕 현대 미술관에 영구보존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41.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한 스태프의 딸(치아키)을 위해 기획되었다.


42.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작화를 담당한 애니메이터는 너무 스트레스받은 나머지 작화를 마쳤을 때 대머리가 되었다. 그리고 지브리를 퇴사했다.


43. 프로듀서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홍보 메인을 '가오나시'로 잡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그러자 미야가 "왜 가오나시로 홍보하지...?"라고 물었고 프로듀서가 "이건 치히로와 가오나시의 이야기 아닌가요?"라고 답했다. 미야는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치히로와 하쿠 이야기잖아....?"라고 말했다.


44. 영화가 완성되고 치아키(스태프의 딸)에게 영화를 보여주었고 그녀는 "재밌었어요!"라고 답했다.


45. 치아키는 집에 돌아가서 "아빠, 한 가지 다른 게 있었어. 마지막 부분에 신발이 나왔잖아? 그 그림이 달랐어. 나는 세일러문 신발을 신고 있었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이답다.


46.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미야가 본격적으로 연애 영화를 만들겠다고 선언한 작품이었다.


47. "그런데, 연애 영화는... 어떻게 만드는 거더라?".... 미야는 보통의 연애를 표현하는 데 서툴렀다.


48. '하울의 움직이는 성' 콘티 작업 당시 한 컷당 8초로 작업되어 템포가 느려진다고 지적을 하자 미야는 "주인공이 할머니라서 그래!" 하고 난감해하며 답변했다.


49.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당시 영화관 스크린을 독점하다시피 상영되었고, 홍보덕을 톡톡히 봤다.


50. 그만큼 작은 영화들이 상영될 기회를 뺏은 것이기도 했다.


51. 미야는 스태프들을 일일이 붙잡고 "센과 치히로가 왜 히트했다고 생각해? 홍보 덕분이야? 작품이 좋아서야?"라고 묻고 다녔다.


52. 대부분은 "작품이 좋아서요"라고 대답했는데, 단 한 명의 스태프가 "홍보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


53. 이에 마상을 입은 미야.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영화의 줄거리나 설정을 자세히 공개하지 않는 방향으로 홍보 방식이 바뀌게 된다.


54. '게드 전기'는 건설 컨설턴트로 일하던 미야의 아들 고로가 감독을 맡은 작품이다. 미야는 반대했지만 프로듀서의 강한 설득과 고로의 그림 실력에 결국 감독을 맡기게 된다.


55. 고로는 아버지의 후광을 받아 감독 자리에 올랐다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그는 콘티 실력이 출중했다. 또한 고로는 미야에게는 없는 스태프를 하나로 모으는 통솔력도 갖추었다.


56. '게드전기'에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


57. ‘게드전기’ 이후 고로는 원래 맡고있던 지브리 박물관 건설 업무로 돌아갔다.


58. 미야는 73살에 죽을 것이라는 강박을 갖고 있었다.


59. '마루밑 아리에티'의 시나리오 작가인 니와 게이코는 "미야 씨 말이 계속 바뀌는데, 자네는 괜찮나?"라는 질문에 "괜찮아요. 천재의 사고 과정인걸요. 재미있어요."라고 답했다.


60. 타카하타 이사오가 감독을 맡은 '카구야 공주 이야기'는 무려 8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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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브리 스튜디오의 영화를 좋아해서,

영화 제작의 뒷이야기 또한 무척 재밌게 느껴졌다.


역시 남의 일 얘기는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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