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적인 척
어느 날 회사가 말했다.
“우리는 수평적으로 일하는 게 아니라, 수평적으로 소통하는 것을 지향합니다. “
회사 규모가 점점 커가면서 예전만큼 수평적으로 일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임직원들의 불만에 대한 회사의 답이었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거나 상장사인 경우에는 책임과 권한이 나눠지고 법에 의해 필요로 하는 절차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따라서 작은 규모일 때와 똑같이 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변화하는 환경에 맞춰…
예전처럼 마냥 수평적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수평적으로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려는 회사의 취지였으리라.
점점 커가는 규모에서도 작게 시도하고 기민하게 대응하는 게 가능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일하는 문화가 금방 바뀌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급변하는 상황과 회사의 태도에
살짝 섭섭하기도 하고,
올 게 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회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기만하는 듯 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수평이면 수평이지,
수평적으로 일할 순 없지만 수평적으로 소통하라니?!
수평적인 문화로 소문난 회사에서 조차 이렇다면… 이왕 이렇게 된 거(?) 대놓고 대기업인 회사를 가보면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요즘에는 대기업에서도 수평적으로 일하려는 노력을 많이 한다던데, 진짜 옛날과는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 대기업으로 이직했다(물론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고, 복합적인 이유가 있지만 수평적인 커뮤니케이션도 요인 중의 하나다)
대기업에 와보니,
호칭도 ‘님’으로 부르려고 하고,
직급도 없애고,
실리콘밸리의 성공 사례들을 연구하며 받아들이려고 회사 차원에서 많은 노력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 직장과 비교하면 꽤나 수직적이고 딱딱한 분위기. 누군지 모를 조직에게 보고는 계속되고. 보고를 위한 일도 많고. 조직장의 권위가 높으며 ‘하라면 해’라는 느낌이 많이 드는 편이다.
그제야 드는 생각,
‘수평적인 척이라도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
그런 ‘척’ 조차 하지 않으면 얼마나 경직된 조직이었을까.
아득했다.
나는 전혀 친절하거나 침착한 편은 아니지만 회사에서는 ‘친절한 척’, ’ 침착한 척‘, ‘꼼꼼한 척’, ‘열정적인 척’ 연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연기를 하는 가면이 가끔 벗겨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팀 외부 분들이나 짧은 시간만 보는 분들에게는 통할 때가 많아서, 10년 넘게 가면을 쓴 보람을 느끼는 날도 적지 않다.
내가 이런 ‘척‘ 조차 하지 않으면 사회생활이 어려울 것이다.
아찔하다.
회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척’이라도 해야 구성원들이 수평적인 시늉이라도 한다. 계속 ‘그런 척’을 하다 보면 누군가는 속아 넘어가는 사람도 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굿!)
’ 수평문화‘는 채용 시에도 플러스 요인이기 때문이 많은 회사들이 홍보용으로도 많이 언급하므로,
처음부터 가면이 완벽하지 않겠지만 뜻있는 조직원들이 더 단단한 가면을 만들고자 하면 충분히 할 수 있는 환경이 된다.
회사와 조직 구성원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
회사인 이상,
누군가는 의사결정을 하고, 책임을 진다.
완벽하게 수평적 일순 없지만,
수평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하고,
수평적이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수평적인 ‘척’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