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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 Apr 17. 2023

실수로 잃은 중요한 것

- 이와  삶의 질에 관한 이야기

 “어?”     


큰일 났다. 입안에서 단단한 무엇인가가 떨어져 나간 것이 느껴졌다. 거울로 실체를 확인하고 경악했다. 아래쪽 앞니가 부러져있었다.


그래. 내가 잠시 잊고 있었구나. 유전적으로 이가 좀 부실하다는 사실을 잊은 채, 유난히 단단한 오징어를 앞니로 끊어먹으려고 했던 것이다. 가끔 TV 영상 속에서처럼 연세 있으신 분들이 단단하게 묶인 매듭을 풀려고 이를 사용하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사과는 잘 씻어서 통째로 들고 먹는다든가, 단단한 오징어를 씹는다든가 하는 행동들은 적어도 내가 해서는 안 될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자꾸 앞니로 자르려는 잘못된 행동을 했었고 결국 이런 사달이 난 것이다.

      

정면으로 보이는 제일 앞쪽 아랫니가 사선으로 부러져있었다. 멀쩡했던 사람도 앞니가 부러졌거나 소실되었을 때 살짝 모자란 사람처럼 보이는 것은, 이제는 사라진 여러 개그프로에서 앞니를 굳이 검게 칠하고 나온 이유로도 알 수 있다. 뛰어난 미모를 가진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멀쩡해 보였던 사람이 갑자기 개그우먼처럼 보일까 봐 혼자서 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부랴부랴 치과로 향했다.     

처음 방문한 치과에서는 너무 어이없게도 그냥 그렇게, 부러 진상태로 사용하라고 했다.


‘말이 되나?’


했지만, 사실 의사 선생님의 말씀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원래 아래쪽이 보기 안 좋을 정도는 아니더라도, 이쁘게 고른 치아가 아니라서 사선으로 살짝 부러진 상태가 겉으로 보이기에는 티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레진으로 치료를 하더라도 금세 다시 떨어져 나갈 수 있고, 크라운으로 씌우려면 기존의 멀쩡한 치아를 상당 부분 깎아내야 해서 기존 치아가 약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을 텐데, 묘하게 설득이 되었다. 윗니도 아니고 아랫니 살짝 깨진 정도는 나만 의식할 뿐 다른 사람들은 신경 써서 보지 않는 이상은 별로 티가 나지 않을 수도 있다.

문득 최근 읽은 책에서 본 구절이 생각났다.

     

[ “생각보다 사람들은 너에게 관심이 없어.” ]   

  

‘그래,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내 입속을 주의 깊게 볼 만큼 나에게 크게 관심이 있지는 않겠지.’  

   

그런데 문제는 내 마음이었다. 남들이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병적으로 부러진 앞니에 신경을 쓴다는 사실. 그것 때문에 괴로운 것이었다.


전문가가 하지 말라고 하는데 굳이 할 필요가 있겠나 싶어서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뭔가 개운치 않아서 인터넷을 검색했다. 그냥 두면 안 된다는 말도 많았고, 이는 기존 가지고 있는 것은 최대한 살려서 쓰는 것이 좋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래, 그냥 조금만 더 그대로 사용해 보자.'


문제는 잘못된 습관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 앞니의 용도가 그렇게 대단한 줄 처음 알았다. 무엇인가를 끊어낼 때는 필수로 사용해야 하는 것이 앞니였다. 최대한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게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음식을 먹을 때, 무조건 끊어내는 용도가 필요했고, 하다못해 사과 한 알을 통째로 들고 먹으려고 해도 앞니가 필수로 필요했던 것이다. 자꾸 그렇게 사용하다 보니 점점 부러진 이가 마모가 되는 것이 눈에 보이는듯했다. 하지만, '에라 모르겠다. 이러다 더 마모되면 그때 크라운 치료를 받자.' 생각하고 그냥 또 그렇게 마구마구 앞니를 사용했다. 진짜 광고 문구처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조심하지 않으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제는 말을 할 때 신경이 쓰일 정도가 되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더 도드라지게 눈에 보이는 듯했다.  이렇게 신경 쓸 바에는 ‘그냥 치료하자.’ 싶어서 다시 치과에 방문했다. 물론 극구 말리는 곳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 그곳에서도 마찬가지이긴 했다.


'하지 말아라.'

'아니 너무 양심적이신 거 아닌가?'


 안 해도 될 치료를 강요해서 과잉 진료를 했다고 카페에 글을 올리는 분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어찌 가는 곳마다 해달라는 치료도 안 해주고 그냥 가라니…. 이러면 과잉 진료라고 소문난 곳을 찾아야 하나? 하는 어이없는 생각도 잠시 해봤다.

스케일링 후 선생님께서 정식 치료는 아니고 그냥 살짝 붙여주실 텐데 절대 앞니를 사용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셨다. 치료가 끝나고 거울을 보니 너무 만족스러웠다. ‘진작에 할걸.’  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앞니를 사용하다 뭔가 뚝 부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붙였던 것이 떨어졌다. 바로 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냥 크라운 치료를 해야겠다고 했는데, 또 권하지 않는다는 소리만 하셨다. 하는 수없이 세 번째 다른 치과로 예약을 잡았다.


나는 가자마자 크라운치료를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이 정도면 별로 티도 안 난다며 크라운 치료 말고 레진을 권하셨다. 역시 기존 치아를 훼손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불안해하는 나에게 1년 안에 치료한 곳이 잘못되면 크라운 치료할 때 비용을 제해주겠다고 하셨다. 나로서는 손해 나는 일은 아니었다. 다행히 한 달이 지난 지금도 아주 멀쩡하게 잘 붙어있으니, 기존 치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미용상의 효과도 얻고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치료에 만족했었기 때문에, 앞니와 관련해서 큰 문제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 문제는 바로 음식을 먹을 때마다 신경을 써가며 앞니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삶의 질이 아주 많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음식을 먹을 때도 먹음직스럽게 한가득 베어 물지 못하고, 살짝 틀어서 송곳니나 어금니 쪽으로 의식해서 씹어야 한다는 것이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에 와서 후회해 봤자 아무 소용없는 일. 딱딱한 오징어를 탓하거나 나의 부주의를 탓해봐야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앞으로 내 인생에서는 사과하나를 통째로 베어 물 수도 없고, 뼈에 붙은 갈빗살도 뜯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우울하기까지 했다. 차라리 치료하지 말고 그냥 실컷 먹고 싶은 것 맘대로 먹을 걸 그랬나 싶다가도, 거울 볼 때마다 치료된 이를 보면 또 흐뭇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아직은 맘껏 먹는 즐거움보다는 미에 신경을 쓸 나이라고 생각하며, 지금의 불편한 것쯤은 잠시 참아보리라 다짐해 본다.     





   

주변에 강아지를 키우는 분이 여럿 있다. 한두 해 전까지만 해도 나는 동물을 좋아하지 않았다. 단순 좋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좀 무서워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처음에 언니가 시골 엄마 집으로 다솜이라는 말티푸 반려견을 데리고 왔을 때, 정말 기겁했다. 사람을 보고 좋아서 다가오는 걸 텐데,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고, 혀로 자꾸 핥아대는 것도 지저분하다는 생각이 들어 썩 내키지 않았다. 동물들도 자기를 이뻐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뻔히 아는지, 나의 반응이 시원치 않으니 그다음부터는 나를 보고 짖어대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겁을 먹고 있었는데 마구 짖어대는 강아지 때문에 나는 침대 위로 올라가 한동안 아래로 내려오지 못했다.


그런데,


그렇게 여러 차례 만나다 보니 어느 순간 등을 한번 쓰다듬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속서에 꿈틀댔다.  한번 안아보고 싶기도 하고, 또 ‘침 좀 묻히면 어떤가, 씻으면 되는 거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금은 먼저 오라고 부르기도 하고, 다가와 침을 바르는 것도, 꼬리를 흔들며 아는 척을 좀 해달라고 짖는 것도 많이 자연스러워졌다.

우리가 반려동물이라고 부르는 강아지나 고양이들은 그냥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키우는 사람들에게는 진짜 가족이었다. 처음에는 강아지를 아들 딸이라고, 그리고 본인들을 아빠 엄마라고 부르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정을 들이고 보니 그런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고, 마치 애지중지하며 자식을 키우듯 좋은 것을 주고 싶고 아프면 속상해서 눈물 흘리는 그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최근에 인스타그램에서 팔로우하는 가수가 반려견이 치과 치료를 받았다는 안타까운 소식의 게시물을 올렸다. 잘못 알고 있던 지식 때문에 강아지의 이빨을 네 개나 뽑았다고 한다. 그분은 자신의 잘못을 자책하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강아지 치석 제거에 좋다고 해서 단단한 오리 뼈 간식을 수시로 줬었는데, 그 때문에 앞니와 어금니가 부러져서 염증이 났고, 급기야 발치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포메라니안 같은 작은 체구의 강아지들에게는 단단한 뼈와 같은 간식은 절대 줘서는 안 된다고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했다.

좋은 의도로 준 간식이 본인의 잘못된 지식으로 인해, 오히려 반려견에게 돌이킬 수 없는 해를 입히게 했다는 사실을 자책하고 있었다. 많은 팔로워들이 댓글로 위로하며 강아지의 쾌유를 빌었다.     





- 알면 안 했겠지.

- 모르니까 실수한 거지.     


- 그때 그 오징어를 앞니로 끊으려고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 강아지에게 단단한 뼈 간식을 주지 말았더라면.


살다 보면 내가 알고도 실수할 수 있고, 정말 몰라서 하는 실수가 있을 수도 있다. 나의 아랫니를 부러뜨린 딱딱한 오징어는 부실한 이를 생각지 못하고 혹사시킨 나의 실수였고, 아끼고 사랑하는 강아지의 이빨을 뽑게 된 것은 잘해주려고 했던 일이지만, 잘 몰랐기에 오히려 더 아프게 만든, 생각하면 더 마음 아픈 실수였다.


나의 치료도 겉으로 보기에는 잘 되었고, 강아지도 지금 무탈하게 회복 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의 부러졌던 앞니도 치료는 했으나 원래와는 달라서 항상 무엇인가를 먹을 때는 신경을 써야 하고, 강아지의 뽑은 이빨은 다시 나지 않는다. 바로 처음과 같아질 수 없다는 말이다. 실수로 인한 대가가 너무 컸다. 앞으로 계속해서 나는 앞니로 무엇인가를 잘라서 먹지 못하고, 강아지는 한쪽 어금니를 잃어서 반대쪽으로, 혹은 잇몸으로 씹어야 한다. 이것은 어쩔 수 없이 평생 가지고 가야 할 현실이고, 그로 인해 삶의 질이 이전보다 많이 안 좋아졌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하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 '이'랑 '잇몸'은 엄연히 다르다.


저 말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궁여지책으로 하는 말일 수도 있다.

조금만 더 세심히 살피고 조심하면 나와 같은, 강아지와 같은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만들지 않을 수도 있다.


다시는,


'멀쩡한 이를 두고 잇몸을 사용해야 하는 일을 만들지 말자.'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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