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고 (Ego)
“요가(Yoga)는 다름 아닌 실용적인 심리학(practical psychology)이다”
슈리 오로빈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과학적”으로 대답하겠다고 말하는 분야가 있다. 요가와 심리학. 이 둘은 인간 의식을 탐구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분야라는 데 있어서 공통점이 있다. 의식을 무엇으로 혹은 어디까지 볼 것인가, 의식의 특히 어떤 부분에 초점을 둘 것인가에 따라 이 두 분야 안에서도 많은 세부 분야들이 발전해 왔고, 또 그런 탐험들이 이루어짐에 따라 다양한 분야들과 전문가들이 지금도 생겨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공통의 관심사에도 불구하고, 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의 핵심적인 부분에 있어서, 이 두 분야는 매우 대조적인 결론을 내린다는 사실이다.
서구 전통에서 인간 개인으로서 “나”를 설명할 때, 종종 등장하는 언어들에는, “개인 (individual),” “에고(ego),” 혹은 “자아(the self)” 등이 있다. 이런 단어들과 그 개념들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프로이트의 분석심리학과 그 이후의 연관된 심리학의 발전에서 “에고”는 인간의 의식적 통제의 중심에 위치하며, 심리적 문제 해결의 주체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단순화시켜 표현한다면, 심리학과 상담 심리학의 주요한 과제는, 내담자의 에고를 보살피고, 인도하여, 건강한 에고로 성장시켜, 스스로의 욕망과 사회적인 삶, 가치로운 삶을 조화시킬 수 있는 행복한 인간 개인을 만드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요가 및 인도의 주요 영성 전통들에서는 에고는 주체적인 의식으로서 성장시켜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극복의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 즉, 좋음과 싫음의 이분법적 세계를 살아가며, ‘나’의 욕망과 ‘내’가 지향하는 가치의 실현이 주요한 과제인 경험적 주체로서의 개인, 그리고 그러한 욕망의 작용의 핵심을 차지하는 “나”라는 의식인 아함 카라(ahamkara: I-maker, I-ness, 남과 구분되는 “나”라는 의식)는, 개인이 자유로워지기 위해 극복해야 할 굴레와 같은 것이다. “아함 카라” 는 “에고”로 주로 번역된다. 요가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상키야 철학에서, “아함 카라”는 ‘자연’(Prakrti)의 작용이고, 따라서 우리의 진정한 자아인 ‘순수의식’(Purusha)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 모든 요동치는 자연의 작용에서 벗어나, 순수의식(Purusha)의 단계에 이르는 것이 요가수트라에서 말하는 요가 수행의 주된 목적이라고 볼 수 있고, 여기서 에고, 즉 아함 카라의 극복은 필수적인 것이다.
“요가는 마음과 정신(citta: mind-stuff)의 요동침을 그치게 하는 것이다” (요가수트라 1:2)
“에고는 순수 의식(the seer)과 도구적인 의식(instrument of seeing)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요가수트라 2: 6) [각주 1]
이번 에세이를 포함해 앞으로 써 나갈 총 다섯 개의 에세이에서, 인간의 중심적(central) 자아란 무엇일까에 대해 탐구해온 인도의 영성 전통과 서양 심리학의 흐름을, 몇 가지 예를 들어,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번 에세이에서는 프로이트와 그의 에고 개념을 비판적으로 계승, 발달시킨 이후의 심리학 전통에서의 진정한 자아상을 살펴보겠다.
다음의 섹션(III. 서구 심리학 전통에서의 에고)에서 이 에세이는 프로이트 이후 그의 에고 개념을 비판적으로 계승, 발전시킨 심리학의 흐름에서 에고에 대한 개념과 그것의 성숙을 둘러싼 논의들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간략히 짚어보고자 한다. 이는, 전공자가 아닌 필자에게는 매우 실험적인 시도다. 스스로를 위한 변명을 해 보자면… 미국 학교 재학 시절, 대학원 수업으로 상담가 지망생들과 심리학 수업 몇 개를 함께 들었다는 것, 그 수업에서 나름 열심히 심리학 관련 책들을 보고 수업시간에 질문도 많이 했다는 것, 그리고 필자의 전공인 인도 전통의 많은 내용들이 현대의 트랜스 퍼스널 심리학(transpersonal psychology)에 많이 등장한다는 것, 그리고 인도 전통을 영어로 영어권에서 공부하고 나중에서야 인도에 가서 인도 전통의 면모들을 직접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것…
이러한 경험들이 필자로 하여금, 서양식 자아 이해의 핵심인 에고와 인도철학에서의 에고의 번역어라고 할 수 있는 아함카라에 대한 비교를 하고 싶게끔 만드는 것 같다. 전공자가 아닌 관계로 이 심리학에 대한 정리 부분에서, 부분적 그리고 전체적인 조망을 하는 것에 서툴다. 필자가 하고자 하는 비교의 작업을 위해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것들 위주로 정리했다. 부족한 점들이 많을 것이니 전공자들의 양해를 미리 구한다.
정신분석 전통에서 에고(ego)는 우리의 진정한(true) 그리고 고유한(unique) 존재를 가리키는 용어로 기능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고에 관해 서구 심리학 전통이 보여주는 중요한 내용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에고를 자기 자신 안에서, 혹은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 모종의 사악한 역학 아래에서 잘못 다루거나 방치할 때 어떻게 인간이 피폐해질 수 있는가이다. 또한, 안으로 깊숙이 자리 잡은 심리적 상처들, 감추어지고 알려지지 않는 부분들이 분석을 통한 보살핌과 이해의 작업 속에서 드러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어떻게 치유될 수 있는지를, 그리고 의식적인 에고가 그 과정에 참여하고 성숙하는 것을 서구 심리학 전통은 보여준다. 이상적으로는, 이러한 심리적 모험을 통해 강해진 에고는 우리가 스스로를, 그리고 우리의 밝고 어두운 면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또한 우리가 스스로가 원하는 존재가 되도록 도와준다. 우리의 에고를 이런 강한 에고로 성숙시키는 것이 심리학, 혹은 심리학에 기반한 치료의 목표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의 미성숙한 에고를 강한 에고로 성숙시키는가, 즉, 무엇이 이 귀여운 아가를, 저 말 안 듣는 꼬마를, 혹은 이 문제적 인간을, 진정한 성인으로 성숙시키는가, 에고(ego)를 성숙시키는 그 핵심의 심리적 역동(dynamic)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해, 프로이트와 이후의 에고 심리학자들과 그 계승자들은 어떤 답을 내리고자 했는지, 다음에서 간략히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각주 2]
프로이트의 이론 안에서도 에고의 의미는 변화해 왔다. 그의 초기 이론에서 그는 인간의 정신 작용을 무의식과 의식의 충돌에 기반해서 이해했고, 여기서 에고는 성적 충동에 맞서는 자기 방어 기제의 중심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후기 이론으로 갈수록 에고 개념은 무의식과 대치하는 방어 기제나 의식과 무의식의 어딘가에 놓여 기능하는 심리적 기능을 넘어서 더 능동적이고 개입하는 주체(“an active and intervening agency”)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러한 이론적 수정을 거치면서도, 프로이트가 일관성 있게 유지한 입장은, 성(sexuality)이 인간의 심리를 설명해주는 주요한 조건으로 기능한다는 것, 그리고 에고는 심리적 에너지를 조절하는 인간 심리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에고는 이드(id)와 슈퍼 에고 (super ego) 그리고 바깥세상의 모든 요구들을 타협하는 중재자이며, 따라서 가장 많은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에고를 강화시키는 것이 심리치료의 목표라고 그는 말한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전 삶을 통해 성장하고 사람의 정신 건강을 결정하는 정신적 기관인 에고는, 인간 존재의 심리적 정수이며, 인간을 세상 안에서 존재하고 기능하는 진정한 사람(person)으로 만들어 준다.
프로이트에게서 에고가 한 인간의 진정한 자아의 위치를 부여받았다고는 하나, 그에게 있어서 주요 포커스는 이드(id)였다. 프로이트 이후의 에고 심리학(ego psychology)은 프로이트의 에고에 대한 관점을 계승하면서도 에고의 지평과 그 기능을 확장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변화는 충돌에 기반한(conflict-base) 모델에서 충돌의 내용이 점점 줄어드는 모델로의 이동을 의미하기도 했다.
프로이트의 인간관에서, 인간은 야수와 문명 사이의 근본적인 균열 사이에서 놓인 존재이며, 사회화의 과정은 “자기 소외”와 “기만”을 야기한다. 쾌락을 좇기 마련인 인간은 사회에서 인정되는 방식으로 만족을 느끼며 살기 위해, 에고를 통해 그리고 내면화된 사회 질서를 통해 야수의 본능을 억누르고 조절하며, 그리 함으로 세상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확보한다. 신경증이라는 것은 이 억눌렸던 본성으로의 귀환이며 그 발현은 매우 코드화 되어있어서 분석가에 의해서 풀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충돌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프로이트의 에고는 이 충돌하는 힘들을 중재하고, 이것들을 거쳐 살아남아 경험을 통해 성장해 간다.
이러한 충돌과 병리학에 초점을 둔 프로이트식의 방식에서 에고 심리학자들은 정상적인 발달 (“normal development”)을 이야기하는 일반 이론으로 옮겨갔고, 에고의 “충돌” 대신 "자유로운(conflict-free)” 성장에 대해 이야기한다. 즉, 에고의 성장에서 필수적인 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충돌의 상황이 아니라, 인간과 환경 간의 “상호 관계 (reciprocal relationship)”이며, 에고에게는 환경과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내재한다. 이런 에고가 본원적으로 갖고 있는 적응 능력은 충돌로부터 태어난 “방어(defense)”를 에고의 “자율적인(autonomous)”기능으로 바꿀 수 있다. 이러한 확장된 에고의 기능은 이들 에고 심리학자들 사이에서 이론뿐 아니라 임상에서도 적용되게 되었고, 이는 심리 상담과 분석가에 대한 모델도 바꾸어 놓았다: “객관적 목격자(a detached witness)”인 분석가가 “분석의 대상 (the object of analysis)”을 놓고 “해내야 할 작업 (a work to be done)” 이라기보다는, 내담자와 분석가의 “파트너십(partnership)” 이자 “성장의 경험(experience of growth)“으로서의 상담 과정..
대인관계 심리학(Interpersonal psychology)은 에고 형성에 있어서의 이런 관계의 측면을 더 밀고 나아갔다. 에고 심리학에서의 추동 이론(drive theory)은 욕구(drive)를 에고와 함께 인간의 정신을 구성하는 요소로 보았으나, 설리반은 인간의 정신은 “온전히 사회적”이라는 과감한 전환을 시도했다: 인간 개인은 대인관계의 장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성격 혹은 자아는 개인 안에 거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타인과의 상호작용에서 나타난다는 것. 사회적 산물로서의 자아는 주로 양육자와의 관계에서 경험된 “나쁜 나”와 “좋은 나”를 통해 형성된다: 양육자의 불안(anxiety)이 공감적으로 전해짐에 따라 유아는 스스로를 “나쁜 나(bad-me)”로 경험하며, 양육자를 불안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아기가 스스로를 “좋은 나(good-me)”로 경험하게 한다; 이후의 새로운 강력한 관계에 의해서도 자아의 형성은 계속 진행될 수 있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분석의 장(field)은 환자의 내적인 심리 세계였고, 환자는 이 세계 안에서 위험한 충동과 확고한 방어라는 내부의 전투에 의한 균열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설리반이 보기에, 환자는 대인관계에서 안전과 인정을 받고 싶어 하기 때문에, 분석의 장(field)은 환자의 대인관계가 되어야 했다. 여기서 분석가의 역할은 내담자가 본인의 대인관계 방식을 더 잘 자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설리반은 디테일한 질문들을 통해 접근하는 소위 “대화식 유형(dialogical pattern)”을 시도했고, 이는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내담자를 조용히 바라보는 침묵의 관찰자인 프로이트식의 분석가와는 다른 것이었다. 내담자의 분석가와의 관계는, 내담자가 불안을 다루는 것에 있어서의 한계를 드러내 주며, 여기서 분석가는 “참여하는 관찰자(participant observer)” 역할을 하게 된다. 여기서, 분석가나 내담자는 상호 주관적인 경험의 장으로 통합되고 환자에 대한 이해를 위해 내담자와 분석가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필수가 된다. 이 모델은 후에 관계적인 측면이 더욱더 강조된 “분석적 공동 파트너십(analytic co-partnership)”으로 발달하게 된다.
대상관계 학파(object relation shcool)는 프로이트의 에고를, 대상 리비도(object libido)라는 또 다른 관계의 측면을 통해 다룬다: 프로이트의 쾌락 추구 리비도(libido: 성욕)에서 대상 추구 리비도로. 프로이트의 유아가 자기의 본능을 만족시키기 위해 행동한다면 대상관계 이론의 유아는 타인과 관계를 맺고자 행동한다. 유아를 “사람(a person)”으로 만드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이고, 특히 엄마 혹은 첫 번째 양육자와의 경험이 매우 중요하다. 페어베른에 따르면, 유아의 부모와의 경험은 대상으로 내면화되어 유아의 에고 형성에 영향을 미치고, 부모와의 경험이 나누어짐(split)에 따라 내면화된 대상 역시 “흥분시키는 것(exciting)”과 “거절하는 것”으로 나뉘고, 에고 역시 그렇게 -- “리비도(libido:성욕)적인” 그리고 “반리비도(antilibidinal: 반성욕)적인” 것으로 – 나뉜다.
위니콧은 “충분히 좋은 엄마 (the good-enough mother)”라는 개념을 통해 유아의 에고 형성을 설명했다. 충분히 좋은 엄마는 유아가 “주관적 전능함(subjective omnipotence)”를 느낄 수 있는 환경을 창조한다. 하지만, 엄마의 이 상태는 엄마가 자신의 모든 욕망을 아기의 욕구를 위해 포기하는, 일종의 “광기(madness)”상태다. 이 충분히 좋은 엄마가 이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서서히 물러남에 따라, 아기는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은 엄마의 “반응성(responsiveness)”이지 전능함 그 자체가 아님을 알게 되고 그렇게 세상의 “객관적 현실 (objective reality)”을, 즉 자기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역시 자신처럼 욕구를 가진 타인과 타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충분히 좋은 엄마가 제공하는 환경과 그녀가 이런 상태에서 서서히 물러나는 것은 유아의 건강한 성격 형성에 필수적이다. 이 두 가지 조건이 만족될 때, 아기는 본인의 주관성(subjectivity)을 잃지 않으면서도, 세상의 객관적인 현실을 자각하며 성장한다. 반면, 이러한 환경이 부재하거나 너무 이른 시기에 엄마가 물러나 버린다면, “내적 실제 (inner reality),” 삶에 대한 느낌, 그리고 개인적 의미를 주는 주관적 경험이 부재하거나 충분치 못하게 되어, 이로 인해 “거짓 자아-장애 (false self-disorder)”를 야기할 수 있다. 이러한 주관적이고, 내적인, 실재에 대한 느낌은 충분히 좋은 엄마가 아이에게 이런 환경, 즉 모든 욕구가 엄마의 반응에 의해 만족된 채로, 그런 “통합되지 않은 상태(unintegration)”에서 자유롭게 떠 다닐 수 있는 그런 환경을 제공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런 환경이 그 사람의 주관적인 중심을 형성하며, 이런 중심이 없다면, 개인은 “온전히 객관적인 현실”을 살아가야만 하고, 위니콧에 의하면 이는 “거짓 자아 (the false self)”이다.
지금까지의 논의 들을 정리해본다면, 본능이나 충동 같은 인간의 원초적 동물성과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요구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이를 중재하면서 성장해 나간다는 프로이트의 에고는, 이후 보다 자율적이며, 인간적이고, 관계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이해되어 왔고, 여기서 양육자와의 관계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어왔다. 이러한 새로운 트렌드의 이해에 의하면, 유아는, 심리 내적(intrapsychic) 충돌보다는 환경과 타인과의 조화를 통해 한 사람으로 성장해 나가는 존재이며, 타인을 스스로의 즐거움을 위해 이용하기보다는 타인과 함께 즐거움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여기서, 정체성(identity)과 자아(the self) 심리학자들은, 이 똑같은 질문– 무엇이 유아를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하는가? –에 대해 다른 종류의 관계를 통해 그 해답을 제시한다: 문화(culture)와 자기 자신(the self).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사회란 단순한 개인의 확장에 불과했고, 그 기능은 스스로가 가진 “유사-에고적 기능 (quasi-egoic function)”을 가지고, 인간 개인의 에고가 하듯이 (자기 방어, 슈퍼 에고의 조절 등을 통해) 인간의 추동(drive)을 조절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에릭슨에 따르면, 문화와 역사는 모종의 “매개(medium)”를 제공함으로 인간 정신의 무정형의 생물학적 잠재력을 “인간의 삶(human life)”으로 빚어내고, 이렇게 인간 정신에 “생명/삶(life)”을 부여한다. 에릭슨은 또한 전통적 정신분석학자들은 모든 인간관계를 초기단계의 것으로 환원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했다. 에릭슨에게 엄마라는 존재는 가치들과 사회적 삶을 정의하는 “문화적인 삶”을 대표하며 그것들을 담아내는 컨테이너(container)이다. 아이들은 그 문화적 삶이 정의하는 가치와 사회적 삶들을 내면화 함으로 성장해 나간다. 에릭슨은 그의 내담자들을 통해, 사회적 실재(social reality)가 아이들의 경험과 자아(the self)의 의미, 그리고 심지어 추동(drive)까지 형성하며, 그 방식은 문화마다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다. 에고와 욕망의 형성을 위한 틀을 제공하는 사회적 실재를 강조함으로, 에릭슨의 에고 정체성의 개념은 자아가 형성되고 에고가 성장하는 영역은 인간적(personal)이고 심리적인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줬다.
코훗은 본인의 내담자들을 치료하는 과정을 통해, 문제의 본질은 심리적 충돌이 아닌, “자아감(self-feeling)”과 “자부심(self-feeling)”에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다루기 위해서는 나르씨씨즘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병리학적 증상이 아닌, 자부심을 상실한 내담자에게 생기와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원천으로서의 나르씨씨즘. 코훗에 따르면 강력한 자부심의 발견은 성공적인 심리치료를 위한 핵심의 요소다. 유아기적의 나르씨씨즘은 건강한 나르씨씨즘의 핵을 담고 있으며, 이는 현실을 경험함에 따라, 그러나 천천히 변환되어야 한다. 자신에 대한 사랑을 병리적인 현상이 아닌 통합적 자아(the integrated self)로의 성숙을 위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으로 본 코훗. 그는 자기애적인(narcissistic) 에고는 통합적 자아라는 꿈을 향한 인간 열망의 자연스러운 발현이며 그 꿈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에너지의 원천이라고 보았다.
프로이트 이후의 정신분석학적 흐름들에서 에고의 개념은 그 의미의 영역이 확대되고, 보다 긍정적인 면이 부각되면서, 그 위상 또한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도 프로이트가 단언한 심리치료의 목표는 변하지 않았다: 건강하고 성숙한 에고.
스스로의 성적 욕구에 사로 잡혀 있는 프로이트의 충동적 자아는, 이후의 심리학들 속에서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충돌이라는 위협이 없이도 스스로를 조절하는 자율적 존재로 등장한다. 또한 에고는 개인 심리의 내적 역동 안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를 갖는 것을 원하고, 그 충족을 기뻐하는 관계적 자아이며, 전통과 문화가 제공하는 매체(medium)를 통해 개인적 원초적 수준을 벗어나 보다 더 인간다운 삶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그리함으로 한 개인에게 주어진 국한된 시공의 한계를 벗어난 문맥을 누릴 수 있는, 개인의 한계를 초월하는 자아다.
여기서 코훗의 “자기(the self)”를 잠시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코훗의 자기(the self)는 프로이트식의 에고와 같은 것은 아닌 것으로 이해된다고 한다. 에고가 정신적 심리적 기관(mental apparatus)인 반면, 자기(the self)는 “나”라는 의미에 좀 더 가까우며, 행동을 이끌어가는 독립적 중심(center)이자 시공 속에서 연속적인 것으로 경험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융 역시 비슷한 의미로 자기(the self)를 사용했으며, 융은 여기에 대문자 자기, 즉 the Self라는 그의 유명한 원형에 대한 논의를 함께 포함시켰다고 한다) [각주 3].
어찌 보면 코훗의 “자기(the self)”는, 이전의 에고 개념이 포함하지 못한 인간의 의식적 자아의 개념, 혹은 프로이트 이래로 에고 개념이 확대되고 격상되는 그 흐름을 보다 통합적인 자아개념으로 정착시킨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코훗은 방법론에 있어서도 감각 기관을 통한 객관적인 관찰보다는, 내성(introspection)과 공감(empathy)을 강조함으로, 치료의 분석적 모델을 한층 더 공감적 모델로 끌어냈다고 한다. 아마도 이런 공감적 방법으로만이 이 통합적 개념의 자아(the integrated self)를 대하고 다룰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자기(the self)”라는 아이디어는 얼핏 보기에 에고보다는 인도 영성 전통에서 말하는 영혼의 개념과 조금 더 친화성이 있어 보인다: 통합(the integrated self)을 통해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의 조화와 완성, 혹은 완성된 존재(the strong self)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하지만, 키란(Kiran)과 같은 학자들은 이야기한다. 자기 심리학(the self psychology)에서의 자기(the self)도 여전히 아함 카라, 즉 에고의 영역에 속하며 인도 영성 전통이 말하는 영혼은 아니라고. [각주 4]
다음 에세이에서 인도 영성 전통의 진정한 자아 개념을 통해 이 주제를 이어가겠다.
이 에세이에서 다룬 심리학의 내용들은 미국 학교에서 심리학 수업을 들었을 때 필자가 읽고 정리했던 내용들에 바탕을 두었다. 당시에 에고 관련 개념 정리를 위해 이런저런 책들을 찾아 읽으면서 받았던 감동은, 이들 심리학자들이 그들의 내담자를 대하는 진지함과 신실함이었다. 자신들이 배운 이론적 용어와 틀을 적용시키는데 머물지 않고, 그것들을 실제 치료의 과정 속에서, 환자들과의 대화와 관계 속에서 진지하게 검증해보고자 끊임없이 시도하는 것; 이런 검증의 과정에서, 기존 이론이 실제의 문제나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때, 내담자들과의 대화와 경험이라는 치료의 과정을 통해 기존의 이론을 성실하게 수정하고자 노력하는 것. 이러한, 전문가적 천착을 넘어선, 일종의 신실함(sincerity)이 느껴지는 자세가 인상적이었다. 이론이나 용어로 상대방의 경험과 느낌을 간결하게 치부해 버리지 않고, 그 문제적 경험과 현상 속으로 함께 다이빙해 들어가 길을 찾아내고자 하는 노력들. 그리고 잘 안 잡히는 그 심리적 실재(psychological reality)를 담을 수 있을 것 같은 표현을 찾아서 의미 있는 용어로 주조해 내는 그들의 용기와 노력, 창의성이 좋아 보였다. 당시에 그런 감동을 받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이 에세이에서 언급한 심리학의 내용들은 그저 이론으로만 다가왔을 것이고, 아마도 매우 고통스러운 독서가 되었을 것이다.
[각주 & 참고서적]
1. Vivekananda, "Patanjali's Yoga Aphorisms," Collected Works of Vivekananda (https://www.ramakrishnavivekananda.info/vivekananda/complete_works.htm)
2. 심리학 관련 부분 (1. 프로이트 ~ 5. 정체성과 자기 심리학) 정리를 위해 참고한 서적들은 다음과 같다.
Erwin, Edward. The Freud Encyclopedia : Theory, Therapy, and Culture. New York: Routledge, 2002., 2002. (Kindle e-book).
Storr, Anthony. Freud :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2001.
Mitchell, Stephen A. and Margaret Black. Freud and Beyond : a History of Modern Psychoanalytic Thought. New York, NY: Basic Books, c1995., 1995.
Freud, Sigmund, and Adam Phillips. The Penguin Freud Reader. London: Penguin, 2006., 2006.
3. Cortright, Brant. p.2-3 Psychotherapy and Spirit: Theory and Practice in Transpersonal Psychotherap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7.
4. Salagame, Kiran Kumar K.. “Ego and Ahamkara: Self and Identity in Modern Psychology and Indian Thought.” in Foundations of Indian Psychology (Vol. 1): Theories and Concepts, edited by Matthijs Cornelissen, Girishwar Misra and Suneet Varma. Delhi, Chennai, Chandigarsh: Pearson, 2011. Kindle e-book.
[그림]
[제목에 있는 그림] [attribution] Inside_my_head.jpg: Andrew Mason from London, UKderivative work: -- Jtneill - Talk, CC BY 2.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2.0>, via Wikimedia Commons
[그림 1] 프로이트의 의자 ROBERT HUFFSTUTTER, CC BY 2.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2.0>, via Wikimedia Commons
[그림 2] 명상하는 시바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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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프로이트 초상화 [attribution] By Photocolorization - Own work, CC BY-SA 4.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70778921
[그림 4] Rameshng at Malayalam Wikipedia, CC BY-SA 3.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3.0>, via Wikimedia Commons
[그림 3] By Photocolorization - Own work, CC BY-SA 4.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70778921
[그림 4] Pixabay로부터 입수된 Darwis Alwan님의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