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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liguana Oct 24. 2021

에고와 쏘울, 두 번째 이야기

: 상키야-요가 전통에서의 에고(Ahamkara)와 영혼(Purusha)




고통의 원인들(afflictions) 중 하나인 에고이즘(asmita)은 지성(buddhi)의 작용을 우리의 영혼인 순수의식(Purusha)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 잘못된 동일시(false identification)를 알아채고, 이 둘을 구분한다면, 자유(liberation)에 이르게 된다. 

                                                               (요가수트라 2장 6절에 대한 필자의 다소 긴 번역)  


 ‘요가’의 어원적 의미


Yoga라는 산스크릿 단어의 어원이 갖는 의미는 “yoke(가축 등을 ~에 매다)”혹은 


“join(연결하다, 잇다)” “union(결합, 일치, 하나 됨)” 주로 연관되며, 요가의 정의를 할 때 가장 많이 언급하는 의미는 대락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각주 1]


1.      우리 안의 낮은 의식을 조절하는 것 (control 혹은 yoke) 

2.      우리 안의 혹은 밖의 높은 신적 의식과 연합하는 것 (join 혹은 union)

[그림 1] 요가 수트라의 저자로 알려진 파탄잘리의 동상 (우따라칸드, 인도)


즉, 낮은 의식으로부터 벗어나 높은 의식과 하나 되는 것: 인간을 욕망(desire)에 빠지게 하는 감각적 집착(sense-attachment)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 컨트롤하고, 높은 신적 의식과 하나 되는 것. 

에고는 여기서 낮은 의식의 상태, 멍에를 지워야 할 대상에 포함된다. 이를 간략하게, 하지만 좀 더 체계적으로 살펴보자. 




순수의식(Purusha 푸루샤)과 자연(Prakrti 프라크르티)의 이분법


요가 전통에 그 철학적 내용의 주요 골자를 제공하는 것은 상키야 철학으로 알려져 있다. 샹키야 철학은, 우리 영혼의 본체인 순수의식인 푸루샤(Purusha)가 자연(Nature)인 프라크르티(Prakrti)의 작용과 스스로를 동일시(identify)함으로 빚어진 인간의 무지의 상태를 인간이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적 상황으로 본다. 이 무지의 상태에서 헤어 나오는 것, 즉 이 둘–푸루샤와 프라크르티–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것,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며, 순수의식인 우리의 영혼이 스스로가 프라크트티(자연)가 아니라 푸루샤(순수의식/영혼)임을 분별해 내는 것, 우리의 영혼이 프라크드티의 작용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그 무지(ignorance)로부터 벗어나, 자신이  순수의식(푸루샤)임을 아는 것, 그리 함으로 프라크르티와 푸루샤를 분별(discern)해내는 것이, 우리의 본질이 자연(Prakrti)이 아닌 영혼(Purusha)임을 아는 것이 상키야 철학에서의 인간 자유와 해방의 요체다.


상키야 철학에서는 순수의식(Purusha)과 자연(Nature)에 대한 혼동, 즉 지식적인 것이 문제의 근원이므로 이 둘을 분별해 내는 지식인 분별에 이르는 것이 자유, 해탈에 이르는 중요한 방법이 되고, 이는 흔히 지식의 길/요가 (the path/yoga of knowledge)로 불린다. 여기서 에고의 산스크릿 번역어인아함카라, 이 아함카라는 푸루샤가 아닌 자연(Nature), 즉 프라크르티의 영역에 속한다. 


자연인 프라크르티와 영혼인 푸루샤의 이분법으로 설명되는 창조의 과정은 다소 미학적인 데가 있다. 이 둘의 근접성(proximity)으로 프라크르티를 이루고 있는 세 가지 에너지(세 가지 구나(gunas))--맑고 지적인 사트바, 활동적이고 정열적인 라자스, 정적이고 탁한 타마스–의 균형이 깨지면서 미분화 상태였던 프라크르티가 발현되게 되고, 그렇게 창조가 일어난다. 창조의 결과물들은 모두들 의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푸루샤때문이다. 즉 이 푸루샤가 가까이 존재하는 것 만으로 미분화의 자연은 무수한 존재로, 푸루샤의 의식을 반영한 의식성을 띠며 분화해 나간다. 모든 창조의 원재료(source)는 프라크르티(Prakrti)이지만,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푸루샤의 존재, 그의 근접성 때문이다. 먼저 가장 맑고 정신적인 영역에서 물질적인 것의 순서로 분화가, 즉 창조가 이루어진다. 첫 번째로 가장 순수하고 미세한 물질성이라서 영혼의 빛을 반영할 수 있다는 부디(buddhi), 그리고 “나”라는 의식을 만드는 아함카라(ahamkara), 마나스(manas: mind)와 5개의 감각들.. 이런 순서로 창조가 이루어진다. 즉, 상키야 철학에서 아함카라는 프라크르티로부터 초기에 출현하는 3가지 내적 기관 중에 하나이다. [각주 2] 


가장 먼저 분화하는 부디(buddhi)는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맑은 지성과 의지의 기관으로, 이 기관의 도움으로 인간은 에고 의식을 극복하고, 푸루샤와 프라크르티의 잘못된 동일시를 극복하는 분별력을 갖출 수 있다고 한다. 자연(Nature)인 프라크르티와 순수의식(Pure consciousenss)인 우리의 영혼, 푸루샤를 구분하는 것, 인간의 영혼이 프라크르티가 아닌 푸루샤라는 것을 아는 것,, 우리의 영혼은 높은 지성인 부디(buddhi)도, 자의식인 아함카라도 아닌, 순수 의식(Purusha)임을 아는 것이 상키야 철학에서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그 지식, 분별(Viveka: discernment)이다. 


상키야 철학에서의 프라크르티로부터의 창조는 우주 창조보다는 인간 개인의 의식에 초점이 맞추어진, 즉, 무지와 지식, 그리고 자유를 얻는 길을 설명하기 위한 구원론적, 존재론적 도식이라고 한다. [각주 3]  즉, 우리의 본질인 우리의 영혼은 에고를 비롯한 모든 정신적 심리적 현상들과 질적으로 다른 순수의식이며 이것을 깨닫는 것이 상키야 철학이 말하는 자유를 주는 지식의 핵심이다. 


다스굽타는 다음과 같이 상키야 철학과 요가 전통의 관계를 설명한다: 상키야 철학의 이런 순수의식(푸루샤)과 자연(프라크르티)의 구분, 이 구분을 하게 하는 분별력--지식과 정보의 차원이 아닌, 명상을 포함한 철학적 반성(reflection)과 같은 방법을 통해 우리의 의식이 명료해지는 그런 과정을 통해 다다르는 분별력–이라는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면서도, 요가 전통은 이런 경지에 다다르기 위한 전략을 그 주된 관심으로 삼는다; 즉, 요가는, 인간의 순수의식(푸루샤)과 자연(프라크르티)의 관계를 이해하고 이 둘을 분별하기 위한 인간 의식(awareness)의 상태(state)들을 서술하고 분석한다; 따라서, 요가의 주된 초점은, 인간 의식의 집중된 상태, 그리고 이를 통해 그런 분별에 이르는 과정을 기술하고 분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요가를 인간 정신에 대한 과학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각주 4) 


요가 전통에서도 이 아함카라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것은 중요하다. 먼저, 요가수트라에서의 요가의 정의를 살펴보자.  


        요가는 우리 의식(citta)의 요동침을 그치게 하는 것이다     (요가수트라 1장 2절 )  


여기서 의식(citta)은 순수의식(Purusha)과는 구분되는 일반적인 정신과 심리를 뜻하며, 위에서 언급한 상키야 철학에서의 프라크르티에 해당하는 내용들이다. 우리말로는 자각, 인식, 의식, 영어로는 awareness로 해석되기도 한다. [각주 5] 이러한 우리의 일반적인 의식은 올바르게 기능하기도 하고, 그른 방식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올바르게 기능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상키야 철학에서처럼  지식으로, 그리고 요가에서 강조하는 육체적, 심리적 수행을 통해, 이 자연적 인식을 섬세하고(subtle) 맑은 수준으로 정화시켜야 한다. 그리함으로, 이 자연적 인식이, “순수의식”과 스스로의 실체인 “자연”을 구분할 수 있는 분별(Viveka: discernment)에 다다르도록 할 수 있다. 이것이 위의 요가 정의를 설명해주는 상키야 철학의 내용이다. 


우리의 일반적인 이 의식(citta)은, 순수의식이 자연과 동일시되는 잘못된 동일시(false identification)로 인해, 그릇된 길로 가기도 하는데, 주로 5개의 고통원들, 혹은 불순한 것들을 통해 이런 잘못된 길로 가게 된다고 한다. 이 고통원 들 중 하나가 에고, 즉 “나”라는 의식이며, 이를 요가수트라에서는 asmita (I-am-ness)라고 부른다. 의식을 잘못된 길로 가게 하는 5개의 요인을 “five klesha”라고 하는데, klesha라는 말은, 영어로는 affliction, suffering, impurity, pain 등으로 번역이 되고, 우리나라 말로는 고통, 고통의 원인, 불순함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5 klesha, 즉 5개의 고통원을 구성하는 것은 무지(avidya: ignorance), 에고(asmita: I-am-ness), 집착 (raga: attachment), 혐오(dvesa: aversion), 삶에 대한 의지/ 소멸에 대한 두려움(abhinivesa: will to live/fear of extinction)이며, 각각 잘못된 동일시를 통해 우리의 일반적인 의식을 그릇된 길로 인도한다. 


[그림 2] 여성 요기들 (인도, 라자스탄, 1730-1740

요가수트라에 의하면, 이 5개의 고통원들이 “카르마 저장소”의 기반을 제공하게 되고, 따라서 우리의 모든 육체적 정신적 심리적 활동들은 이 카르마의 저장소에 쌓여, 우리의 기질, 성격으로 형성되어 다시금 우리의 일반적인 의식을 오도 혹은 인도하고, 이렇게 형성된 결과를 바탕으로 우리는 계속하여 보이는(육체적인), 보이지 않는(정신적인) 행동을 하게 되고, 그 결과를 살아가게 된다. 좀 더 큰 사이클로는 그렇게 형성된 한 생애를 살아가며, 죽음을 거쳐서, 그 이전 생애까지 누적된 카르마의 결과로써 조건 지워진 또 하나의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명상과 요가 수련은 이 반복되는 의식의 오도(misleading)를 수정하고, 푸루샤와 프라크르티의 그릇된 동일시에서 벗어나, 우리의 영혼이 윤회의 쳇바퀴를 탈피하여, 자유를 얻게 한다. [각주 6] 


첫 번째 고통원(klesha)인 무지(ignorance)는 이 모든 고통원들의 근간을 제공하며, 에고 의식은 다른 모든 고통원과 이 무지를 이어주는 고리 역할을 한다고도 보여진다. 즉, 무지는 영원한 것을 영원하지 못한 것과 동일시하는 오류이고, 이는 자아에 대한 그릇된 이해, 즉 자연(Prakrti)의 작용인 개인적인 의식(citta: awareness)을 순수의식(Purusha)인 우리의 영혼과 동일시하는 잘못된 동일시인 아스미타(asmita)라고 불리는 에고 의식으로 귀결된다. 이 에고 의식은 기쁨에 대한 집착(raga: attachment) , 괴로움(dvesa: aversion), 삶에의 집착/죽음에 대한 공포(abhinivesa” will to live/fear of death)를 만들어 낸다.


이렇게, 이 5개의 고통의 원인(5 kleshas)은 앞서 말한 요가의 정의에서의 “우리 의식의 요동침”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또한 카르마의 법칙에 따라 형성된 우리의 성정에 따라 요동치는 의식에 의해 강화되기도 한다. 아무튼, 상키야 철학과 요가수트라 심리학에서, 우리는, 무지에 의해 오도된 에고와의 동일시를 벗어나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본질이 육체나 지성이 아닌, 에고가 아닌 영혼임을 깨달을 수 있으며, 이는 또한 고통을 양산해내는 카르마의 역학을 벗어나는 길이기도 하다. [각주 7]     



마무리.. 


정신분석학 계열의 심리학에서 자아를 대표하는 핵심기관으로, 혹은 인간의 자아와 거의 동일시되는 수준으로 그 의미가 발전하는 에고(ego), 에고의 이런 확대된 영역과 그 발전적 의미와 기능을 담는 것으로 보이는 자기(the self). 영어 단어의 쓰임새로 볼 때, the self라는 단어가 인도 영성 전통에 대한 책들에서 나올 때에는, 인간 자아를 의미하는 포괄적인 용어로 쓰일 때가 많다: “the false self”라는 말로 에고를 표현하기도 하고, 단순히 the self라고 할 때는, 인간 존재의 근간이자 본질로서의 영혼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도 영성 전통의 입장의 입장에서 본다면, 서구 심리학에 관한 한, 앞선 에세이에서도 밝혔듯이, 자기 심리학(the self psychology)에서의 자기(the self)의 의미도 에고(ego)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아함카라, 즉 에고의 영역에 속하며, 인도 영성 전통이 말하는 영혼, 그리고 그 번역어로서의 the self의 의미와는 거리가 있다고 보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서구 심리학 전통에서 인간 정신의 핵심 기관으로 등장하는 에고는, 요가 전통의 철학적 근간을 이루는 상키야 철학에서도 “아함카라(ahamkara: I-ness)”라는 이름을 가진 하나의 정신 기관으로 등장한다. 요가수트라에서는 “아스미타(asmita:I-am-ness)” 라는 그릇된 동일시, 즉 개인에게 속한 몸과 의식의 작용들을 순수의식인 푸루샤와 동일시하는 에고 의식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에고는 순수의식인 영혼의 존재로 인해 의식성을 띄는 것이지 그 자체는 “자연”의 영역에 속한다. 상키야와 요가 철학이 밝히는 바, 아함카라는 근본적인 무지와 매우 깊게 연관된 정신 기관, 혹은 정신 작용으로, 결국은 분별해 내야 하고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며, 이러한 견해는 다른 인도 영성 전통의 이해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이 에고를 넘어서, “순수의식(pure consciousness)”으로 번역되는, 인간의 영혼에 주어진 이름, 푸루샤(Purusha)란 무엇인가? 이는 종종 인도 전통에서 “영혼”을 의미하는 말로 이해된다. “영혼”이라는 의미를 가진 수많은 산스크릿어들 중에 우리에게 낯익은 표현들로는, 영어로 the self로 종종 번역되는 아트만(the atman), 그리고 지(jiva)가 있다. 인간 존재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하는 이 말들은 각각 그 디테일과 뉘앙스가 조금씩 다르다. 이는 인간 영혼에 대한 이해가 다양함을, 혹은 영혼에 대한 다양한 경험들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의 에세이에서는 푸루샤(Purusha)라는 단어의 의미가 인도 전통에서 쓰이는 다양한 예들을 보면서, 영혼을 일컫는 다른 말들, 아트만(atman)과 지바(jiva)와의 비교, 고찰을 함께 시도해 보고자 한다.   




[그림]

제목 그림: 정원에 앉아있는 요기 (북인도, 1620-40) [attribution] Unknown authorUnknown autho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1. [attribution] User:Alokprasad, CC BY-SA 3.0 

2. [attribution]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각주] 

1.      Das Gupta, pp. 444-445 

2.      Sen Gupta p. 85, p. 174 

3.      Larson, Classical Sāṃkhya

4.      Das Gupta, pp. 444-445 Vol.2); Larson, Yoga, pp. 51-52

5.      Larson, Yoga, p. 81

6.      Larson, Yoga 

7.      Larson, Yoga, p. 81-83   



[참고서적]

Dasgupta, Surendranath. A History of Indian Philosophy. Vol.2 [1st Indian ed.]. Delhi: Motilal Banarsidass, 1975.

Larson, Gerald James. Classical Sāṃkhya : an Interpretation of Its History and Meaning  2d rev. ed. Delhi: Motilal Banarsidass, 1979.Larson, Gerald James., and Ram Shankar Bhattacharya. Yoga : India’s Philosophy of Meditation 1st ed. Delhi [India: Motilal Banarsidass Publishers, 2008.

Anima Sen Gupta, Classical Sākhya: a Critical Study (New Delhi: Munshiram Manoharial, c1981.,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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