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서양을 가르는(?) 이야기들, 의식의 위계, 오만과 순종
이번 에세이는 다소 주관적이다. 심리학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융 심리학의 전문가도 아닌, 필자의 주관적 경험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미국서 생각보다 학교를 좀 오래 다니면서 겪고 나누게 된 동서양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 대화들…. 싸움과 논쟁들… 그리고 인도 영성 전통에 대한 필자의 애정과 심리학에 대한 관심과 흥미... 그렇게 형성된 나름의 편견과 배움들이 이 글에 반영되어 있다.
건강한 에고의 강화와 성숙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펼쳐져 온 정신분석학 계열의 서구 심리학에서도, 미성숙한 에고의 수준을 초월하고자 하는 내용들은 발견된다: 개인의 심리 내적 충돌을 조절하는 기능적 에고, 개인의 테두리를 넘어서 타자와의 관계, 그리고 개인보다 더 큰 단위인 사회, 문화와의 관계를 통해 그 안에서 성장하며, 그 심리적 역동의 범위가 확대되는 에고,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생존의 지향을 너머, 타인과의, 사회적 문화적 환경과의 공존과 관계 속에서 스스로의 의미를 찾는, 성숙한 자아로서의 에고.
인도 영성 전통이 지향하는 에고 초월의 심리적 역동에는 개인의 영혼이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고, 에고는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다. 위에 언급한 서구 심리학 전통의 지향과는 그 결이 조금 다른 인도 영성 전통의 에고 초월의 길을 슈리 오로빈도는 “고매한 개인주의적” 경향으로 표현한다:
사회를 위한 개인의 헌신과 인류애적 봉헌은 개인 수준의 편협한 에고이즘을 극복하기 위한 위대하고도, 필수적인 단계임에는 분명하지만, 모든 존재들 간의 진정한 하나 됨이라는 휴머니즘적 이상이 지향하는 바는 지적, 도덕적, 감성적 수준에서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 이 하나 됨의 이상을 이루기 위해 인간은, 그다음 단계로 성장해 가야 한다. 인도 문화에서, 사회적인 경향성은 개인을 사회적 요구에 종속시키는 경향이 있어왔으나, 인도의 종교 사상과 영성 추구의 전통은 그 목적에 있어서, 항상 고매한 개인주의적(loftily individualistic) 경향을 갖고 있었다. 인도의 철학 사상들은 개인의 성장과 개인의 가장 고상한 욕구, 즉 가장 거대한 비전의 자유와, 위대함, 빛남과, 존엄을 항상 최우선시 해왔다… 이런 지향에서, 스스로를 넘어선다는 것은, 조직화된 인간 사회의 목적 속에서 모든 스스로의 목적들을 잃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을 신성(the Godhead)의 의식(consciousness)을 향해 성장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바가바드 기타의 메시지는 …이런 사람, 수퍼맨, 성화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었으며... 이런 사람은 천사이거나 악마적 수퍼맨이 아닌, 스스로를 하나인 초월적 우주적 신성(Godhead)에게 바칠 수 있는, 그래서 스스로의 작은 자아를 초월하여 자신의 더 위대한 자아를 발견하고 그렇게 성화되어 가는 사람이었다. [각주 1]
위의 언급에서와 같이, 인도 영성 전통에 있어서의 에고 초월 지향에서는, 인간으로서 신성을 지향하는 제왕적 비전과 신 혹은 신적 의식 앞에 자신의 작은 자아를 버리는 순종이라는 대조적인 두 가지 태도가 발견된다.
동-서양을 나누는 스테레오 타입을 강화하고자 함은 아니지만... 순종(surrender)이라는 주제는 서양이 동양을 비판적으로 볼 때 드물지 않게 등장하는 주제다. 개인적인 경험담을 이야기하자면.. 유학 초년 시절, 미국인들은 청소할 때도 고개를 잘 안 숙이는 것을 보고 살짝 쇼크를 받았었다. 필자는 방바닥을 기어 다니면서 방을 쓸고 닦고 하는 것을 참 좋은 노동이라고 생각한다. 힘들기는 하지만.. 그런데, 내가 본 미국인들에게는 이런 자세로 청소하는 것은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일일 것 같다. 인도인들은 신 앞에 고개 숙이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도 인사할 때 머리를 꾸벅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희한하게도 필자는, 반미 감정이 한참 치솟았던 유학 초기, 순종적이라는 표현을 미국인에게 적용하곤 했다. 한 번은, 한 미국 친구에게 “미국인들은 의외로 순종적(obedient)이야”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같은 과 친구 중에 가장 착한 친구였는데도.. 순간 번뜩하며, 열 받아하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그 착한 친구는 한국이 아닌, 북한 이야기를 하며 저항했다. “북한 사람들이 더 순종적 아냐?” 순간.. 무엇인가 필자가 실수했음을 직감했으나, 솔직한 자신의 의견에 대해 별로 변명할 마음이 없었던 필자는... 다시 한번 솔직한 발언을 했다. “북한 사람들은 식사에 단백질이 부족해서 저항할 힘도 없어.” 다행히 이 말이 마무리 농담이 되어주어서, 별문제 없이 대화는 마무리됐다. 아무튼.. 쿨한 자존감 강한 개인이 되고자 하는 아메리칸들이지만.. 의외로 순종적(obedient)이라고 생각했던 필자는 왠지 아시안들이 더 개인적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소위 집단주의 문화 속에서 괴로워하기도 하는 아시안들이지만.. 왠지 필자 주위에는 무척이나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 많았고. 아메리칸 개인주의는.. 멋진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마, 미국 동부 대학원이라는 지적 세팅에서 경험한 개인주의는 ... 왠지 그 느낌이 획일적인 데가 있었다. 이런 게 쿨-한 개인이야.. 이러면 독립적인 쿨-한 개인이 아니야 하는 정형화된 모습이 있다. 집단주의 안에서 괴로워하는 한국인들은.. 참 개성적으로 개인적인데 말이다.. 인도로 갔더니 심오하게 개인적이다. 신과 나. 그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는 데… 예절과 매너가 심하게 중요한 곳이지만, 왠지 무척이나 개인적인 그들의 신실함과 인간성.
다음에서는 융 심리학의 셀프(the self)와 무의식이라는 개념이 인도 영성 전통과 관련을 맺게 되는 몇 가지 논의를 통해, 동양 영성과 서양 심리학의 만남이라는 맥락 속에서 그려진 에고 초월의 한 장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융은, 에고와는 다른 통합적인 자아의 개념으로 의식과 무의식을 아우르는 중심으로서의 “셀프(the Self)”를 이야기한다. 여기서 셀프(the Self)는 인간 존재의 전체성을 대표하는 자아로서 인간 정신의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을 망라하는 중심이다. 동서양의 영성 전통과 심리학의 만남의 한 예를 보여준 융의 심리학에서 진정한 개인의 중심으로 등장하는 셀프(the Self)와 무의식(the unconscious) 개념을 통해 서구 심리학의 에고 초월의 방식의 한 예를 인도 영성 전통과의 비교를 통해 고찰해 보도록 하자.
융 심리학에서도 에고의 성장은 개인의 발달을 위해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에고의 주도권이 강해질수록 의식과 무의식의 분리가 심화되게 되어 개인은 무의식과 분리된 상태에서 고통받게 되는 점에 융 심리학은 주목한다. 따라서, 융 심리학에서는 성숙한 개인으로 성장하기 위해 무의식과 의식의 통합이 중요한 과제로 등장한다. 개인화(individuation)라고 불리는 이 통합의 과정을 통해 개인은 “전체성(wholeness)”을 향해 성장하게 되며, 의식과 무의식의 전체를 아우르는 통일된 개인의 중심인 셀프(the self)가 등장하게 된다.
융의 셀프에 대한 설명에서, 인도의 우파니샤드에서의 아트만에 대한 내용, 즉 개인 영혼인 아트만과 궁극적 본질인 브라흐만과의 일치라는 내용을 통해, 개인의 총체적 본질이자 보편적 본질로서의 셀프를 설명하는 대복을 발견할 수 있다.
“반대되는 것들의 이면에, 그리고 반대되는 것들에, 진정한 아이덴티티가 있다. 그리고 이 아이덴티티는 전체를 이해한다. 인도인들은 이를 아트만이라고 부른다. … 아트만, “통해 숨을 쉰다”는 의미의 아트만. 나만을 통해서가 아니라 모두를 통해 숨을 쉰다; 왜냐하면 개인적인 아트만일 뿐 아니라 아트만-푸루샤, 보편적인 아트만, 모두를 통해 숨을 쉬는 아트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위해 “셀프”라는 말을 사용하며, 이것은 우리의 작은 에고와 대조되는 것이다. … 이 셀프라는 것은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있다. 아트만처럼, 타오(Tao, 도(道))처럼. 이것은 심리적 총체이다” [각주 2]
이 셀프를 융은 인간 안에 있는 신과 같은 존재로 불렀다. 개인화의 과정을 통해 이 셀프를 발견하는 것이, 즉, 에고라는 의식의 주체로부터 무의식까지도 아우르는 전체적 인간성을 대표하는 셀프로 그 심리적 중심이 이동하는 것이, 융 심리학의 중요한 지향점이다. 융에게 있어서 이런 셀프의 개념은 철학적 사변이 아닌, 경험을 통해 발견된 상징의 연구에 기반한 것이었으나, 또한 알 수 없는 신비한 것이기도 했다.
“… 개인화는 에고가 아닌 어떤 것이 되는 것이고, 이건은 매우 기이한 것이다. 아무도 셀프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셀프는 당신이 아닌 무엇이기 때문이다—그것은 에고가 아니다” [각주 3]
경험 과학(empirical science)으로서의 심리학의 입장에서 심리적 실재만을 인정한 융에게, 에고는 끝까지 중요한 강조점으로 남아있었던 반면, 셀프는 일종의 작업가설(a working hypothesis)의 위치로 남아있었다고 Dalal은 이야기한다. [각주 4] 다음은 융이 요가의 사마디(samadhi)에 대해 한 코멘트이다.
“사마디,..이는 엑스타시의 상태로.. 우리가 아는 한 이것은 무의식의 상태 (a state of unconsciousness)에 해당한다.” [각주 5]
사마디를 무의식의 상태와 등가로 본 융의 이해에서, 의식(consciousness)과 에고에 대한 서구적 이해와 동양적 이해의 차이가 보인다. 에고가 없는 의식이란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던 융은, 의식에 속하지 않은 모든 것들을 무의식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고, 에고의 의식을 초월하는 소위 상위 개념의 “슈퍼 의식(the superconscious)”은 융의 개념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젠(Sen)은 이야기한다 [각주 6]
Sen에 의하면, 인도 영성 전통의 관점에서, 무의식적 사마디 (unconscious samadhi)란 일종의 "일탈(aberration)"이다. 물론 인도 요가의 다양한 전통들 중에는 이러한 사마디의 상태에 이르러 정상적인 삶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를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정상적인 지상의 삶으로의 복귀를 위해, 사마디의 엑스터시에서 다시 지상의 삶으로 그 의식이 내려오기 위해 작은 에고의 욕망을 남겨 놓는 것이 필요했다고 라마크리슈나는 말했다. 하지만, 에고를 초월한 의식(the superconscious)과 단순히 에고의 기능을 상실해 버린 의식의 상태를 구분하지 않는, 그리고 그가 혼돈스러운(chaotic) 것이라고도 표현했던 “무의식(unconsciousness)”이라는 이름으로, 사마디를 부르는 것은 인도 영성 전통에서 말하는 사마디의 의미와는 거리가 있다. 인도의 다양한 요가 전통들에서, 사마디의 상태가 무의식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으나, 사마디는 보통 고도의 의식적인 상태로 여겨진다. 사마디 상태에서의 이러한 불일치, 혹은 오해는, “의식”에 대한 융과 인도 영성 전통의 다른 이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각주 7] 더 나아가, 슈리 오로빈도는 그의 바가바드 기타에 대한 해석에서, 사마디의 의식 상태가 "깨어있는"상태에서도 지속되는 경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처음의 요가의 황홀경으로 체험된 사마디의 깨달음과 의식의 수준이, 깨어있는 상태에도 지속되는 그래서 요기의 삶에도 그 힘을 미칠 수 있는 경지로, 슈리 오로빈도는 이를 사마디에 "잠긴" 상태보다 더 높은 의식의 상태라고 설명한다. [각주 8]
융이 말하는 의식의 상태를 특징짓는다는 에고의 배타성(exclusiveness)과 구분(discrimination)은, 인도 영성 전통에서 말하는 의식(consciousness)의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일부분에 불과하며, 의식 전반에 걸쳐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에고의 특징은, 실용적인 목적에 합한 측면을 갖고 있지만, 사마디와 같은 요가 수행을 통해 도달하는 의식의 상태는 에고가 사라진 혹은 에고로부터 자유로운 의식(consciousenss)을 이야기한다. 융이 그의 셀프를 설명하면서, 사용한 인도 전통에서의 아트만, 푸루샤는 “순수의식”의 상태이며, 이는 에고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와진 의식의 상태이다. 즉, 융의 “의식”에는 에고가 필수 성분이지만, 인도 영성 전통의 입장에서는, 에고가 없는 의식이 가능하다. [각주 9]
이러한 의식(Consciousness)에 대해 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식(consciousness)의 전체 영역은 매우 넓고 다양하다. 존재의 어떠한 한 특정 모드(에고와 같은)가 모든 다른 의식의 바탕이 된다는 것은 잘못된 가정이다. 의식은 빛나는 밝음(illumination)이며 그 높은 통합의 상태(unitary state)는 하나 됨(oneness)의 상태, 제한 없이 확장해 나가는 상태이며, 점점 더 자라나는 명료함(brightness)이다.” [각주 10]
“억압된 것”과 “성욕”이라는 프로이트적 무의식의 영역을, 현대인의 심리적 분절을 치유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진 무의식으로 그 영역을 확장시킨 융.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의 통합작업을 통한 전체성의 회복과, 이 과정에서 에고을 초월하는 새로운 중심으로 등장하는 셀프. 이는 이전의 에고 중심의 정신분석학적 경향의 심리학이 보여주는 에고의 확장과 성숙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인간 자아 개념의 발전으로 보인다. 그러나, 경험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을 하는 학자였던 융이 설명하는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셀프에 대한 개념들은 영성 전통이 설명하는 “의식”과 “자아”의 개념과의 비교에서 확실하게 자리 잡지 못한 개념들로 보인다. 특히 에고를 중심으로 의식의 세계에 접근하며, 에고가 없는 의식의 세계를 무의식으로 범주화하는 그의 심리학은, 원형과 개인화(individuation)라는 과정을 통해 무의식의 근원에서부터 풍요한 정신적 자산을 길어내는 길을 제시한 반면, 사마디에 대한 센(Sen)의 비판에서처럼, 인도의 영성 전통에서 보여주는 의식의 영역의 다양성과 위계를 고려하지 않는, 즉 에고를 초월하는 수준(the superconscious)과 단순히 에고를 상실한 수준(the unconscious)의 의식을 동일시하는 경향성이 있다는 지적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다시 필자의 자유 상상으로 돌아오면… 이러한 의식의 위계질서에 대한 다른 태도가 모종의 동-서양의 멘털의 차이를 이야기해 주는 것일까? 미국과 인도에서 공부를 하며 지낸 지난 세월 동안… 동서양 문화와 영성 전통에 대해 동양인과 서양인 입장에서 다소 감정적인 날 선 대화를 할 때면, 전형적인 미국인들의 비판은 동양인들의 “굴종적인(slavish)”한 태도와 멘털에 대한 것이었고, 인도인들의 입장은 서양인들의 “순종하지 않는 오만한(arrogant) 에고’에 대한 비판적 태도였다. (물론 이런 식의 대화를 드러내 놓고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전제로 하고” 이야기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물론 인도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런 비판을 하는 것은, 때로는 애정에 찬 농담이기도 하다. 마치 우리가 개성이 강한 친구를 맘에 안 드는 부분이 있어도 미워할 수만은 없는 것처럼…) 필자의 다소 편견스러운 찬 언어로 표현해 본다면... 위계질서에 대한, 그것이 신일지라도 그 앞에 에고의 고개를 숙이는 것이 동양인보다 10배는 더 힘든 서양인의 에고... 아마 필자도 이렇게 생각을 했었던 바… 융이 사마디를 무의식의 상태로 본 것에 대한 센(Sen)의 비판에 더 강한 동의를 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래서 요가에 대해 융이 한 말은 더 흥미롭다.
다양한 종교 경험들과 신비체험, 꿈 해석 등에 대한 연구를 심리학 연구에 반영하며 기존의 심리학의 연구를 좀 더 통합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고 평가되는 융 심리학이 보여주는 셀프와, 무의식, 개인화에 대한 논의는 아마도 서구 심리학과 동양 영성의 만남을 본격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잘 알려진 선례 중 하나일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융은 동양 영성 전통이, 인간의 직관을 제대로 조명하지 않는 서구 지성의 “전제적” 횡포에 대한 비판적 역할을 할 수 있음에 동의하면서도, 서구와 동양의 근본적인 차이에 대해서 말한다.
“서구의 영성은 동양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그 토양은 요가를 적용하기에는 가장 불리하다” [각주 11]
(여기서 융은 아마도 명상수행을 통해 사마디에 이르는 파탄잘리 요가수트라의 내용에 기반한 라자 요가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Dalal은 코멘트한다)
이에 대해 융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을 이야기한다. 첫째, 서구인의 정신(mentality)을 형성한 나름의 독특한 역사가 동양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며, 둘째 그 결과 서양인들은 그들의 temperament와 mental outlook에 있어서 동양인들과 근본적으로 다르고, 이로 인해 동양 요가의 직관적인 개념 (intuitive concepts)을 그들의 과학적인 마인드와 연결시킬 수 없다. 따라서, 서구인들은 그들 자신의 성정(nature)에 이질적인 영적 수행을 모방해서는 안된다고 융은 이야기한다. 서양인들이 동양 영성 전통의 수행을 하기 힘든 또 다른 이유는, 그 수행의 중요한 요소를 차지하고 있는 스승에 대한 믿음(trust)과 “순종(surrender)”이다. 선 불교에 대해 이야기하며, 융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우리들 중 누가 그런 위대한 스승과 그의 이해할 수 없는 방법에 대해 맹목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위대한 인간에 대한 이런 존경은 동양에서만 볼 수 있다.” [각주 12]
하지만, 많은 인도의 구루들은 이러한 일반화에 온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순종(surrender)”이라는 주제에 대해 융이 제기한 것과 비슷한 문제를 제기한 제자에게 슈리 오로빈도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요가 수행에 있어서 인도 수행자들 역시 나름의 어려움을 갖고 있고, 아마도 어떤 부분은 서양인들보다 더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그 서구적인 경향들은 가까운 바로 이전의 과거에서의 유럽식 마인드의 지배적인 경향에서부터 만들어진 것들이다. … 의심과 회의…매우 활발한 정신적인 활동성.. 등은 온전한 정신적 고요함에 도달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든다. 풍부하게 액티브한 삶의 스타일로부터 태어난 강렬한 외향성… 강렬한 지적, 정서적 자기주장… 더 큰 빛과 지식, 심지어 신적인 영향을 향해서도 순종(surrender) 하기 힘들게 하는, 공격적으로 쉴 새 없이 펼쳐지는 독립적 경향… 이런 것들이 종종 부닻히게 되는 장애들이다. 하지만 이것들이 서양인들에게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 많은 인도인들은 그들의 전형적인 인도적인 성향으로부터 비롯된 어려움들을 갖고 있다…하지만 그런 것들은 어떠한 토대 위에 세워진 것들이지 존재의 결 자체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영혼의 열망(aspiration)이 강하고 견고하면… 그런 것들은 영원한 장애물이 될 수 없다” [각주 13]
어찌 보면 슈리 오로빈도 역시 이런 동서양의 차이가 없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이것은 근본적인 장애물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순종적 태도라는 정서적 태도에 있어서의 두 문화권 간에 발견되는 차이는 그 역사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차이가 "존재의 결"자체를 이루고 있지는 않다고 말하고 있다.
에고 초월에 대한 이런 다른 입장은 인간의 의식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두 가지 다른 태도를 반영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심리학에서, 의식적 주체로서의 인간의 심리 활동의 중심을 차지하며 충돌하는 모든 요구를 타협하는 조절자로서의 에고의 위상, 타인과 사회, 문화와의 바람직한 상호작용을 통해 강하고 멋지게 성숙하는 에고, 또한 무의식과의 통합을 통해 이성뿐 아니라 직관의 세계에서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의 전체성을 회복하는, 에고보다 더 위대한 융의 셀프. 하지만 여전히 에고의 역할을 떠나 인간의 의식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융의 입장. 인도 영성 전통 역시 에고를 일반적인 의식 활동에서의 중심적 주체라는 사실에는 동의하지만, 인간의 의식의 범주와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자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다른 입장을 갖는다. 에고가 중심이 되어 관여하는 일상의 의식상태 이외에도, 우리가 에고를 극복할 때 도달할 수 있는, 이런 일상을 지배하는 이분법적 의식의 상태를 초월하는 순수 의식 혹은 초월적 자아가 있으며, 우리의 진정한 아이덴터디는 거기서 발견된다고 하는 입장. 그리고 여기서 초월적 신적 실재—그것이 인격신(personal god)이건 신성한 비인격적 의식(impersonal consciousenss)이건—는 필수다.
코트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서구 심리학 전통이 풀지 못하는 근본적인 질문은… 서구 심리학은, 다른 모든 과학에서처럼, 사물의 외면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내부의 구조를 외부에서부터 이해하려 한다. 하지만 심리학에 관한 한, 이 방법은 결정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전통적인 심리학은 심리(the psyche)의 내적 깊이를 파내려 갈 수 없다. 왜냐하면 심리학의 방법론인 경험적인 관찰은 외적으로 관찰 가능한 정신작용(physical mind)까지만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deeper being을 볼 수 없다. 자아(the self)라는 것에 대해 심리학이 발견한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자아는 여전히 신비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각주 14]
서구 심리학의 신비의 영역에 남겨둔 셀프의 “정체”에 대해 인도의 영성 전통은 요가를 통한 의식의 변화와 영적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경험과 의식의 변화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우리가 경험하고 만나게 되는, 우리의 에고를 초월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우리의 영혼, 그리고 신, 혹은 신적 의식,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본질이라고 하는 절대자 혹은 그런 절대적 경지와 연관된 의식들. 이런 것들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와 철학적 내용들이 인도 영성 전통들에서 발견된다.
[그림]
대문 그림: 자야데바(비슈누 박타, 시인) 비슈누를 경배하고 있다 (1730 A. D; (출처) 챤디가쉬 국립 박물관) [attribution] Unknown authorUnknown autho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각주]
1. Sri Aurobindo, Essays on the Gita, pp. 136-137
2. Jung, “Good and Evil in Anlaytical Psychology”
3. C,G, Jung quoted in Dalal, p. 187
4. Dala, l Future psychology, pp. 185-87
5. Dalal, Ppsychology and Mental Health, p. 92
6. Sen, p.145, pp. 132-134
7. Sen, p. 145
8. Sri Aurobindo, Letters on Yoga II, p. 377
9. Sen, p. 134
10. Sen, p. 134, 143
11. Jung (Dalal, Psychology, and Mental Health, p. 85)
12. Jung (Dalal, Psychology and Mental Health, p. 89)
13. Sri Aurobindo, Letters on Yoga II, pp. 39-40
14. Brant, Loc 5695 (Kindle e-book)
[참고문헌]
Brant Cortright, “An Integral Approach to our Psychic Centre,” in Foundations of Indian Psychology (Vol. 1): Theories and Concepts, ed. Matthijs Cornelissen, Girishwar Misra and Suneet Varma, (Delhi, Chennai, Chandigarsh: Pearson, 2011)
C.G. Jung, “Good and Evil in Anlaytical Psychology,” Collected Works of C.G. Jung, Edited by Herbert Read, Michael Fordham, and Gerhard Adler. Vol. 9.
Dalal, A. S., Psychology, Mental Health and Yoga, Institute of Integral Yoga Psychology, India, 2012.
Dalal, A. S., Sri Aurobindo and the Future Psychology, Sri Aurobindo Ashram Trust, 2014.
Sen, Indra, Integral Psychology, The Psychological System of Sri Aurobindo, Sri Aurobindo Ashram Trust, 1986.
Sri Aurobindo, Essays on the Gita, Sri Aurobindo Ashram Trust, 1997.
Sri Aurobindo, Letters on Yoga II, Sri Aurobindo Ashram Tru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