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적 인간 푸루샤(Cosmic Purusha)와 베다에서의 불의 희생제의 (Fire Sacrifice)
푸루샤(Purusha)라는 산스크릿 단어는 영어의 Person과 어원적인 연관이 있다고 흠히들 말한다. 그래서 영어 번역도 Person. 이는 종종, 육체나, 에고, 지성이 아닌, “진정한 인간 (real person)”으로서의 우리의 존재인 영혼이라는 의미로 이야기된다. 인도 철학 전통에서 이 용어가 등장한 초기의 문헌은 베다 경전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문헌인 리그베다 10장에 나와있는 “푸루샤 숙타(Purushasukta: hymn of the man)”이다. 리그베다에서 우리는 창조에 대한 다양한 묘사를 볼 수 있는데 -- 신성한 장인(divine craftsman)의 창조, 우주적 배아(cosmic embryo)로부터의 창조 등--, 푸루샤 숙타도 그중 하나이다. 이 창조의 이야기들의 바탕에 깔린 상징적인 이미지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며, 이러한 상징들 중 하나가”Yajna,” 영어로 “sacrifice” 로 번역되는, 불이 주 매개가 되어 신에게 성물(offering)을 올리는 베다의 희생 제의(ritual)이다. 푸루샤 숙타는, 우주적 인간(Cosmic man) 푸루샤(Purusha)의 희생제의를 통한 창조를 이야기함으로, 창조와 베다의 불의 희생제의의 상징적 연결을 비교적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각주 1]
[그림 1] 종교적 의례인 푸자에서 중요한 요소인 아라띠 리츄얼] 여기서, 푸루샤 숙타에 대한 이해를 위해, 신에게 성물과 찬가를 바치는 베다의 불의 희생 제의가 인도 전통에서 갖는 상징적 의미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희생 제의는 인간이 신에게 무엇인가를 바치고, 신은 신성한 어떤 것을 인간에게 베푼다는 의미에서부터, 신과 자연, 인간 사이의 관계의 운행과 이를 통한 번영과 성장을 주관하는 다양한 차원의 원리들을 상징하기도 한다. 또한 베다의 여러 신들과 상징들을 통해 표현된 다양한 신적 존재와 의식들, 그런 신성한 힘들과의 교감을 통한 인간 의식의 정화와 성화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 의례에서 신과 인간을 잇는 주요한 매개인 “불”은 모든 사악하고 부정적인 것을 사르는 “정화”의 상징이며, 또한 신의 보호, 힘, 은혜를 전달하는 매개로 보아진다. 인도인들이 신에게 드리는 의례인 푸자(Puja)의 아라띠(arati)에서도 이러한 의미는 잘 드러난다. (사진 참조: 아라띠는 푸자 의례의 중요한 부분으로, 불 붙인 오일 램프를 신 앞에 돌림으로 신에게 불을 올리고, 사람들 역시 그 불에 손을 모아 가까이하고 지나감으로 신의 축복과 보호를 받는 행위를 말한다 [각주 2]). 또한 인간이 바치는 모든 성물(offering)들을 신에게 갖고 올라간다는 불의 신 아그니의 역할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불은 우리를 신성(divine nature)으로 인도하는 우리 안의 신적 존재인 영혼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이야기된다. 성스럽고, 신적인 것으로 지상의 것들을 승화시키는 이미지, 지상과 천상 사이를 중개하는 이미지가 불, 혹은 불의 신 아그니(Agni)에게는 있다. 이처럼, 베다 자체는 바가바드 기타나 푸라나처럼, 일반 인도인들이 애독하는 경전은 아니지만, 베다 문헌을 채우고 있는 상징과, 언어들, 이야기들은 이후의 인도 전통과 문화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베다의 희생제의에 대한 이러한 배경지식을 갖고 다시 푸루샤 숙타 찬가로 돌아오자. 푸루샤 숙타는 우주적 인간 푸루샤(Cosmic Purusha)에게 바쳐지는 찬가(hymn)로 이 우주적 존재가 희생 제의의 제물로 바쳐지면서 그로부터 모든 것이 창조되는 것을 노래한다.
[그림 2] 우주적 형상의 비슈누[Visvarupa Visnu (universal form of Visnu)]로 표현된 푸루샤 숙타 여기서, 이 우주적 인간은 모든 보이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존재하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근원이 되는 절대자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해와 달, 공간과 하늘, 사계절과 방위, 대기와 땅, 신과 동물들, 그리고 인간까지, 모두 이 우주적 푸루샤로부터 나왔다. 또한, 이렇게 우주, 자연, 사회, 그리고 인간, 이 모두가 우주적 인간 푸루샤와 연계되는 커다란 우주적 관계도가 그려진다. 물론, 보이는 것의 창조가 다가 아니다. 이 우주적 인간은, 신의 몸으로서의 우주, 그리고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불멸의 차원까지도 그 기원이 되는 존재다. 아래의 내용에서와 같이, 이 찬가에서, 이 우주적 푸루샤의 4분의 1만이 우리가 보는 이 우주와 세계의 창조에 관여했다. [각주 2]
그 푸루샤는 천 개의 머리, 천 개의 눈, 천 개의 발을 가졌다.
그는 땅에 사방으로 충만했고, 열개의 손가락만큼 멀리 그것을 넘어서 뻗어 나갔다.
그 푸루샤만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며, 존재했던 모든 것이고, 존재할 모든 것이다.
그렇게 그는 또한 불멸하는 것들의 지배자이다….
이것이 그의 위대함이다. 그리고 이 푸루샤는 이보다 더 위대하다.
모든 존재는 그의 4분의 1이며, 4분의 3은 천국에 있는 불멸하는 것들이다.
그 4분의 3으로 이 푸루샤는 위로 올라갔고, 나머지 4분의 1은 여전히 여기에 남아있다.
이것으로부터 그는 모든 방향으로 퍼져나갔고,
먹는 것(that which eats), 먹지 않는 것(that which does not eat)으로 펴져 나갔다.
(Hopkins(p. 22)와 Doniger (pp. 30-31)를 참고한 번역) [각주 3]
푸루샤 숙타가 보여주는 모든 것의 근원인 하나인 절대자, 그리고 이 하나로부터 비롯되어 상호 연관 속에서 창조되어 거대한 존재의 망을 이루고 있는 불멸의 존재들, 우주와 자연, 그리고 인간. 이런 창조를 통한 존재의 네트워크와 이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근원이자, 주(The Lord)인 “하나(Oneness)”인 절대자의 관념은 베다와 이후의 전통에서도 다양하고 풍부하게 다루어진다. 예를 들어, 우주와 인간을 대우주-소우주의 철학적 도식을 통해 연관 짓는 탄트라, 보이는,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 혹은 모든 불변하는 그리고 모든 활동하고 변하는 것들의 근원인 하나의 절대자로 여겨지는 바이슈나바 신애 전통의 비슈누[Vishnu=모든 곳/것에 충만한 자/ 모든 곳/것을 채우는 자], 그의 또 다른 이름인 나라야나(Narayana: 인류 안의 신, 인간이 된 신, 모든 존재의 거처, 의식이 바다에 누워있는 자), 샤이비즘(Shaivism)의 시바, 그리고 바가바드 기타의 푸루쇼타마(Purushottama = uttama purusha: the highest purusha, “최고의 푸루샤”), 아드바이타(불이론) 베단타 전통의 브라만(Brahman) 등.
푸루샤라는 단어는 베다와 우파니샤드 그리고 그 이후의 영성 전통에서 철학화의 과정을 거친다. 이전 에세이에서 살펴보았듯이 상키야 철학에서 푸루샤는 인간의 정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현상들과는 섞이지도 그래서 오염되지도 않는 순수의식(pure consciousness)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베다와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푸루샤에는 좀 더 인간적이고 우주적인 느낌이 있다: 몸을 가진 개체성이 좀 더 강조되는 인간이자, 우주의 요소를 공유한 자연적 존재의 느낌이 있다.
가너에 의하면 푸루샤 숙타보다 더 앞선 것으로 보이는 리그 베다의 찬가들에서 푸루샤는 연약한 인간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 지배적이라고 한다. 푸루샤가 베다의 희생제의의 언어를 통해 인간이라는 연약한 존재에서부터 추상적인 중요성을 갖는 존재로 격상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 푸루샤숙타는 인간 자아(the self)를 소우주-대우주의 모델로 철학화하는 작업의 시작점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푸루샤 vs. 아트만 [각주 4]
가너(Garner)에 의하면 베다 문헌에서 자아(the self)에 대한 초기의 용어들은, 제의 절차의 구축이라는 과정을 통해 아트만(Atman), 타누(tanu), 푸루샤(Purusha)와 같은 일련의 용어들로 발달해 나갔다. 가너는 이를 “연합 자아(composite self)”라고 이름 붙였는데, 여기서, 아트만은 리그베다에서 처음 등장할 때부터 비교적 일관성 있게 “개인 생명력의 내적인 본질”을, 푸루샤가 나타내는 자아는 “외적, 사회적, 희생제의적인 표현을 통해 나타난 개인”을 의미했으며, 특히 푸루샤라는 용어가 나타내고 있는 소우주-대우주의 연결이라는 상징적 의미는, 이후 전통에서 희생 제의의 의미가 철학적으로 해석되고 발전하는 데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아트만(Atman)”은 어원적으로 “숨(breath)” 혹은 “충만히 배어있다(pervade)”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문법적으로는 “나(I)”의 재귀 대명사형으로 “나 자신(myself)”을 의미하며, 명사로는 영어의 the self로 번역되는 자아, 혹은 영혼(the soul)을 의미한다. 우파니샤드에서 “아트만”은 다양한 의미를 갖게 되는데, “살아있는 숨 쉬는 몸”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한 “호흡(breath),” “생명력(life-force)”을 의미하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단어인 “프라나(prana)”와 동일시되기도 했다고 한다. [각주 5]
가너에 따르면, 베다에서 아트만이 푸루샤와 함께 쓰일 때에는 푸루샤의 한 요소 혹은 그 안에 담긴 것으로 사용되곤 했으며, 나중에 아트만은 “본질(essence)”을, 그리고 푸루샤는 “사람”이라는 함의를 갖게 되었다. 우파니샤드의 많은 부분에서 푸루샤는 개인의 본질이나 영혼으로, 즉 거의 아트만과 같은 뜻으로 나오기도 한다. 후대의 전통에서도 아트만과 푸루샤 모두 구분 없이 사람 혹은 영혼을 일컫는 말로 쓰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베다 문헌에서는, 푸루샤는 아트만과 비교해, 좀 더 포괄적(inclusive)이고 관계적(relational)인 함의가 강했고, 외부의 힘에 의해 공격받을 수 있는 취약한 존재로 그려지기도 했으나, 아트만은 푸루샤 안에 거하는, 정복당할 수 없는 추상적인 본질로 여겨졌다고 가너는 말한다. [각주 6]
고전 상키야 철학은 푸루샤 vs. 프라크르티라는 이분법의 체계를 발전시켰고, 여기서 푸루샤는 개인의 영혼, 순수의식, 수동적인, 남성적 원리인 순수 의식(pure consciousness)으로, 활동적이고, 무의식적이며, 여성적 원리인 프라크르티(Prakrti: Nature, 자연)와는 완전히 다른, 분리되고 독립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상키야 철학의 핵심적 내용들은 바로 이 섞일 수 없다고 하는 두 원리의 “관계”에 대한 것들이다. 앞의 에세이에서 언급했듯이 창조의 모든 재료(source)는 프라크르티이지만, 창조는 이 완전히 다른 두 원리들의 근접성(proximity)으로부터 일어난다; 창조의 결과는 프라크르티와의 그릇된 동일시로 인한 푸루샤의 고난, 즉 순수의식인 자신을 자연의 작용으로 착각하는 푸루샤의 고난. 이는 바로 온갖 정신과 마음의 출렁임들을 우리 자신이라고 느끼며 괴로워하는 우리의, 우리 영혼의 고난이기도 하다; 창조의 목적은 이 그릇된 동일시에서 벗어나 스스로가 순수의식임을 깨닫는 우리 영혼인 푸루샤의 해방이다. [각주 7]
이 고전 상키야 철학의 푸루샤의 특징은, 순수 의식으로서 수동적 존재라는 것 이외에도, 그 개체성과 복수성을 들 수 있다. 즉 각각의 사람이 자신만의 푸루샤를 갖는다는 것. 영혼의 개체성과 복수성을 인정하는 상키야 철학의 푸루샤와 불이론적 베단타(Advaita Vedanta) 전통에서의 개인의 본질인 아트만의 비교는, 위에서 언급한 푸루샤와 아트만의 베다에서의 의미를 계승하는 흐름을 보여준다. 즉, 불이론적 베단타(Advaita Vedanta) 전통에서는, 개인의 자아(the self)인 아트만과 우주적 초월적 본질인 브라흐만이 하나임을 깨달음으로 자유를 얻는다고 이야기한다. 이 전통에서 인간 개인의 혹은 영혼의 “개체성”(individuality)이라는 것은, 우리의 무지가 만들어낸 허상(maya: illusion, 마야)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무지 때문에, 모든 존재와 세상이 실은 궁극적 실재(the ultimate reality)인 브라흐만과 동일하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 무지가 극복되는 순간, 즉 아트만과 브라흐만의 동일시가 이루어지는 순간, “나”라는 개체성, “내” 영혼이라는 개체성의 환상은 사라진다.
이 상키야 철학의 푸루샤, 그리고 불이론적 베단타 전통의 아트만은, 앞서 가너의 논의에서 언급된, 베다에서의 아트만과 푸루샤의 비교, 즉 인간의 보다 추상적인 본질로서의 아트만, 그리고 “하나의 사람(a person)” 혹은 보다 관계적인 의미에서의 한 사람의 본질을 가리키는 푸루샤, 이 구분이 후대의 철학에서 계승 발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지바(Jiva)
아트만과 푸루샤, 이 두 단어 다음으로 인간의 영혼, 혹은 자아를 의미하는 말로 많이 쓰이는 것은 아마도 지바(Jiva) 일 것이다. 아트만과 푸루샤, 지바 이 세 단어는 모두 사람의 영혼, 혹은 자아를 일컬을 때 쓰이는 말이지만, 위에서 언급한 아트만과 푸루샤의 비교에서처럼, 지바라는 말 역시 나름의 함의를 갖고 있다. 푸루샤는 다양한 전통들에서, 인간 개인의 영혼을, 혹은 하나인 절대자를 의미하고, 아트만 역시 개인의 그리고 궁극적 실재 둘을 다 일컫기도 하고, 또한 결국은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과 하나인 개인의 실재를 의미하기도 한다. 즉, 푸루샤와 아트만은, 각 전통에서의 약간씩 다르게 쓰이면서도, 일반적으로 볼 때, 둘 다, 하나인 절대자와 인간 개인의 본질적 동의성이라는 함의를 갖고 있다. 이 면에서 지바는, 아트만이나 푸루샤와 동일한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절대자나 동질적 순수 본질이라는 의미 말고도, “개인 영혼(individual soul),” “육신에 깃든 영혼인 개개의 생명체(embodied soul)”라는 “개체성” 혹은 “몸” 과의 연결이 강조되는 용어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바이슈나바 신애 전통 (Vaisnava bhakti tradition)의 철학적 완성을 했다고 알려진 비슈스타드바이타(Visistadvaita: qualified non-dualism, 한정 불이론)의 철학자 라마누자에 따르면, 지바(jiva)는 분리할 수 없는 신의 한 부분이며, 따라서 신에게 의존하는, 그러나 신과는 구분되는, 영원한 인간 개인의 자아 (the eternal individual self)이다. [각주 8]
라마누자는 아드바이타 베단타 철학에서처럼, 절대자를 어떠한 형상이나 자질들(qualities)로 부터도 자유로운 그런 초월적이고 추상적인 모습으로만 여기지 않았으며, 인간 개인이나 개인의 영혼이라는 개체성을 마야(maya: 허상)로 보지도 않았다. 라마누자에게 절대자는 초월적 존재일 뿐 아니라 이 모든 보이는 세상과 인간 개인 영혼의 근원이기도 하다. 아드바이타 베단타(불이론적 베단타)에서의 아트만-브라만 동일시, 즉 개인의 본질과 절대자의 그것이 같다는 궁극의 진실을 라마누자는 절대자와 인간 개인의 “관계”에 기초해 이해했다: 라마누자에게 있어 절대자는 초월적이면서 동시에 내재하는 존재로, 인간 영혼과 이 물질과 피조물의 세상을 그의 몸(body) 안에 품고 있다. 절대자와 인간 개인의 영혼은 같은 본질이나, 개인의 영혼은 절대자의 몸과 같은 존재이며, 절대자가 “실체(substance)”라면 인간과 피조물의 세상은 그 실체의 “특질(attributes)”을 나타내는 존재들이다. 절대자의 몸(the body)으로서, 인간의 영혼(Jiva)과 세상, 혹은 실체의 속성이라는 “관계”의 언어는, 라마누자에게, 인간과 절대자의 본질적 같음, 그러나 관계에 있어서의 차별성을 함께 설명하는 중요한 방법이었고, 신에 대한 사랑과 섬김이 구원의 중요한 수단인 신애 전통의 영성 철학의 주요한 내용이 이루고 있다. [각주 9]
라마누자의 지바에 대한 정의는 상키야에서의 개인 영혼인 순수의식 푸루샤와도 다르다. 상키야 철학에서의 푸루샤는 프라크트티와의 관련성, 상호작용은 인정하지만 본질적으로 프라크트티와 다른 존재이며 실제로는 그에 매이거나 구속되지 않는다. 다만 그렇게 느껴질 뿐이다. 이 부분이, 상키야 철학의 이해를 다소 복잡하게 만드는 부분이기도 하다. 단순화시켜 생각한다면, 푸루샤는 순수의식이라 본래 자연에 매이거나 하는 존재가 아닌데, 그것에서부터 자유로와져야 한다는 것. 즉, 실제로는 항상 자유로운 순수의식 푸루샤가 스스로의 의식에 비추어진 프라크르티의 활동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그릇된 동일시로 에고 의식, 사고 작용.. 등이 자신이라고 느끼며 고통받는데,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와지기 위해 스스로가 “자연”의 작용이 아닌 “순수의식”임을 “분별”해야 하고, 그런 분별을 통한 올바른 동일시(identification), 즉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달음으로, 자연의 작용으로부터의 해방돼야 한다. 인간 개인과 개인의 영혼이라는 개체성을 허상이라고 말하는 아드바이타 철학의 아트만-브라흐만 동일시에서와 같이, 상키야가 말하는 순수의식으로서의 푸루샤 역시, 무언가 인간 실존의 중요한 부분, “자연”의 영역에 해당하는 부분을 너무 고려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라마누자가 보여주는 “지바”에 대한 이해는, 신과 인간의 존재론(ontology)에 기초하여 절대자, 피조물의 세상, 그리고 인간의 영혼을 “관계”에 기초해 설명함으로, 인간 영혼의 개체성과 일상적 삶을 “활동적인 자연” 현상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던 앞선 두 용어들-아트만과 푸루샤-보다 삶을 이루는 실존적 가치, 자연적 요소들에 대한 가치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의 “몸”이자, 신이라는 실체의 “특징적 자질”로서 존재하는 인간의 영혼과 피조물의 세상. 그리고 신과 인간 영혼(Jiva)과의 사랑과 의존의 관계.
하지만, 라마누자의 “관계”의 신학에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위계이다. 인간이 신과 그 본질은 같으나, 아드바이타 베단타 철학에서처럼 완전한 동일시는 아니다. 신애 전통에서 박타(bhakta: 신을 섬기는 인간)는 신을 사랑함으로 그와 하나가 될 수 있고, 그의 힘을 공유할 수도 있으며, 신 역시 자신을 섬기는 박타에게 매이는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신의 “부분”이며 신에게 “의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존재이다. 그런 존재에게, 신에 대한 사랑과 섬김은 자유와 구원의 가장 효과적이고 결정적인 방법으로 제시된다.
마무리
이상에서 인도 영성 전통에서 개인의 영혼을 의미하는 3가지 표현에 대해 매우 개략적인 고찰을 시도했다. 우주적 인간(Purusha)에게 바쳐지는 찬가인 베다의 푸루샤 숙타, 순수 의식으로서의 개인의 영혼인 푸루샤와 자연 세계인 프라크르티의 이분법을 이야기하는 상키야 철학, 절대자의 절대적 초월성, 그리고 이런 절대자와 동일시되는 불이론적 베단타(Advaita Vedanta)의 아트만, 절대자의 초월성(transcendence)과 내재성(immanence)을 함께 이야기하는 한정 불이론 베단타(Visistadvaita)의 지바(Jiva). 매우 부분적인 고찰이므로, 인도 전통에서 다양하게 이야기되는 개인의 영혼에 대한 전체적인 이야기를 담기에는 많이 부족하지만, 그 대표적인 내용 중에서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내용들을 위주로 살펴보고자 했다.
필자의 주관적 견해가 반영된 것이지만, 나름의 정리가 가능할 것 같다. 일단 아드바이타 전통의 개인 영혼, 아트만. 이는 아마도 가장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개인의 영혼 개념으로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개인의 영혼은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과 동일하며, 다만 우리의 무지에 의해 개인적인 의식, 몸, 감정 등과 동일시되어 “개인”의 영혼이라고 느껴질 뿐이다: 흔히 생각하는 “개인”의 영혼에서, “개인”이라는 개체성은 허구(Maya)다. 다음은 푸루샤. 이는 베다의 푸루샤 숙타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는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근원이자 모든 관계의 기초가 되어주는 하나인 절대자의 이미지가 있다. 반면, 상키야 철학에서의 순수의식으로서의 푸루샤는 개인의 순수의식이다. 아트만 같이 여전히 그 내용이 초월적이기는 하나, 프라크르티와의 “관계”를 창조와 해방의 역학으로 이야기함으로, 영혼과 자연과의 관계, 그리고 영혼의 개인성을 이야기한다는 데서 아트만보다는 덜 추상적인 데가 있다. 하지만 푸루샤와 프라크르티와의 관계는 꽤나 추상적이다: 이 둘의 “근접성(proximity)”으로 창조가 이루어지고, 창조의 결과 생겨난 여러 자연현상과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현상들로 인해, 본래 그리고 항상 자유롭다는 푸루샤는 프라크르티와의 그릇된 동일시를 하게 되고, 희로애락의 굴레에 매이게 된다; 분별을 통해 이 자연과의 동일시를 벗어나 본래의 정체성, 순수의식인 푸루샤임을 깨닫는 것이 개인 영혼의 해방이다.
라마누자의 지바(Jiva)는 신의 몸으로서 존재하는 개인의 영원한 영혼이며, 이 신의 몸은 피조물의 세상도 포함한다. 영혼의 개체성과 보이는 현상 세계를 허상(Maya 마야)으로 보는 아드바이타(Advaita 불이론)에 비해, 그리고 자연의 세계를 의식이 결여된 기계적인 활동성만을 가진 것으로 보는 상키야 철학의 프라크르티보다, 라마누자가 설명하는 개인 영혼 지바와 피조물의 세계는 우리 안에 내재하는 신성에 대해 더 많은 여지를 허락한다. 물론 이 세 단어—아트만, 푸루샤, 지바—는 다양한 문맥에서 인간 개인의 영혼을 뜻하는 단어로 함께 쓰이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 세 용어가 갖는 다른 뉘앙스와 함의들은 인도 전통이 품고 있는 인간의 영성에 대한 다양한 경험과, 철학적 탐구의 다양한 버전들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짚어볼 내용은, 개인의 영혼을 뜻하는 이 3가지 단어의 의미를 고찰할 때 만나게 되는, 영혼 해방의 역학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이다: 절대자/절대 의식의 경지, 개인 영혼, 자연(=개인의 몸과 마음을 포함한 피조물의 세상). 개인 영혼의 해방에 절대적인 동인은 자연과 피조물의 다이내믹에서 벗어나 절대적인 무엇인가와의 동일시 혹은 관계를 회복하는 데에 있다. 그것이 라마누자에서와 같은 신애(bhakti) 전통인 경우, 신에 대한 사랑, 섬김과 같은 인격적인 “관계”의 언어를 포함하며, 아드바이타(Advaita) 베단타나 상키야 철학에서는 비인격적인 초월적 원리나 순수 의식, 그리고 철학적인 언어를 통해 주로 표현된다.
마지막으로, 위의 내용을 정신분석학 계열의 심리학에서 설명하는 역학과 비교해 보자. 개인 자아의 의식적 중추의 역할을 하는 에고의 건강한 성장을 목표로 하는 정신분석학에서, 에고의 성장을 위한 심리적 역동에 등장하는 요소들로는, 욕망, 무의식, 타자(양육자를 포함한), 사회, 문화 등이 있다. 이를, 인도 영성 전통에서 개인의 영혼을 둘러싼 다이내믹과 비교해 본다면 아마도 가장 큰 차이는 인도 전통에서는 중심을 차지하는 에고의 자리에 영혼이 있다는 것, 그리고 “절대자/절대적 경지”라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일 것이다.
물론 정신 분석학에서도 에고가 분화되어 나오기 전의 심리적 미분화의 상태라는 다소 초월적인 느낌을 주는 요소가 있기는 하다: 프로이트의 오세아닉 필링, 코훗의 유아기적 나르씨씨즘 등이 그 예이다. 이런 미분화의 상태는 심리적 에너지와 생기를 공급하는 근원으로 역할을 하기도 하므로 영성 전통에서 말하는 절대자/절대적 경지의 역할을 하는 부분이 있다고도 볼 수 있으나, 인도 전통에서처럼 개인 영혼을 둘러싼 심리적 역동의 시작과, 과정, 그리고 목적까지 아우르는 전폭적인 역할을 한다고는 보기 힘들 것이다.
아마도 융의 무의식이 좀 더 이 역할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융의 무의식의 개념이나, 혹은 에고를 초월하는 더 통합적 중심으로서의 자아인 셀프의 개념에서 역시, 초월자 혹은 초월적 자아에 대한 내용들은 제시는 되었으나, 명확한 개념이 정립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정신분석학의 에고 분화 이전의 심리상태처럼, 절대자와 그와 긴밀하게 연결된 개인의 초월적 영성을 최상위의 위치에 놓는 식의 의식의 위계가 명확히 나타나지는 않는다.
서구 심리학과 인도 영성 전통이 보여주는 심리적 다이내믹의 가장 큰 차이는 아마도 두 전통에서의 에고의 가치와 역할에 있어서의 차이, 심리학 전통에서의 에고의 중심적 위치를 대신하는 영성 전통에서의 개인 영혼, 그리고 영성 전통에서 발견되는 절대자/절대적 경지의 존재와 역할과 일종의 의식에 있어서의 “위계”적 질서 등으로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림]
1. [attribution] ]Pramal, CC BY 2.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2.0>, via Wikimedia Commons
2. [Attribution] By Unknown author - http://www.asianart.com/exhibitions/yoga/14.html,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33706068
[각주]
1. Hopkins pp. 21-22
2. Johnson, “arati”
2. Hopkins pp. 20
3. Hopkins p 22 ; Vasudeva, “The Hindu Tradition” in The World Religion, pp. 30-31
4. 이 부분은 가너의 책 내용의 일부(pp. 303-313)를 참조하여 썼다.
5. Johnson, “atman”; Grimes, “atman”
6. Johnson; Larson
7. Larson 174-75
8. Johnson, “jiva”; Grimes, “jiva”
9. Gupta, III, 193; Srinivasa 68-78
[참고문헌]
Dasgupta, Surendranath. A History of Indian Philosophy. Vol.2, 3 [1st Indian ed.]. Delhi: Motilal Banarsidass, 1975.
Garner, John Robert, The Developing Terminology for the Self in Vedic India (University of Iowa, 1998).
Grimes, John A. Concise Dictionary of Indian Philosophy : Sanskrit Terms Defined in English, 1996.
Hopkins, Thomas J. The Hindu Religious Tradition Encino, California: Dickenson Publishing Company., 1971.
Johnson, W. J. A Dictionary of Hinduism First edition. Oxford [England] ;: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Larson, Gerald James. Classical Sāṃkhya : an Interpretation of Its History and Meaning 2d rev. ed. Delhi: Motilal Banarsidass, 1979.
Oxtoby, Willard Gurdon, Roy C. Amore, and Amir Hussain. World Religions : Eastern Traditions Fourth edition. Don Mills, Ontario: Oxford University Press,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