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aliguana Oct 24. 2021

"천국"에 대한 가벼운 상상

넷플릭스 드라마 “The Good Place”에 대한 가벼운 묵상


어둡고 칙칙하고.. 자극적인 디스토피아 류의 드라마들 속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굿 플레이스 (The Good Place)”는 신선한 재미를 선사한다. 경쾌하고 귀여운 비주얼, 묘하게 밝으면서 시니컬한 음악, 속물인 자신에게 충실하면서도 좋은 사람이 되어서 ‘굿 플레이스’에 남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좌충우돌, 솔직 담백, 감동 체험 …   매우 미국적이고, 속물적이며, 차고 넘치는 냉소, 그리고 윤리학과 심리학적 표현들이 난무하고, 인간적 따듯함, 그리고 동양 영성의 메시지...   그 가운데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 같은 느낌을 나름 일관성 있게 담으려고 하는 이 드라마의 시도가 필자에게는 좋아 보였다.  미국 NBC에서 2016년도 시작해서 2020년까지 총 네 개의 시즌, 53개의 에피소드를 방영한 이 드라마는, 2016년 즈음에 미국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온 필자에게는 생생한 미국 영어와 미국인들(?)의 재생이기도 해서, 눈뿐 아니라, 귀까지 즐거운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를 영어회화 수업으로 쓰고 싶어서.. 당시 가르치던 학원의 수강생들에게 많이 권장했으나, 반응은 별로였다. 친구들에게 추천했으나, 그들의 반응도 미지근.. 아마도 이 드라마는 필자의 취향이었나 보다. 


요즘도 이 드라마를 반복해서 보곤 한다. 아직도 재미있다. 이 나누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이 글을 쓰고 있다. 필자의 이 오랜 소리 없는 모노로그로부터 탄생된 글을 읽고자 기꺼이 커서를 굴리는,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시켜 주는 독자분들에게 미리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그림 1] 스틸 컷: 주인공 엘레노어가 죽은 후, 굿 플레이스에서 깨어나 벽에 있는 문구를 바라보고 있다.


서론


약간의 서론을 제공하기 위해  인터넷으로 리서치를 했다. 철학적 내용들을 재미나게 창의적으로 전개했다는 칭찬들이 많았다. 실제로 이 드라마에는 윤리학의 내용과 심리학의 내용들이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거침없이 나온다. 이들은 실제로 이런 말들을 종종 한다. 


“너는 아이적의 심리상태에 매여 있어. 그래서 네가 처음 소속됐다고 느껴지는 그 그룹이 해체되는 거를 참지 못하는 거지. 그래서 그렇게 힘든 거고 그래서 그렇게 남들 생각은 안 하고 파티를 망쳐버린 거지. 이제 됐니?”


“당신이 점수를 따기 위해 어떤 말을 하건 동기가 이기적이기 때문에 윤리적인 행동이 될 수가 없어요. 칸트가 말했듯이” 


그리고 이런 말들을 들은 상대방들은 화를 내기도 하고, 금방 수긍하기도 한다.


이런 드라마 속 인물들이 아니더라도, 미국인들은 말을 참… 잘하는 것 같다. 유창하다. 아무튼, 이 윤리학과 심리학의 멘트들 속에서 이야기는 나름 매끄럽게 코믹하게, 가끔은 감동적으로 전개된다. 실제, 많은 미국인들도 이렇게 창의적이고 재미있게 철학적 내용들을 실제 삶의 이야기에 엮어 넣은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드라마의 이런 부분이 솔직히 필자의 동양적 감성(?)에 확 다가오지는 않았으나, 재미는 있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좀 그 전개가 엉성해지는 느낌이 있었다. 특히 ‘굿 플레이스’ 그다음의 단계가 이야기 안으로 들어왔을 때는 무엇인가가 튕겨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등장인물 자신들도 막연히만 알고 있는 것으로 나오는, 그 영원한 평화의 단계, 불교와 인도철학의 해탈, 니르바나(Nirvana)를 암시하고 있는 그 단계가 등장할 때. 


하지만.. 아뿔싸.. 필자가 실수하고 있는 것일까… 이 영화에 대해 감독과 이야기할 때 “종교”라는 용어를 쓰지 말라고, 심지어 “유사-종교”적 표현들도 쓰지 말라고 한 기사는 이야기한다. 이 기사에 따르면 감독은 이 드라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어떤 한 종교의 사후세계의 콘셉트가 아니며”; “윤리적인 행위에 대한 것이지 종교적 구원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 드라마는 어떤 편도 들지 않는다. 드라마의 등장인물들도 다양한 나라와 종교들로부터 온 사람들이다”;  “영적이고 윤리적 (spiritual and ethical)이라는 것이 내가 이 작품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바다.” 


역시 배운 감독이라 (하바드 대학 영문학과를 나왔다)... 지적인 표현을 가다듬고 있다, 그리고 날이 서있다... 갑자기 미국 유학시절이 생각난다. 솔직히 필자는 종교적이라는 말에 그리 큰 거부감은 없다. 광신이나 배타주의, 강요, 폭력성 같은 것들이 문제지, 자기 종교 자기가 사랑하고 그 안에서 성장하겠다는 데 그리 색안경을 쓸 필요는 없다고 본다. 미국은 기독교 전통이 강한 나라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용어들을 날을 세우고 다룬다. 타 전통들을 이교도 취급하는 배타적인 자국의 종교인들에 대한 반감이 그 배경에 있을 것이지만, 그것이 종교적인(religious)라는 말에 실리는 뉘앙스를 너무  부정적으로 몰고 가는 것을 보면 가끔은 필자도 좀 저항감이 든다.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한 단어가 있다: “Spirituality” 한국어로 주로 “영성”으로 해석되는 것 같다. “영성적이고 윤리적인 (spiritual and ethical)”이라는 말로 제작자는 이 작품의 사후세계 세팅을 정리해냈다. [각주 1]


필자도 “종교(religion)”보다는 “영성(spirituality)”라는 용어를 더 선호한다. 종교라는 말이 갖고 있다고 하는 다소 덜 순수한 부분들, 아마도 “제도 종교” “제도 종교의 타락” “순수한 종교성의 타락” 등등의 용어로 가장 잘 표현될 부정적인 면모들에서부터, “영성”이라는 단어는 비교적 자유로운 것으로 이야기된다. 필자가 “영성 전통”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 이유도 그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종교의 영어단어 religion이라는 단어에 대한 애착은 아직도 있다. 필자의 전공 분야의 이름이라 애착을 버리기는 힘들 것 같다. 그리고, 종교적(religious)이건, 영성적(spiritual)이건 간에,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재미있다(fun)”는 점이다. 많은 미국 시청자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고, 필자도 이에 동의한다. 아무튼, 필자도 언어 사용에 있어서, “영성 전통 (spiritual tradition)”이라는 단어를 고수하는 이상, 필자의 에세이에 제작자가 화 낼 일은 없을 것 같다. 다행이다. 



주관적 감상 1


흥미로왔던 것은, 이 드라마에 많이 등장하는 심리학의 언어들과, 윤리학, 그리고 불교적, 인도 철학적 내용의 공존이었다. 천국에 대한 이 미국식(?) 상상에서 과연 이들을 어떻게 조화시킬지 궁금했다. 또 하나, 미드를 보면서 자주 느끼는 것은, 배우들이 그들의 연기에서 캐릭터들을 정말 잘 녹여낸다는 것이다. 아니면 미드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녹여내기 쉬운 캐릭터들일까? 아무튼 이 드라마도 예외는 아니다. 필자가 가졌던 또 하나의 궁금증은, 배우들이 연기하는 캐릭터가 심리학적 느낌의 전형적인 모습들이라면 역시 연기를 잘 해낼 것이지만 - 여태 필자가 보아온 많은 미드에서 그랬듯이 -,  윤리학적이고 동양철학적인 면들은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시즌들을 거의 다 보고 나서 든 생각은, 윤리학의 내용들 역시, 등장인물들의 갈등과 결단 속에서 그리고 유창한 달변들 속에서 표현되고, 실제 인물들이 이런 내용들을 내면화하면서 윤리적으로 발전하는 모습들을 보이면서 나름 잘 그려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동양 전통스러운 그 영성 내용들은 어떻게 표현해 낼지에 대해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 느껴졌다. 아마도… 키아누 리브스 정도 기인이어야… 리틀 부다, 혹은 매트릭스에서의 구세주인 리오를 연기해 해내는 것일까...? 


다행스럽게 이 영화의 설정은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동양적 영성을 심각하게 표현해야 하는 분위기로 가지 않았다. 이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천국은 매우 가볍고 경쾌하다.  타이틀도 “굿 플레이스 (The Good Place).” 정관사 the 가 붙었지만, 그래도 “good”이라는 형용사가 마음의 부담을 덜어준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죽은 후 이 “굿 플레이스”에서 깨어날 때, 처음 만나는 문구도 “환영합니다! 다 괜찮습니다” (Welcome! Everything is fine)”이다. 


그런데,  막상 이곳에 온 대다수의 사람들의  삶의 이력은 장난이 아니다. 인권 운동가로 위험한 지역에서 목숨 바쳐 일했던 사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장기를 줘버린 사람, 심지어 한 흑인 남자는 자신의 인생의 절반을 북한에서 보내며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웠다고 말한다. 그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생각은 들지만, 아무튼 이 남자는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아무튼 액면가로는 성인 수준의 삶을 산 사람들뿐이다. 


이것이 주인공 엘레너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든다. 전형적인 백인 비*(bitch)의 삶을 살았던 주인공 엘레너. 어떤 연유에서인지 그녀는 이 굿 플레이스에서는 오지에서 수많은 아이들의 생명을 구한 인권 변호사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자신의 정체가 발각되어 “배드 플레이스 (the Bad Place)” 로 보내질까 봐 전정 긍긍한다.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soul mate로 배정된 윤리학 교수 출신 치디를 붙잡고 좋은 사람으로 변해보고자 그래서 굿 플레이스에 남아 보고자 그에게 윤리학을 배운다. 모든 상황이 자신을 너무 몰아붙이는 것 같이 느껴질 때, 그녀는 외친다. 


“내가 forking 간디같이 산 것은 아니라도 “the bad place”에 갈 정도는 아니라고!! 난 미디엄 플레이스 (the Medium Place)는 갈 정도는 살았다고.” [각주 2]


하지만, 이러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코메디물로서, 이 드라마는 이 모든 것들을, 등장인물들의 다소 연극스러운 진지함과, 경쾌한 중에도 살짝 애매한 멜로디를 뿜는 코믹한 음악, 윤리나 사후세계, 심리학 등의 진지한 주제들에 대해 마구마구 지르는 대화들, 예의 바르지만 표피적인 태도들, 그리고 다소 예상치 못한 반전과 새로운 요소들의 등장 등을 통해, 무겁지 않고 재미나게 끌고 간다.  



주관적 감상 2: 카르마, 쏘울메이트, 천국, 열반 


(영혼은) 행함에 따라 그것이 된다. 좋은 것을 행함으로 좋게 되고, 악한 것을 행함으로 악하게 된다…                                                     (브르흐다아란야카 우파니샤드  4. 4:5의 일부)   


이 드라마는 카르마 이론의 모티브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굿 플레이스와 배드 플레이스를 가르는 것은 점수다. 드라마에 나오는 굿 플레이스를 설계한 마이클은 오리엔테이션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이 지상에서 한 모든 행동들은 그것이 우주에 얼마만큼의 선이나 악을 더했는가에 따라 플러스 혹은 마이너스로 점수가 매겨집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모든 점수들은 죽음의 순간에 계산되어 높은 점수를 얻는 여러분 같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굿 플레이스로 오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여러분의 쏘울 메이트를 여기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영원한 행복(eternal happiness)으로 오신 걸 환영합니다!” 


천국과 쏘울 메이트, 로맨티시즘과 영원의 결합은, 필자의 생각에 – 거의 -- 동양과 서양을 가르는 아이디어다. 이 둘을 죽어도 떼어놓지 못하는 것은 서구적, 이 둘은 원래 하나이기 힘들다는 태도가 동양적. 필자의 너무 주관적인 생각일까. 하지만, 필자의 생각에는 그렇다. 


마치, 인간의 의식적 자아와 욕망에 대한 대조적인 관점을 보이는 이 두 가지 용어처럼: 에고(ego)와 아함 카라(ahamkara). 프로이트 이래 인간 에고(ego)와, 이 보다는 조금 통합적인 느낌을 주는 자아(the self)에 초점을 맞춘 서구 심리학의 주목적은, 건강한 에고, 자신의 욕망과 사회적 삶을 조화시키는, 남의 행복과 나의 행복을 조화시키는, 나의 자아실현과 사회적 공헌이 하나가 되는 그런 훌륭한 에고, 훌륭한 자아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미국 대중문화 버전의 천국에서, 행복한 에고, 자아를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로 여겨지는 나만의 ‘쏘울 메이트’가 포함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앞선 에세이들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이런 인간의 자의식, 의식적인 중심을 의미하는 단어를 동양 영성 전통, 인도 철학에서 찾는다면, 에고의 번역어로 가장 좋은 후보인 “아함카라(ahamkara)”일 것이다. 하지만 이 말에 담긴 동양 철학의 함의는 긍정과 부정 중에 부정 쪽이다: 아함카라는 궁극의 자유의 길을 위해, 벗어나야 할 굴레로 인식된다. 불교에서 열반에 이르신 고승들은 아함카라의 작용에서 벗어나신 분들이다. 아함카라는 직역하자면 I-maker. “나”를 모든 다른 사람들과, 주변 환경과 분리시켜 생각하는, 일종의 나라는 의식을 중심으로 삼는 분리 의식이다. 하지만 이 의식은 단지 분리에서 끝나지 않는다. 욕망의 기저에 있는 “나”라는 의식은 나의 행복, 나의 불행, 나의 소유물, 나의 억울함, 나와 남의 비교 등등으로 번져 나간다.  이 모든 인간 심리 작용의 요동침 속에서 인간은 보이는 보이지 않는 롤러코스터를 타며, 카르마의 법칙에 따라 업을 쌓기도 하고, 또 같은 카르마의 법칙에 따라 선함으로 이를 상쇄하기도 한다. 카르마의 법칙에 따라 내가 한 모든 행동은 결과가 있고, 그 결과는 나에게로 돌아온다, 같은 생애에서 혹은 다음번 생애에서. 이번 생애에서 내가 산 삶의 선함과 악함에 따라 다음번 생애에서 어떤 조건을 타고 나는 지가 결정된다. 여기까지는 어찌 보면 굿 플레이스의 점수 시스템과 많이 다르지 않다. 


자, 이제 비교를 위해, 인도 전통에서 발견할 수 있는 천국의 한 버전도 살펴보자. 인도의 베다 전통에서는 사후에 가는, 그래서 조상님들이 계신 천국은, 희생 제의를 통해 쌓은 일종의 공덕이 영향을 미치는 곳이다. 그래서, 이 희생 제의를 드릴 수 있는 아들을 생산하는 것은 이 맥락에서 매우 중요하다. 필자의 지도 교수는 이 베다 전통에 대해 유교식 조상 의례와 매우 비슷한 것이라고 코멘트한 적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베다를 중시하는 제식주의 전통은 보다 철학적인 금욕주의 및 다른 철학적 전통들에게 그 주도권을 넘기지만, 희생제의와 관련한 많은 베다의 상징적, 제의적, 신화적 내용들은 인도 철학과 문화사 속에서, 그리고 현재까지도 다양한 해석들이 만들어지는 중요한 전통이다. 


굿 플레이스도 역시 살아서 쌓은 공덕(virtues, good deeds) 점수에서 고득점을 획득한 자들이 올 수 있는 세계다. 희생제의와는 상관이 없지만, 희생제의를 통한 공덕 대신 윤리적으로 훌륭한 이타적 삶을 산 사람들이 왔다는 점에서, 베다의 천국과 굿 플레이스는 둘 다 카르마의 법칙(the Law of Karma)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하지만, 베다의 천국은 공덕을 소모한다. 그것을 다 쓰면, 다시 세속으로 내려와야 한다. 그래서 바가바드기타에서 크리슈나는 이 제식을 중시하는 베다의 가르침으로는 윤회를 고리를 벗어나 자유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한다.  


“소마 와인을 마시고, 스스로 죄를 정화하며, 베다를 따라 희생 제의를 통해 나를 섬기는 자들은 천국에 갈 것이다. 그들은 신들의 세계에서 신들의 기쁨을 누릴 것이다. 하지만 천국을 누린 후, 그들의 공덕이 다 소진된 후 그들은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온다. 베다의 법칙을 따르며 욕망의 충족을 원하는 자들은 윤회의 세상으로 다시 돌아온다. (Bhagavad Gita. 9:20-21) 


다시 굿 플레이스로 돌아오자. 베다에서의 천국처럼, 굿 플레이스의 “굿”은 카르믹 굿(karmic good: 좋은 행위로 인한 좋은 결과: 행위의 선함)이다: 위에서 인용한 우파니샤드의 한 구절에서처럼, 좋은 행동(good karma)은 좋은 결과를 나쁜 행동(bad karma)은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고 카르마의 법칙은 말한다. 하지만 굿 플레이스는 베다의 천국처럼 쌓아놓은 카르마가 소모되는 곳은 아니다. 또한 요가(Yoga)나 베단타(Vedanta) 전통에서처럼 카르마의 법칙과  에고에서 자유로와 지면서 갈 수 있는 영원한 자유, 해탈의 경지도 아니다. 원래, 카르마의 법칙은 유한한 것들 사이의 법칙이기 때문에 유한한 결과물만을 준다. 영원의 세계는 좋고 나쁜 것을 초월하는 곳이며, 그런 구분을 초월하는 지복(Bliss)의 세계인데, 그것은 자유와 함께 있는 것이고, 그곳에 이르기 위해서는 카르마의 법칙을 초월해야 한다. 남아있는 카르마는 모두 소멸되어야 하고 그 작용의 중심에 있는 에고로부터도 영혼이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카르마의 법칙이다. 


그런데 굿 카르마(good karma: 선한 행위)로 인해 더 굿 플레이스는 ‘영원한’ 천국을 준다고 하는 것 같다. 카르마 법칙에 의하면 굿 카르마가 “영원한” 천국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베다의 천국에서 그 공덕이 소모되면 다시 지상의 삶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처럼, 카르마가 유한한 것이기에 그것이 보장하는 것도 유한한 그런 천국이다. 그런데 굿 플레이스는 유한한 카르마로부터 영원한 행복을 준다고 한다. 아무튼.. 그래서 그런 것일까... 이 굿 플레이스의 천국 됨의 성격은 다소 카르믹(karmic)하다: 세속적인 즐거움의 고급 버전이다. 더 굿 플레이스는, 이타적으로 산 나 자신이, 세련되고 건강한 에고로 성숙한 나 자신이 이 고급스러운 에고의 욕망을 역시 건강하고 고급스러운 에고에 도달한 타인들과 조화롭게 함께 공유하고 살 수 있는 그런 천국이다. 육체적인, 심리적인, 지적인 욕구를 맘껏, 하지만 조화롭게 누릴 수 있는 꽤 좋은 곳이다. 한 번의 삶에서 지상에서 얻은 높은 점수가 이 영원의 매우 세련된 세속적인 행복을 보장한다. 꽤 좋은 비즈니스다. 하지만, 카르마의 법칙으로 보자면 논리가 맞지 않는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마지막 시즌에서 “자유”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아마도 그 주는 뉘앙스가, 에고로부터의 자유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불교를 통해 익숙한 열반(Nirvana)의 내용들을 암시하며, 뒷부분의 에피소드들의 이야기를 채워간다. 그리고 삶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으로, 실은 영원의 빛이 세상에 존재함을 암시하며 끝을 맺는다.


그렇다면, 굿 카르마(good karma: 선한 행동)로부터 영원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처럼 나오는,  카르마 이론의 대차대조표의 논리와 맞지 않는 처음의 “굿 플레이스(the Good Place)”에서부터, 마지막에 암시하듯 보여주며 결론을 내는 "열반의 길"까지 이 드라마는 어떻게 이야기를 이끌어 갈까. 필자가 보기에 이 부분에서 이 드라마는 그 둘 간의 간극을 -- 카르마 법칙이 지배하는 천국과 이를 초월하는 세계 -- 잘 메우지 못했다. 카르마의 법칙이 가장 원하는 라이프스타일을 통해 고급스럽게 실현되지만, 이를 초월하는 경지에 대해서는 표현할 무엇인가가 부족해 보인다. "평화스러운" 분위기와 목가적인 아름다움, 그리고 마지막을 장식하는 삶에 대한 밝은 긍정의 메시지로. 이 간극을 메우고 있는 것 같다. 하긴, 이 모든 카르마의 법칙을 초월하는 열반의 느낌을 우리가 사는 이야기들과 연결해서 이야기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기는 하다. 마치 많은 신데렐라 스토리들이 "결혼하고 행복하게 살았다! (happily ever after!)"라는 엔딩 이후의 것은 다소 다루기 힘들어하는 것처럼...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과정들은 흥미롭다: 카르마 법칙이 고급스럽게 발현되도록 돕는 심리학적, 윤리학적 내용들이 미국적인 재미를 선사하며 펼쳐진다.   


우리에게 "선과 악을 초월하는," "열반"에 대한 '느낌'을 전해주는 문화적 자산이 있는가? 아마도, 예술과 문화의 영역, 영성 전통의 내용이 이런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필자의 생각에 인도 문화와 영성 전통은 이와 관련해, 다양한 것들을 보여준다철학적인 내용 말고도, 시들, 상징들, 예술작품, 문화들이 존재한다. 또한 그런 삶을 "살아갔다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그들이 지은 시와 작품들이 전해지며, 지금도 그런 경지에서 살아간다고 하는 인물들이 있고, 그들은 끊임없이 사람들과 교류한다.  


혹은, 이 ‘과정’--세속적 대차 대조표를 따라 굿 플레이스에 도달하고자 하는 상태에서 자유의 길까지 이르는 과정--을, 전통적 인도 영성 철학 입장에서는 일종의 “요가(Yoga)”의 과정(path)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통적 의미에서의 요가가 세속적 자아의 의식의 역동에서 벗어나 순수의식, 혹은 절대자와 하나가 되어 자유에 이르는 길이므로. 이 드라마는 이 과정의 대부분을 심리학과 윤리학으로 채운다. 인도의 영성 전통에서 필수적인 요소들인, 자기 절제, 때로는 금욕적인 생활까지 동반되는 자기 수양, 신에 대한 사랑, 그리고 윤리를 포함하지만 영성과 절대자에 대한 지식을 본질로 하는 초월적 지식에 대한 강조 같은 것들은 거의 없다. 하긴, 이런 내용들을 포함해 드라마를 만든다면 제작비를 건질 수 있는 작품을 만들기가 힘들 수 있겠다. 


아무튼, 이 과정을 공감적으로, 비판적으로 보면서, 그리고 매우 미국적인 디테일들이 주는 즐거움을 느끼면서, 필자는 이 드라마를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었다.   



등장 인물들, 미국식 천국


[그림 2] 스틸컷 (주인공들: 왼쪽부터, 치디, 엘레나 타하니, 제이슨)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6명으로 볼 수 있는데, 앞서 말한 감독의 말에서처럼, 매우 다양한 배경으로부터 온 사람들이다. 이 드라마의 히로인인 전형적인 백인 비* 엘레나 쉘스트롭. 그녀는 본인을 애리조나 ‘트래쉬 백’ (trash bag: ‘쓰레기 같은 인간’ 정도의 의미), 혹은 ‘핫 스터프’ (hot stuff: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넘치는 여자)로 부른다. 그녀는 자타 공인 이기심의 화신이다.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은 자신보다 더한 ‘트래쉬 백’이었던 부모들의 탓이라고, 10대부터 자신의 생존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자신은 이런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엘레너가 잘난 척 쩌는 비*로 (condescending bit**) 부르는 타하니. 영국 국적이고 파키스탄인인 그녀는 어두운 피부색의 섹시함과 너무나 자연스러운 영국적 매너와 그에 종종 동반되는 오만함을 함께 가진, 완벽한 영국식 영어를 구사하는 사교계의 미녀, 그리고 상속녀였다. 동생에 대한 열등감이 인생의 아킬레스 건이었다. 치디는 세네갈 출신의 윤리학을 가르쳤던 교수인데 영어와 불어 등 몇 개 언어들을 자연스럽게 하고, 윤리학을 가르칠 뿐 아니라 심각하게 실천까지 하는 사람이라 항상 무엇이 가장 윤리적인 결단일지를 놓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결정 장애를 갖고 있다. 그로 인해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하지만 착한 사람이었다.  치디는, 이런 캐릭터에 어울리지 않게 몸이 좋다. 역시 영화는 볼거리가 중요한 것 같다. 


가장 특이한 설정은 제이슨과 재닛. 제이슨에 대한 이야기를 다 하게 되면 너무 심한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적당한 선으로 해야 할 것 같다. 플로리다의 멍청한, 착한-영혼이 맑은- 백수다. 필리핀계 미국인이며, 아마추어 디제이로서 댄스 경연대회를 준비하는 등, 나름 그 분야에서 커리어를 쌓기 위해 노력하지만, 쉽지 않았다. 돈을 벌기 위해 대학생들에게 마약을 팔고 가끔 가벼운 절도를 일삼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여기서 등장인물들의 인생을 과거로 설명한 이유는, 드라마가 이들의 사후세계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제이슨과 만능 비서 재닛의 로맨스는 전형적인 로맨스와 그 느낌이 좀 다르다. 다소 산만하고 우스꽝스럽게 나오기도 하지만, 드라마에서 나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 드라마는 이런 네 명의 인물 들, 그리고, 사후 세계의 한 버전을 설계하여 이들을 맞아들이고 그들의 삶을 안내, 관리해주는 일종의 관리자 역할을 하는 사후세계의 불멸의 존재인 마이클, 그리고 그를 돕는 만능 비서 재닛이 주인공 들이다. 



마무리..


이 드라마가 너무 무게를 잡았다면 아마도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 없었겠지만, 매우 의도적이고 스마트한 그리고 성공적인 인물 설정–문화적, 인종적, 그리고 계층적 다양성–과 코믹 설정은 이 드라마가 다루고 있는 모든 사후세계 관련 이야기들을 가볍게 즐길 수 있게 해 준다. 한편, 윤리적, 심리학적 설정은 드라마의 플롯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부분이며 나름 가벼운 중에 무거운 주제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해 준다. 아마도 이 드라마에서 진정한 굿 플레이스에 대해 가장 자신감 있게 내세우는 부분이 이 내용인 것 같다: 윤리적, 심리적 발전을 통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굿 플레이스; 등장인물의 윤리적, 심리적 발전의 모습들은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주요 동인들 중에 하나이다. 


이 드라마는 보는 이에게, 자신의 영성(spirituality)에 대한 미각(taste)을 비교, 감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미국식 코믹 헤븐(heaven: 천국)에 담긴 영성의 풍미(taste)가 나에게는 어떤 맛일까.. 라는.  하지만, 필자의 친구들의 반응을 보자면.. 아무 맛이 없다고 느낄 사람들도 많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일종의 문화적 경험이 될 수도 있을까? 


이 드라마는 많은 상을 탔고, 2019년에는 가디언지 선정 21세기 100개의 베스트 티브이 프로그램 선정에서 64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꽤나 많은 창의적인 장치들이 때로는 조화롭게 때로는 부조화스럽게 등장하며, 시청자의 뇌를 자극한다. 어떤 모종의 문화 체험 같은 것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것에 동의한다. 


어찌어찌하다가, 미국과 인도서 많은 세월을 보낸 필자의 눈에 이 드라마는, 문화적 다양성, 동양 영성과 서구 지성의 조화,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삶의 조건들... 과 같은 매우 미국적 가치들을 대중문화와 중산층의 지적 취향을 한껏 고려해 조합한, 그리고 그 조합한 모습이 창의적인 가운데서도, 조화롭기도 하고 부조화롭기도 한..  흥미로운 작품이다. 그리고 아마도 필자의 천착이기도 한 동-서양 문화의 만남과 이것이 그려내는 매우 현대적인, 미국적인 천국, 심리학과 윤리학을 통해 다다르는 고급스러운 인간형들, 그리고 이런 것들을 통해 상상되는 모호하지만 나름의 지향성이 있는 영성의 이미지.. 들이 필자에게는 흥미롭게 느껴진다.   




[그림]

대문 그림: 스틸컷

1. 스틸컷

2. 스틸컷


[각주]

1. 참고한 기사가 나온 웹사이트:  https://www.hollywoodreporter.com/tv/tv-news/good-place-religion-explained-mike-schur-interview-927402/

2. The Good Place에서는 하고 싶은 욕을 막 해도 그 말이 순화되서 나온다. 온갖 욕설도 비슷하게, 하지만 희한하게 변형되어 나온다. “fork”는 “fu**”의 the good place 판 변형이다. “bull shit” 은 “bull shirt”으로 발음된다. 치디는 불어를, 엘레너는 영어를 하지만 둘은 아무런 장애 없이 영어로 대화를 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 굿 플레이스는 번역기가 필요 없다. 그리고 숙취 필터라는 것도 있다. 이 필터를 작동시키면 아무리 술을 마셔도 숙취가 없다. 


이전 08화 에고와 쏘울, 다섯 번째 이야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