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소는 성스러운 동물로 알려져 있다.인도에서 소고기를 먹기란 그래서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가 방문했던 남인도의 한 지역에서, 고기를 파는 가계를 운영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기독교인이나 무슬림이었다는 것도 흥미로왔다. 빈혈증상과 씨름하며 나이들어 종교학 공부를 시작했던 터라, 소고기는 30대부터 보약과 같이 챙겨먹던 음식이었다. 미국에서도 인도 종교를 공부하면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미국의 싸고 맛있는 소고기를 거의 매일 탐닉하다시피 했던 필자에게 소고기를 먹지 않는 다는 것은 생각할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탓이었을까.. 첫 유학 2-3년을 거의 매일 소고기를 먹고 난후, 생긴 심각한 알러지와 엄청난 크기의 다크 써클.. 꽃가루만 날리면.. 하루 종일 울었으며, 알레르기 증상을 설명하는 다양한 영어를 배워야 했다. 소고기가 알러지 증상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이미 일어난 알러지 증상을 좀 더 불편하게 만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가... 인도에서 소고기를 -- 어쩔 수 없이-- 끊고 몇 개월 생활한 후에 몸이 무척 맑아진 느낌을 받았고, 나이로 인했을 법한 증상들도 훨씬 완화되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아마도 소고기를 이전만큼은 탐닉하지 않게된 첫번째 이유인 것 같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아마도 이제 이야기할 인도에서의 소의 똥에 대한 경험 때문인 듯하다.
이번 글에서는 소에 대한 이야기를 나의 경험과 함께 인도 철학의 용어 몇 가지를 소개 해보고자 한다. 이야기 자체는 나의 평생의 습관성 과민성 대장 증상이 두 가지 다른 종류 소의 두 가지 배변 스타일을 인상 깊게 보고서 고쳐진 이야기이다. 설명을 돕기 위해 데비마하트미야 (Devimahatmya: the great story of Devi)라는 뿌라나 문헌의 나와있는 두르가 여신이 버펄로 디몬을 무찌르는 이야기와 샹키야 철학의 3가지 구나 이론 (three guna theory)이 등장한다. 다소 산만하게 쓰인 감이 없지 않지만, 이 이야기를 통해 말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내 에고 안에 똬리 튼 버펄로의 나태함을, 버펄로 디몬의 폭력적인 성질을 버리고..소의 사트빅(Sattvic)한 성품을 닮고자 하는 바람이다.
[인도 문화에서의 소]
인도인들은 소에 대해서 sattvic animal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싸트빅(Sattvic)하다는 것은, 사람에게 쓰일 때는 성품이 온화하고, 지적이고, 밝다는 뜻이고 소에 대해서도 소의 좋은 성품적인 자질을 이야기할 때 쓰이는 것 같다. 아마도 우리가 요즘 강아지들을 키우면서 반려견이라는 말을 쓰는 것처럼, 전통적으로, 인도인들에게 소는 반려동물인 것 같다.
[그림 1] (출처: IImage by Hanu B Krishna from Pixabay)
[그림 2] 타밀나두의 한 공원에서 필자가 찍은 시바신의 라이드(ride: 타고 다니는 동물)인 황소 난디(Nandi). 매일 아침 난디의 머리는 싱싱한 꽃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물론, 인도에서 소는 성스러운 동물로 여겨진다는 의미는, 소를 섬기고, 숭배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고맙고 친숙한 가족 같은, 신이 내린 선물로 귀하게 여기는 것으로 본다는 의미인 것 같다. 적어도 내가 본 모습들은 그렇다. (물론, 축제 때, 소를 꾸미기도 한다. 신을 꾸미고, 소를 꾸미고.. 어떤 축제 때는 트럭이나 차, 농기계도 꾸민다. 생계에 도움을 주는 그런 물건들을 장식한다. 아마도 락슈미에게 감사를 드리는 축제였던 것 같다). 인도에서는 신들도 그런 면이 있다. 어딜 가나 보이는 다양한 신상들, 그림들, 신과 관련되는 수많은 기념일들, 풍습들... 심지어 신의 생일까지! 인도에서의 신은 분명 초월적인 높은 존재이고 섬김의 대상이지만, 인간과 함께 있는 친숙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림 3] 프르뚜 왕이 소의 모습을 하고 도망가는 대지모신을 좇고 있다. 바가바타 뿌라나에 나온 이야기를 묘사한 그림(출처: 퍼블릭 도메인; 인도, 1740년 경 작품
다시 소 이야기로 오자. 인도 종교 문화와 신화 속에서 소의 이야기는 풍부하다. 소를 비롯한 가축들을 귀하게 여기는 태도와 채식주의는 인도의 오랜 사상인 아힘사 (ahimsa (non-violence, 비폭력))와 관련된 것으로도 이야기된다. 물론 농경 사회에서 소가 주는 경제적 혜택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베다와 뿌라나 같은 고대의 문헌들에서도 소의 중요성과 성스러움에 대한 내용들이 발견된다. 소를 죽이는 것은, 브라만을 죽이는 것과
[그림 4] 사원 안에 있는 난디의 이미지 (출처: Image by Alexander Gounder from Pixabay)
같은 중범죄이며, 소 안에는 락슈미 여신이 거하고 있다는 이야기, 소의 형상을 한 대지모신 Prithvi 가 지상에 먹을 양식들을 생산해서 인간들을 기근에서 구했다는 신화 (그림 3), 시바신을 태우고 다니는 황소 난디 (Nandi) (그림 4), 소원을 들어주는 소 (wish-fulfilling cow) (그림 5)...
[그림 5] 소원을 들어주는 소의 이미지 중 하나인 "84 신들을 품고 있는 소" (출처: By Ravi Varma Press (1897); Public Domain)
이런 이미지들은 신화적 종교적 이야기들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많은 인도인들이 소는 인간과 희로애락을 나누며, 어머니 같은 존재로서 인간의 삶을 보살피는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인도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기근이 들어도 소가 있는 집의 아이는 살아남을 수 있다." 우리가 세계사 시간에 배운 1857년에 일어난 세포이의 항쟁 역시 영국 동인도 회사의 용병으로 동원된 인도, 무슬림 군인들에게카트리지에 소와 돼지기름이 발라져 있는 라이플 총을 배급해 준 것이 그 도화선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인들은 소고기를 무슬림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에 입으로 물어뜯곤 하는 카트리지에 소와 돼지의 기름이 발라져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중요한 사회, 문화, 종교적 모독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여신 신화속에서의 버펄로(물소)와 버펄로 디몬(물소 악마)]
[그림 6] 두르가 여신이 버펄로 디몬을 죽이는 장면 (출처: Wikipedia (Public Domain; 18세기 그림)
대부분의 인도인들이 소고기를 안 먹는 것은 사실이지만, 탄트리즘 계열의 여신 숭배 종교의식에서 버펄로(buffalo)는 먹기도 한다. 버펄로 고기는 인도의 수출 품목 중에 하나라고도 한다. 버펄로와 관련된 인도의 문화적 인식은 대체로 부정적인 것 같다. 필자에게 익숙한 대표적인 신화 속 버펄로의 이미지 중 하나는 두르가 여신에게 죽음을 당한 버펄로 디몬이다. 인도의 대표적인 여신들 중 하나인 두르가(Durga) 여신이 마히 사수라 (Mahisasura=Mahisa (buffalo 물소) + asura (demon 악마))라는 악마를 무찌르고 세상을 구해냈다는 신화는 가장 잘 알려진 여신 신화중 하나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악마 마히사수라는, 변신(shape-shifting)을 할 줄 아는 존재로써, 여신과 싸우는 도중, 버펄로로 변신하게 되고, 이 버펄로로 변신한 악마를 여신 두르가가 무찌르게 된다. 이는 데비마하트미야 (Devimahtamya: the Great story of Devi)라는 산스크릿 문헌(마르칸데야 뿌라나의 일부로)에 나와 있다 (그림 6 참조).
[그림 7] 두르가 축제를 축하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형물 (출처: Image by Sandeepan Bose from Pixabay)
이 두르가 여신의 승리는 나바라트리 (Navaratri: nine nights)라는 축제에서 기려지며, 이는 북인도 지역에서 가을에 열리는 가장 큰 축제 중의 하나이다 (그림 7 참조).
[인도 거리, 소 똥, 버펄로 똥]
소와 버펄로의 문화적, 신화적 배경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했으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이들의 똥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그림 8] (Attribution: By Vijayakumarblathur - Own work, CC BY-SA 4.0)
소똥은전통적으로 인도인들 생활 속에서 매우 요긴하게 쓰여왔다.연료, 집 짓는 재료, 화장품, 약품 등으로 쓰였으며, 소의 똥뿐 아니라 소의 오줌도 여러 가지 생활의 요긴한 용도로 쓰인다고 한다.나도 소의 오줌이 들어간 안약을 인도에서 써 본 적이 있다. 눈이 정말 밝아지는 느낌이었는데 소 오줌이 들어있다고 해서 잠시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효과가 좋았기 때문에 계속 사용했다. 아래 사진은 인도에서 연료로 쓸 마른 소똥을 쌓아서 보관하고 있는 장면이다.
인도에 있었을 때, 거리에서는 소똥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여행지로 유명한 북부의 바라나시 지역에서는 길거리의 너무 많은 소똥들 때문에, 걷기가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두 번째 여행지였던 남인도 타밀나두의 한 도시에서는 분주한 분위기에 그냥 여기저기 소똥이 있는 정도였다. 주변 인도인 친구들이, 지저분해 보이는 인도 거리에 대해 살짝 부끄러워하면서, 미국이나 한국 거리는 훨씬 깨끗하지 않냐며 물어보곤 했다. 인도에 대한 애정이 충만하던 나는 "여기서 길거리에 더러운 것들은 자연적인 거라서, 건강에 그리 해로운 게 아니지만, 미국이나 한국의 도시에서는 공해 때문에.. 그런 더러움이 화학적인 거라서 사람 몸에 매우 안 좋다. 난 인도 거리가 더 깨끗하고 건강에 유익하다고 느낀다.. 비록 여기저기 소똥과 쓰레기들이 뒹굴기는 하지만..." 진심이었다. 워낙에 오염 물질에 예민하다 보니.. 똥 냄새 건 뭐건.. 일단 공기가 오염되지 않는 것에 가장 감사했다.
[그림 9] 샌프란 시스코 시청. 매일 밤마다 조명 색을 바꾸는 것이 나름 볼거리다. 2015년 필자 촬영[]
잠시 곁길로 빠져보자.. 필자가 살았던 3개국의 3개 도시에서의길거리에서 나는 냄새를, 3개국의 3개 도시에서 비교해 보자: 샌프란시스코, 폰디체리, 서울. 사실, 유학 시절, 샌프란시스코는 필자가 있을 때만 해도 공기는 매우 깨끗했다. 최근 몇 년, 캘리포니아 지역 산불 때문에 공기 오염이 심각한 때가 가끔씩 있다고 한다. 심할 때는 깜불이 도시를 날아다닌다는.. 서울이야 2010년 전후해서였던가.. 천연버스 때문이었는지.. 잠시 좋아졌나 싶다가.. 그다음부터는 계속해서 공기오염에 관한 한..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것 같다. 샌프란시스코 거리에서의 냄새라면.. 길거리 마약 냄새와 개똥이 생각난다. 필자가 시청 근처에서 살았을 때, 학교를 오가면서 항상 개똥들을 피해 다녀야 했던 기억이 있다.
[그림 10] 동네 어귀를 장식하고 있는 쉬바 신상 (필자가 직접 촬영, 2014, 타밀나두)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거리를 점유하고 사시던.. 노숙자 분들로부터 종종 나던 대마초 냄새... 서울의 요즘 공기는 먼지 냄새가 난다. 아니 맛도 느낄 수 있다. 세 군데 중에 서울이 가장 똥은 없다. 껌은 제일 많이 붙어 있는 것 같기는 하다.. 필자가 있었던 지역의 인도의 거리는.. 워낙에 오토바이를 많이 타서 가끔 출퇴근 시간에 나는 오토바이 매연 냄새.. 하지만 바다가 가까와서 바다 냄새, 엄청나게 많은 꽃나무들이 흐드러지게 피고 떨어지고.., 거리에서 자스민을 엮어 파는 사람들, 하루에 2번을 간다는.. 쟈스민 머리 장식.. 여인네들이 지나갈때면 쟈스민 향이 코를 스치는 거가 기분 좋을 때가 많다. 물론, 인도도 델리 같은 대도시들은 공기오염이 무척 심하다고 한다.
다시, 소똥과 인도의 길거리로 돌아오자. 소똥을 비롯한 동물 똥들, 그리고 여기저기 버려져 쌓여있는 쓰레기들이 시각적으로 인도 거리를 지저분하게 보이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흐드러져 위로 옆으로 아래로 뻗쳐있는 각양각색의 꽃나무들.. 길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태연스런 꽃들. 대기의 공기가 품고 있는 섬세한 기운들.. 그리고 향기를 뿌리고 지나가는 아낙네들, 소녀들, 할머니들의 머리를 장식한 흰 재스민 꽃들.. 태양 같은 인도인들의 눈빛들과.. 그런 모습을 닮은 여기저기 보이는 신상들... 그 분위기 속에서는 똥조차 성찰의 대상이 충분했다.
당시, 나는 인도 거리에서 자주 발견되는.. 소똥의 두 가지 형태를 관찰할 수 있었다. 반죽이 잘 된 것... 때때로 가다가 다시 한번 쳐다보게 되는 이쁜 똥... 그리고 동그랗게 확 퍼진, 원의 반경이 30센티 이상이며 물기가 많은 무정형의 다소 무서운 똥... 정말 조심하지 않으면 밟기 쉬운, 나의 하루를 낭패로 몰아갈 것 같은 그런 똥... 하루는 한 친구에게 왜 저렇게 똥이 다르냐고 물어봤더니, 반죽이 잘된 똥은 일반 소의 똥이고 물같이 퍼진 다른 하나는 버펄로의 똥이란다. 그리고는 덧붙이는 설명이 소는 사트빅한 동물이라 똥도 저렇게 잘 만들고, 버펄로는 성격이 괴팍한 동물이라 배설물도 저렇게 정갈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트빅(Sattvic)이라는 단어로 소의 성품을 설명하던 인도인들처럼..그 친구는, Sattvic 한 성품과 소의 배설물을 연관시켰고, 버펄로는 성품이 Tamasic 하여 똥도 저렇게 무정형의 액체같이 만들어 버린다고 했다.
[그림 11] 해질 무렵의 해안가 (필자가 직접 촬영. 타밀나두 2014)
순간 나는 약간의 그러나 진지한 쇼크를 받았다. 거의 평생을 과다한 카페인과 긴장감으로 인한 경미한 과민성 대장 증상으로 배변 문제를 해결해 왔던 필자는 왠지 그 습관이 버펄로를 닮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나의 배변습관이 사트빅한 소가 아니라 타마식한 버펄로의 습관과 비슷하다니... 더구나 데비마하뜨미야에서 버펄로 디몬은 여신 두르가에게 죽임을 당하는 존재가 아닌가...
[세 가지 구나(Three Gunas) 이론과 상키야 철학]
여기서 잠깐, 사트빅(Sattvic), 타마식(Tamasic) 같은 용어들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잠시 구나 이론에 대해 짚어 볼 필요가 있겠다. 구나 (Guna) 이론은 인도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철학 중 하나인 샹키야 철학의 중요 내용 중의 하나이다. 상키야 철학에서 사트바(Sattva), 라자스(Rajas), 타마스(Tamas)는 모든 피조물을 구성하는 자연적 요소를 가리키는 세 가지 요소(three gunas)를 일컫는다. 샹키야 철학은 인간이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영혼 혹은 순수의식 (Purusha or pure Consciousness) 그리고 자연 (Prakrti or Nature), 이렇게 두 가지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즉, 푸루샤 프라크르티 이 둘의 상호작용으로 창조작용이 일어났으며 의식과 자연 이 둘의 상호작용 없이는 어떤 존재함도 불가능하다고 본다. 존재의 근간은 순수의식인 푸루샤지만.. 우리의 모든 외적, 내적 움직임, 작용.. 이런 것들은 Prakrti, 즉, 자연의 범주라고 본다. 이 인도의 이분법적 상키야 철학이 서양식 몸과 정신의(Mind and Body) 이분법과 다른 점은, 보통 서양철학이 Mind의 범주에 넣는 이성, 감정, 에고.. 이런 것들이 상키야 철학에서는 자연, 즉 Prakrti 의 범주에 속한다는 것이다. 푸루샤, 즉 우리의 순수 의식, 영혼의 세계는 우리의 이성과 감정, 에고 (ego)라는 자연(프라크르티)을 너머서서 존재하는 것이고, 그렇게 이런 자연(프리크르티)의 것들을 넘어서야, 혹은 이런 것들이 잠잠해져야, 우리의 영혼(푸루샤)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너무 추상적으로 간 느낌이 있지만, 주제와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소와 버펄로의 배변 스타일을 통해, 소의 Sattvic 한 습관과 그렇지 못한 버펄로의 배변 습관을 얘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럼 이제 Sattvic, Rajasic, Tamasic 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상키야 철학에서는 우리의 영혼, 순수의식인 Purusha 가 아닌 것들, 즉, 인간의 지성, 감성, 몸과 본능, 이런 표면적, 감정적, 지적 활동들은 다 Prakrti, 즉, 자연의 범주이다. 이런 Prakrti를 이루고 있는 3가지 요소가 세 가지 구나 (three gunas)이다. 이 세 가지 구나의 이름은 앞서 말했듯이 사트바 (Sattva), 라자스(Rajas), 타마스 (Tamas)이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Sattva는 지적이고, 밝고, 가벼우며, 조화롭고, 상승하는 기운이다; Rajas는 열정적이고 역동적이며 진취적이고 강렬하다; Tamas는 정태적이고 활동성이 적고, 소극적이다. 각각의 부정적인 면은 사트바의 경우, 지적 오만과 독선, 라자스는 이기적 욕망의 추구와 폭력적 강요, 타마스는 이기적 나태함과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마음 가짐.. 등으로 이야기될 수 있다.
인도의 가장 유명한 고전 중 하나인 바가바드기타 14장에서 크리슈나는 이 3가지 구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그림 12] 마하바라타의 전쟁 장면에서 아르쥬나와 그의 마차를 이끄는 크리슈나 (퍼블릭 도메인; Wikimedia Commons)
"사트바는 그 순수함으로 빛나며, 질병과 고통에서 자유롭다; (하지만) 행복과 지식에 대한 집착이 있다"
"라자스는 열정(passion)이 그 특징이며, 갈구함과 집착으로부터 일어난다. 라자스의 행동하는 열정은 (attachment to action)그 사람의 영혼을 강하게 얽맨다 "
"타마스는 무지에서부터 일어나며, 이 무지는 그 사람을 혼동시킨다. 이는 게으름과 나태함, 무기력함으로 그 영혼을 얽맨다"
(참조: the Bhagavad Gita (2009, English Translation by Withrop Sargeant) / 필자의 한국어 번역)
인간 개인이나 모든 피조물들은 그 성향, 성격에 있어서 이 세 가지 성질 중 하나가 주도권을 잡게 되고, 그것이 그 사람의, 그 존재의 주도적인 성격을 이룬다고 본다. 물론, 자연으로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 3가지를 모두 갖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 세 가지 중 한 가지로만 존재할 수는 없다고 한다: 아무리 사트빅한 사람이라 해도 라자스와 타마스가 공존하며, 아무리 타마식한, 그래서 이기적이고 소심하고 활동성 없는 나태한 사람도 사트바의 지성과 밝음, 조화, 그리고 라자스의 욕망과 행동력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세가지 구나 중, 주도권을 잡아야 하는 것은 사트바이며 이것이 자연과 순수의식의 결합체로서의 모든 피조물이 특히 정신적 존재인 인간이 나아가야할 방퍙이다. 사트마의 말고 밝은 지적인 기운이 일종의 지렛대같은 힘(레버리지 (leverage)이 되어, 인간은 자신의 순수 의식, 영혼인 푸루샤와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니르바나의 경지와도 통하는 일체의 욕망과 에고 그리고 그들의 영향에서 자유로와진 자유, 평화, 지복의 단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사트바 역시, 자연의 일부로서 다른 두 기운 -- 타마스와 라자스 -- 없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사트바의 주도권은 그 단계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결국은 사트바 역시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며, 즉, 인간은 자연(Prakriti)중 가장 지적이고 밝고 높은 사트바의 도움으로, 그러나 결국 그것조차 너머서서, 마침내는 푸루샤, 즉 자신의 영혼과의 커넥션을 회복해야 진정한 자유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고 인도의 많은 전통들은 보고 있다.
[버펄로와 배설물-구나 이론]
일반적으로 Buffalo는 이 3가지 구나 중에 타마스와 가장 연관이 되는 동물로 여겨진다. 위에서 말한, 인도 친구의 설명에 의하면 버펄로의 묽고, 형체 없이 퍼져버린 변은 무기력하고 나태하며 이기적이고 소심한 타마스(Tamas) 구나의 낮은 의식 수준의 반영이며, 소의 좋은 모양의 그것은 소의 사트빅(Sattvic)한 성품과 연결이 되었었다. 버펄로의 타마식한 성질을 이야기해주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비슈바미트라라는 현자가 신들이 만든 우주와는 다른 또 다른 우주를 창조했는데, 이 창조에서 버펄로는 소의 대체물로 창조되었다고 한다. 이 현자는 이기적인 동기로 창조를 했기 때문에 그 창조물 중 하나인 버펄로 역시 신의 창조물인 소처럼 사트빅하지 못하고 타마식하다는 것이다. 창조물이 창조자의 동기를 반영한다는 이 이야기는 인도 친구가 말한 배설물-구나 이론과 통하는 바가 있어 보인다.
여신이 무찌른 버펄로 디몬의 경우는 라자스 구나와 연관된다. 상키야 철학의 3가지 구나(Guna)중 인도 철학과 문화에서 악마의 근성과 가장 많이 연관되는 것은 라자스(Rajas)이다. 욕망, 자기중심, 에고이즘, 독선과 폭력.. 이들은 Rajas의 아이들이다. 이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열정과 욕망인 라자스 구나는, 심지어 그것이 이기적 동기라 할지라도, 아무것도 안 하려고 하는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식물인간 같은 타마스보다는 의식의 단계에 있어서 더 높은 것으로 이야기 되기도 한다. 물론 라자스 구나로 특징 지워지는 악마는 신으로부터도 등을 돌리고 본인의 욕망에 올 인한 이기심의 화신이라는 점에서 더 나을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소똥의 심리학:상키야 철학의 구나이론과과민성 대장 증상]
인도 문화, 철학에서 인간의 길, 신에게 나아가는 길로서 권장되는 성품은 사트바(Sattva)이다.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아무리 사트빅(Sattvic)한 사람도 이 열정과 독선의 라자스(Rajas)로부터, 무기력과 나태함의 타마스(Tmams)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자연(Prakrti) 안에 존재하는 어떤 것들도 라자스와 타마스없는 사트바(Sattva)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또한, 신에게 나아가는 길에서 이 사트빅(Sattvic)한 성품마저, 즉 지식과 행복..과 같은 좋은 것들에 대한 집착마저 극복되어야 하는 것으로 믿어진다. 하지만, 이 정도의 단계가 되기 이전에 인간은 일단 이 Satwic 한 성품을 닦아야 하는 것으로 이야기 된다. 물론, 각각의 입장과 상황에 따라 Rajasic 한 기질을 발휘해야 할 때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마저 Satwic 하게 하라는 것이 바가바드기타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나는 사트빅(Sattwic)한 성품과 같은 것들을 비웃으며 살아왔었다. 긴 시간에 걸쳐 종교와 지식에 대한 천착을 한 결과가 다소 냉소적인 모양새로 귀착 되어졌던 것 같다. 빛과 온화함.. 조화와 지성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은 지루함과 평균적인, 안정적인 삶을 보기 좋게 꾸며 말하는.. 하지만 그 아래에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불만과 미움이 꿈틀대고 있는, 그런 것에 입히는 허울 좋은 표현,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인간답다는 것은 열정과 좌절, 미워함과 집착.. 이런 것에 어느 정도는 솔직해야 하고 때로는 그것에 나를 맡기는 모험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 조화와 안정으로 꾸며진 삶은 위선이던지 기만이던지.. 그런 것이기 쉽다는 생각.. 조화와 균형.. 지성과 밝음.. 영성.. 이런 것들은 이론일 뿐, 실제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이런 나의 생각이 과민성 대장 증상과 이런 습관을 유지하게 한 커피와 소고기의 폭주를 합리화했다는 생각이 든다. 도저히 다 읽지 못할 분량의 영어 원서를 앞에 두고 미친 듯이 고기와 커피를 들이키며 살았던 유학 생활. 몸은 조화와 균형을 추구할 무언가가 아닌 나의 지식적 성취를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인도 공부 7년 만에 가게 된 인도 땅에서 구나 이론에 입각해서 나와 소의 배설물을 비교 분석하면서, 신을 사랑하는 인도인들의 태양 같은 마음을 느끼면서.. 그들이 이야기하는 사트빅한 성품을 이해하고 약간은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인도인들이 소에 대해 갖고 있는 진심 어린 애정은 인도 문화가 보여주는 소에 대한 풍부한 상징들, 이야기들과 함께, 내가 이론만으로 알고 있었던 사트바, 라자스, 타마스의 상키야 철학의 구나 이론을 가까이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사진 13] 인도 타밀나두의 한 사원에서의 필자. 사원을 거니는 송아지 위에 손을 얹고 있다. (2017년)
여신을 유혹하다가 안 되니까 여신을 죽이려고 드는 데비마하트미야의 버펄로 디몬과 필자를 비교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이 들면서도... 배설물로 인한 필자와 버펄로와의 동일시(identification)는 나의 몸과 마음에 잔잔한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때 이후로.. 이 해묵은 과민성 대장 증상의 배변 습관은 상당히 고쳐졌다. 아마도 몸을 폭력적으로 다루는 버펄로 디몬같은 나의 라자식(Rajasic)한 마음 가짐에 대해, 그 습관이 야기한 타마식한 나의 습관(커피 카페인의 자극에 수동적으로 의지하여 배설습관을 들이는.. )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게 된 것 같다. 물론 아직도 커피를 비롯한 카페인 음료들을 즐긴다. 하지만 심리적 의존도는 많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몸은 여전히 공부를 위한 수단처럼 취급되면, 여전히 라자식하게 몰아붙일 때가 많다. 하지만, 예전보다는 이 자연의 역동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고 라자스보다는 사트빅하게 몸과 마음을 다루고자 노력한다. 버펄로와 버펄로 디몬이 보여주는 타마스의 나태함과 무기력, 그리고 라자스의 폭력적이고 탐욕스러운 이기적 역동에 휘둘리지 않고, 더 의식적인(more conscious) 존재라고 하는사트빅한 소의 성품을 닮고자 하는 진지한 바람이 생겼다. "인간적"이라는 표현으로 합리화, 미화, 내지는 거의.. 신성화시켰던 내 육신의 무기력과 에고의 과격함과 변덕을 성찰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이, 인도의 소와 소똥이 내게 준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