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타고니아의 겨울
남미는 우리나라와는 정반대에 위치하고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땅을 파서 지구 반대편으로 나올 수 있다면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가 나온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남미여행을 하는 일반적인 루트는 페루를 시작으로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을 반 시계방향으로 여행하는 페볼칠아브가 유명하다. 우리는 어차피 북미로 올라가야 했기 때문에 브라질을 시작으로 시계방향으로 남미를 여행하기로 했다.
우리나라와 12시간의 시차가 나는 아르헨티나는 남미에서 가장 기대했던 곳 중 하나이다. 저렴한 소고기와 와인, 세상의 끝 우수아이아, 아웃도어 브랜드명으로 유명한 파타고니아 등 즐길거리가 정말 많은 나라였다.
브라질편도 그렇고 아르헨티나편도 소개할 내용이 너무 많아서 줄이고 줄이는데도 시간이 많이 소모되었다. 생략을 하고 싶어도 너무 좋았던 기억이 많아서 쓰는 사람과 보는 사람이 조금 힘들더라도 꼭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
2024년 5월 겨울이 막 시작되던 아르헨티나의 여행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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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선과 일정
브라질만큼은 아니지만 아르헨티나는 세계에서 8번째로 면적이 큰 나라로 우리나라의 약 28배의 크기다. 브라질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르헨티나도 버스로 이동하자니 처음 계획했던 1년이라는 기간이 점차 압박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직 가야 할 곳이 너무 많이 남았다. 이미 여행 1개월 차인 발리에서부터 1년은 세계여행을 하기에는 너무 짧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남은 남미 일정은 비행기랑 버스를 적절히 섞어서 이동하기로 했다.
이과수에는 빅토리아 폭포처럼 두 도시가 있다. 브라질의 포즈 두 이과수 (Foz do Iguaçu)와 아르헨티나의 푸에르토 이과수(Puerto Iguazu)이다. 한 곳에 숙소를 잡고 당일치기로 두 나라를 왕복하기도 하는데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음 여행지로 가기 위해 브라질에서 아르헨티나로 국경을 넘었다. 아르헨티나는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90일 동안 무비자 체류가 가능하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사이드에서 이과수 폭포를 구경하고 아르헨티나의 푸에르토 이과수에서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비행기를 타고 이동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겨울이 시작되는 파타고니아와 세상의 끝 우수아이아 여행을 위한 준비를 했다. 다시 비행기를 타고 우수아이아로 이동해서 깨끗한 공기를 마셔주고 버스를 타고 모레노 빙하가 있는 엘 칼라파테로 향했다.
우수아이아에서 엘 칼라파테까지는 칠레국경을 넘어야만 한다. 1902년에 영국이 칠레와 아르헨티나 간의 국경 분쟁에서 중재자로 나서 지형과 상관없이 정치적 타협의 결과로 이러한 직선형태의 국경이 생겨났다고 한다.
엘 칼라파테에 도착해서는 렌터카를 빌려 피츠로이 등반을 위해 엘찰텐을 왕복하고 다시 비행기를 타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가며 23박 24일의 아르헨티나 여정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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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달러와 깜비오
아르헨티나 여행을 준비하며 가장 신경 쓰였던 부분이 바로 환전이었다. 초인플레이션으로 국가의 공식 환율보다 비공식환율인 블루달러가 훨씬 높았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과 심지어 기업들까지 블루달러 환율을 이용한 암환전을 사용해서 아르헨티나의 경제가 더 악화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특히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관광지를 걷고 있으면 여기저기서 몰래 깜비오를 속삭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2024년 4월 말쯤 1 USD가 공식환율로는 약 870페소, 블루달러는 약 1,035페소였다. 많은 여행자들이 암환전을 이용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으슥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불법행위가 무서웠고 위조지폐의 위험도 있었기 때문에 카드를 사용하거나 공식환전소를 이용했다.
공식환전소를 이용해도 무섭긴 마찬가지였다. 100달러 한 장을 환전하면 1,000페소 140장 돈다발을 들고 다녀야 했다. 2,000페소짜리도 있었는데 우리가 갔던 환전소들에서는 구경하기 힘들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스카이다이빙을 그나마 저렴하게 할 수 있다고 해서 유명한데, 일정상 우리가 탈 수 있는 업체는 약 700 USD를 달러나 페소, 현금으로만 받는다고 했다. 한국에서 미리 환전해 온 달러는 아프리카에서 거의 다 썼고 페소는 너무 많은 돈다발을 들고 다녀야 해서 포기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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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우버택시나 수배 교통카드를 구입해서 버스를 타고 다녔다. 우리나라 교통카드와 마찬가지로 충전을 해서 지하철과 버스에서 모두 사용이 가능하다. 할인된 금액으로 환승도 가능했다.
이과수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구간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우수아이아 구간은 비행기를 타고 이동했다. 남미에서 유명한 플라이 본디 (Fly bondi)라는 항공사를 이용했는데 우수아이아 갈 때 영문도 모른 채 9시간이 딜레이 되었다. 연착을 밥먹듯이 하는 줄 알고 있었지만 워낙에 저렴해서 선택했는데 하루 일정이 날아갈 줄 알았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 것이다. 다행히 숙소에서 나가기 전에 이메일 체크를 했기 때문에 레이트 체크아웃을 요청하고 공항이 아닌 숙소에서 대기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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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아르헨티나를 여행한 트래블러라는 TV프로를 보면서 꼭 먹으리라 다짐했던 음식들이 있었다. 아르헨티나는 숯의 열로 서서히 고기를 익히는 아사도 (Asado)와 맨도자 (Mendoza) 지역에서 재배하는 포도종 말벡으로 만든 와인이 아주 유명하다.
소가 인구수보다 많다는 아르헨티나다. 마트에서 사는 소고기는 저렴했는데 외식물가는 많이 비싸졌을 때 가서 조금 부담스럽긴 했지만 이동하는 도시마다 소고기와 와인을 빼먹지 않고 먹었을 정도로 맛있었다.
스페인어로 소고기 부위는 알아두면 좋다. 마트나 정육점에 부위별로 종류가 다양해서 다양하게 먹어 볼 수 있었다. 엘 칼라파테의 한인민박 린다 사장님이 알려주셨는데 쌀을 고를 때는 0이 다섯 개 표시되어 있는 쌀이 그나마 우리나라쌀과 비슷하다고 한다. 포장을 자세히 보면 00000이라는 표시가 있다.
구워 먹기가 지겨워질 때쯤 식당을 운영하시는 형님의 조언을 구해 소고기와 파, 양파만 넣고 물에 푹 끓였다. 소금간만 추가해서 먹었는데 오랜만에 먹는 맑은 곰탕맛이었다. 파타고니아에서 추위에 떨다가 먹는 뜨끈한 국물은 참 행복했다.
푸에르토 이과수(Puerto Iguazu)
브라질 포즈 두 이과수에서 미리 섭외해 둔 택시를 타고 국경을 넘었다. 브라질 포즈 두 이과수에서 정해져 있는 공식 금액이 있었는데 미리 합의한 250 헤알 (약 한화 67,000원)로 결제했다.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는 방법도 있었는데 우리는 짐이 많아서 택시를 이용하기로 했다. 출국심사 때는 택시에서 내려서 심사받았는데 아르헨티나 입국할 때는 차에서 내릴 필요 없이 입국심사를 마칠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 입국도장을 찍어주지 않는 게 의아했는데 전자로 처리되어서 더 이상 실물 도장은 찍지 않는다고 한다. 가끔 다른 나라에 출국 시 도장 없는 걸로 시비 거는 경우가 있다고 해서 국경 넘는걸 영상으로도 찍어놨는데 필요한 일은 생기지 않았다.
이과수강을 넘어가다 보면 브라질 국기 색인 노란색과 초록색이 반복적으로 칠해져 있는 난간벽이 있는데 다리 중간쯤 그 색이 사라진다. 그 경계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경계라고 한다.
택시를 타고 아르헨티나로 넘어가는 가장 큰 이점은 빠르다는 것이다. 세 줄로 길게 늘어서 있던 일반차량들 옆으로 텅 빈 택시줄이 따로 있었다. 차 안에서 여권제출하고 간단한 서류를 작성하고 아르헨티나 숙소까지 40분 정도 걸렸다. 시간이 촉박하다면 택시를 추천한다. 시간을 돈으로 살 수 있었다.
호텔에 짐을 맡기고 앞에서 기다려준 브라질 택시를 타고 이과수 폭포로 향했다. 빅토리아 폭포는 가로로 길게 뻗은 형태의 폭포기 때문에 짐바브웨 사이드에서 대부분의 폭포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악마의 수영장을 가지 않는 이상 잠비아 사이드는 포기하는 경우도 있는데이과수 폭포는 두 나라를 모두 들러 각기 다른 매력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우리나라와는 지구 정반대 편이라 한번 오기도 힘들다는 생각 때문에 악마의 목구멍을 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포기하기 힘들었다. 폭포 위에 설치된 데크가 떠내려가서 보수가 필요한데 공사가 쉽지 않은지 재오픈이 계속 연기되고 있었다. 2025년 현재는 재오픈해서 관람이 가능하다고 한다.
아르헨티나 사이드에는 가벼운 트레일이 가능한 서킷(Circuit)이 세 개 있다. LOWER-UPPER 서킷과 서킷이 있는데 우리가 방문했던 2024년 4월은 데빌 서킷이 폐쇄되어 있었다. 매표소가 있던 입구 쪽에서 운행하는 에코셔틀기차를 타고 서킷 입구에 도착했다. 많은 사람들의 리뷰를 보고 조금 더 난이도가 있다는 어퍼서킷을 먼저 둘러보고 보트투어를 할 수 있는 하부서킷을 나중에 둘러보았다.
입구 쪽에서 Jungle Gran Aventura 업체의 보트투어를 예약하려 했으나 매진되었다고 너무 아쉬워했는데 셔틀기차를 타고 조금 이동하면 나오는 미들오피스에서는 예약이 가능했다. 예약을 위해서 돈을 지불하는데 여권이 필요했는데 가져가지 않아서 사진으로 대체했다. 1인당 60,000페소인 정글 어드벤처투어는 셔틀버스를 타고 정글에 살고 있는 동식물에 대한 설명을 듣고 보트 탑승장에 도착한 다음에, 보트를 타고 폭포를 가까이에서 직접 경험해 볼 수 있었다.
두 나라에서 모두 보트 투어 상품을 운용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조금 더 저렴했던 아르헨티나에서 탔다. 보트를 타기 전에 나눠주는 방수가방에 모든 짐을 넣고 구명조끼를 입는다. 이과수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브라질 사이드의 보트 탑승장도 볼 수 있다. 아르헨티나는 보트 탑승장까지 걸어서 한참을 내려가야 했는데 브라질은 리프트가 있어서 부러웠다.
폭포를 들어갔다가 나오기 때문에 우비를 입어도 소용없었다. 물에 빠졌다가 나오는 거랑 다름없어서 수영복은 필수다.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려 엄청난 소리가 나고 물보라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는다. 작은 폭포 한번, 큰 폭포 두 번 이과수 폭포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으로 약 두 시간의 투어가 마무리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Buenos Aires)
세계여행 후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어디가 제일 좋았냐는 질문과 살고 싶은 곳이 어디였는지 묻는 질문이었다. 어디가 제일 좋았냐는 질문에는 “진짜 거짓말 안 하고 다 좋았다”라고 대답하지만 어디에서 제일 살고 싶은지에 대한 나의 대답은 “부에노스아이레스”다. 47개국의 수많은 도시를 다녀봤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나의 최애 도시가 되었다.
좋은 바람, 상쾌한 공기라는 뜻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엄청 특별한 기억은 없다. 나는 그냥 햇살이 좋았고 하늘이 좋았다. 바람이 좋았고, 느낌이 좋았다.
남아공의 케이프타운과 브라질의 상파울루와 리우데자네이루처럼 위험한 도시들을 겪고 나서 말라리아와 뎅기로 몸과 마음까지 지쳐버린 상태였는데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힐링받는 느낌이 들었다.
여성의 다리 (Puente de la Mujer)
부에노스아이레스에도 칼라트라바(Santiago Calatrava)가 설계한 다리가 있었다. 여성의 다리 (Puente de la Mujer)는 2001년에 완공된 약 170미터 길이의 다리의 이름이다.
탱고의 나라 아르헨티나의 여인의 다리는 탱고를 추고 있는 연인의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비스듬한 기둥이 남자고 다리의 데크가 여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위 두 사진을 유심히 보면 착한 사람한테는 어렴풋이 형태가 보인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거리에서 심심치 않게 탱고를 추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 다리 위에서도 아름다운 노을과 함께 탱고를 추는 아름다운 연인이 있었다.
산 텔모 시장(Mercado de San Telmo)
원래 실내에 있는 작은 규모의 산텔모 시장은 일요일마다 큰 규모의 플리마켓으로 확장된다. 각종 수공예품과 골동품, 옷과 카메라, 선글라스 등 집에 가져가고 싶은 물건이 너무 많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여행은 꼭 일요일 일정도 넣는 걸 추천드린다.
라 보카 (La Boca)
아르헨티나는 1900년대 초반에 곡물과 육류의 수출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발전된 나라 중에 하나였다고 한다. 그로 인해 부족한 노동력을 이민자들로 채우려 했고 이탈리아의 이민자들이 모여 살던 곳이 라 보카였다고 한다.
사진들을 보면 온통 보카 주니어스 축구팀의 유니폼색상이다.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유명한 보카주니어스 축구팀의 홈구장이 근처에 있었는데 축구 유니폼 파는 곳도 유독 많았다.
라보카는 축구강국 아르헨티나의 전설적인 축구선수인 마라도나의 고향이기도 하다. 건물 2층의 작은 발코니에는 월드컵을 들고 환호하는 마라도나가 많았은데 그들이 생각하는 축구와 마라도나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 메인 건물에 아무도 없었는데 최근에 위대한 가이드란 프로그램을 보니 메시가 월드컵을 들고 서있었다. 아르헨티나는 좋겠다.
가난한 이민자들이 선박수리를 하고 남은 페인트를 집에 칠하기 시작했는데 그 양이 충분하지 않아서 오늘날과 같은 다양한 색상으로 칠해졌다고 한다.
남아공 케이프타운의 보캅마을이 연상되었는데 다양한 색상이 주는 밝고 활기찬 느낌은 어렵고 힘든 분위기의 마을을 치유하는 큰 역할을 해왔던 거 같다.
엘 아테네오 그랜드 스플렌디드
(El Ateneo Grand Splendid)
원래는 극장으로 쓰이던 공간을 서점으로 바뀌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으로도 불린다. 객석으로 쓰였던 2,3층 공간에 화려한 조명을 장식해 놓아서 내부공간이 더 화려하게 느껴진다.
미켈란젤로 탱고 쇼(Michelangelo Tango Show)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스카이 다이빙 다음으로 기대했던 탱고공연을 보러 갔다. 사전에 블로그 검색을 통해 저렴한 가격으로 예매할 수 있다는 걸 알아서 시내의 티켓오피스에서 미리 예약했다. 공연은 저녁시간에 시작하는데 여러 업체들 중 우리는 5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미켈란젤로라는 곳에 가게 되었다. 우리는 저녁식사를 하면서 공연을 즐길 수 있는 표를 예매했는데 좋았던 리뷰들처럼 음식도 맛있었고 공연도 환상적이었다.
가지고 있던 옷들 중에서 제일 단정하고 그나마 격식을 갖췄다고 생각한 옷을 입고 갔는데 완벽한 정장차림의 신사들이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어서 조금 민망했다. 저녁식사는 코스요리로 나왔는데 리뷰의 추천 음식들은 실패가 없었다.
화려한 의상을 입고 화려한 조명이 비추는 무대에서 추는 탱고는 길거리에서 보는 탱고와는 차원이 달랐다. 바로 앞에서 엄청난 몰입감으로 공연에 빠져들었다. 댄서분들의 열정에 감탄하고 뒤에 라이브 연주자들의 실력과 싱어들의 노련함에 감동받았다. 별점 5개로 강추한다.
우수아이아 (Ushuaia)
9시간이나 연착으로 늦어진 플라이본디를 타고 우수아이아에 도착했다. 공항에 내려서 바깥공기를 처음 맡았는데 숨을 쉴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맑은 공기였다.
지구상에서 남극과 가장 가깝다고 알려진 도시이고 우리가 여행 중 처음으로 겪는 겨울이었다. 4월 말에 도착했는데 5월 1일부터 겨울시즌이 시작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겨울 패딩과 긴팔 옷들을 준비했다. 다행히 오픈채팅방에서 우리 같은 장기여행자들이 무료 나눔 하는 패딩이 있어서 얻을 수 있었다. 이미 여러 사람을 거쳐온 듯했고 나도 아르헨티나를 떠나며 나눔 했다.
여행하면서 가장 좋았던 숙소 중 하나였다. 우수아이아에서 머무는 동안 숙소를 두 번 옮겼는데 두 숙소 모두 온돌시스템이었다. 뜨끈한 바닥도 좋았고 특히, 첫 번째 숙소의 뷰가 너무 환상적이었다. 메인 도로에서 조금 뒤쪽으로 올라와야 했는데 높은 곳에 위치하다 보니 저 멀리 설산을 배경으로 우수아이아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드디어 파타고니아에 도착했다. 파타고니아 (Patagonia)는 남아메리카 남부에 위치하며, 아르헨티나와 칠레 양국에 걸쳐 있는 광활한 지역을 말한다. 파타고니아는 포르투갈출신의 탐험가 페르디난드 마젤란 (Ferdinand Magellan)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는데 남아메리카의 파타고니아를 관통하는 마젤란 해협의 그 마젤란이다. 한 번에 완주한 건 아니지만 세계최초로 지구 한 바퀴를 돈 최초의 세계여행자이다.
숙소에 짐을 놓고 점심을 먹기 위해 레스토랑을 찾다가 계단에서 넘어졌다. 겨울에는 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지 말라고 하는지 절실히 느꼈다. 시작부터 시퍼렇게 눈에 멍이 든 채 세상 끝 등대를 볼 수 있는 비글해협 투어를 하러 갔다. 남편한테 한 대 맞았다고 딱 오해하기 좋게 멍이 들어서 손을 꼭 잡고 다녔다.
웃으며 기념사진 찍고 웃어주는 씩씩한 와이프를 보며 많이 다친 건 아닌 거 같아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도상으로 현재위치를 보니 남극과 가장 가까운 지역이었다. 남극도 정말 가보고 싶었는데 시기도 맞지 않았고 얼핏 들은 엄청난 비용 때문에 다음 기회로 미련 없이 미뤘다.
배를 타고 바다 한복판 바위 위에서 쉬고 있는 가마우지와 바다표범들을 구경했다. 펭귄들은 남극으로 돌아가는 시즌이어서 구경하지 못했다. 배에 내부 좌석도 있었는데 다들 밖에 나와서 사진 찍느라 추운 줄도 몰랐다. 지리적으로 의미 있는 곳들을 몇 번 경험했는데 세상의 끝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이곳을 갔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티에라 델 푸에고 국립공원
(Parque Nacional Tierra del Fuego)
우수아이아의 관광지는 웬만하면 세상 끝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이번엔 세상의 끝에 있는 기차역에서 세상의 끝 기차를 타고 티에라 델 푸에고 국립공원 (Parque Nacional Tierra del Fuego)을 돌아보기로 했다. 왕복 한 시간 반정도 소요되는 프로그램으로 옛날 죄수들이 벌목과 물자운반을 위해 이용하던 기찻길을 이용해 관광자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세상의 끝 기차를 타고 시간이 너무 늦어서 다음날 다시 티에라 델 푸에고 국립공원을 찾았다. 오늘은 트래킹을 해보려고 마음먹고 나왔는데 부슬비가 내린다. 공기가 더 상쾌한 거 같고 사람도 많이 없어서 좋았다.
티에라 델 푸에고 국립공원은 파나메리카 고속도로의 종착점으로 고속도로에 속해있는 루타 3번 국도의 종점표지가 세워져 있는 포토스폿이 있다. 여행자들의 스티커가 유난히 많이 붙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북미의 알래스카부터 남미의 우수아이아까지 아메리카 대륙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종착지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겨울에 막 진입한 공원은 단풍과 설산이 어우러져 있었다. 우리 같은 초보자도 무난하게 트래킹이 가능할 정도로 길도 좋았고 부슬비 내리는 날씨와 적막함까지도 긍정적으로 느껴질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세상의 끝이 아니라 시작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땅끝 마을 우수아이아의 마지막은 킹크랩으로 장식했다. 원래 한국에서 먹을 수 있는 금액보다 많이 저렴하다고 해서 기대하고 찾아갔는데 많이 비쌌다. 먼저 문의한 다른 가게는 킹크랩이 없었고 한국인들이 많이 가는 가게도 장기간 문을 닫은 걸 보니 킹크랩 비수 기였던 거 같다. 그래서 그런지 가격이 한국이랑 큰 차이가 없었다. 우수아이아 여행을 시작하면서 눈에 멍이 들긴 했지만 완벽한 마무리였다.
엘 칼라파테(El Calafate)
우수아이아-리오 가예고스-엘 칼라파테 여정이 시작됐다. 리오 가예고스에서 4시간 동안 경유한 시간까지 합치면 22시간이 넘게 걸리는 이동이었다. 남미에서의 버스이동은 하루를 온전히 쓰게 되므로 시간과 비용의 발란스를 적절히 계획하여야 한다.
180도 누워서 갈 수 있는 좌석이 아니라서 밤새 뒤척이며 갔다. 미리 작성한 칠레 입국서류를 보여주고 칠레에 무사히 입국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칠레에 들어와 달리다 보면 바다 때문에 도로가 끊기는 곳이 나온다. 어떻게 넘어갈지 궁금했는데 버스에 탑승한 채로 배를 타고 반대편으로 넘어간다. 배에 승선한 후에는 내릴 수 있는데 바람이 너무 차가워서 잠깐 둘러보고 다시 탔다.
전날 새벽 세시에 우수아이아에서 출발해 다음날 새벽 한시쯤 엘 칼라파테 숙소에 도착했다. 트래블러라는 프로그램에 나왔던 린다 비스타 호텔이었다. 방송에 나오셨던 분은 딸 결혼식 때문에 한국에 가셔서 뵙지 못하고 원래 린다 비스타를 운영하셨던 주인분이 맞아주셨다.
다음날 아침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는데 덩치 큰 강아지들이 졸졸 따라다닌다. 지나가는 차만 보면 죽자고 달려들어서 그냥 우리를 따라다니게 하는 게 낫겠다 싶어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계속 데리고 다녔다.
우리는 그날 저녁 린다 비스타 숙소에서 만난 신혼부부와 함께 피츠로이 등반을 위해 일정을 함께하기로 했다. 네팔 히말라야에서 처음 만나 결혼까지 하고 신혼여행으로 남미를 돌고 있던 부러운 친구들이었다. 잠깐 얘기를 나누고 의기투합하여 내일 모레노빙하 미니트레킹투어도 함께 가기로 약속을 했다.
로스 글라시아레스 국립공원
(Los Glaciares National Park)
모레노 빙하는 로스 글라시아레스 국립공원 (Los Glaciares National Park)에 속해있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빙하이다. 과거에는 골짜기에 있는 빙하가 앞으로 밀려 나와 전진했었는데 현재는 기후온난화로 인해 후퇴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문제가 발생했다. 국립공원 안에 들어가려면 스노우 체인이 있어야 한다. 우리 렌터카에는 스노우 체인이 없다. 렌터카회사 직원이 빼먹었다고 한다. 결국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고 와이프는 빙하투어를 했고 나는 투어비용 30만 원을 날렸다. 지구반대편에서 이 빙하투어를 하려고 왔다는 걸 강조해 봐도 렌터카 이틀연장과 기름을 채우지 않고 반납하는 정도의 보상만 받을 수 있었다.
엘 찰텐(El Chaltén)
엘 칼라파테에서 엘 찰텐까지는 차로 3시간이 걸린다. 중간에 멋진 풍경이 나오면 멈춰서 구경도 하고 렌터카의 장점을 만끽했다. 빙하가 녹아 흘러내리는 강이라고 하는데 물의 색이 너무 예뻐서 차를 안 세울 수가 없었다.
중간에 레스토랑이 있어서 뭐라도 먹으려고 들어갔는데 영화에도 나온 유명한 레스토랑 겸 호텔이었다. 1905년에 미국의 유명한 탈옥수들이 은행을 털고 지나던 길에 이 호텔에서 한 달가량 머물렀다고 한다. 한쪽 벽에 그들의 사진과 수배전단이 붙어있다. 결국 칠레로 도망갔다고 하는데 우리가 달리고 있는 남반구에서 가장 긴 Ruta40을 따라가면 볼리비아까지 연결된다.
엘 찰튼으로 가는 길 도로에서 피츠로이를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눈이 너무 내려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하얗게 덮인 드 넓은 파타고니아땅에는 과나코들만 뛰어다니고 있었다. 도로 양 옆에 울타리가 쳐져 있었는데 이따금씩 과나코들 사체가 널려있어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약 세 시간을 달려 드디어 엘 찰튼에 도착했다. 세계 3대 미봉이라 불리는 피츠로이(Fitz Roy)를 등반하기 위한 관문이다.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등산장비 렌털샵을 갔다. 우리가 오면서 봤던 눈이 그해 첫눈이라고 해서 긴장했다. 고무로 된 아이젠과 금속 아이젠이 있었는데 렌털샵 직원은 고무로 된 아이젠도 괜찮을 거 같다고 했지만 우리는 금속 아이젠을 택했다. 그때 매장에서 만난 중국여자분은 고무 아이젠을 골랐는데 엘 칼라파테에 돌아가는 길에 만났을 때 다리 깁스를 하고 있었다.
일명 불타는 고구마를 보려면 새벽 4시에 출발해야 한다. 피츠로이 산봉우리가 떠오르는 태양빛이 빨갛게 물들어 고가마가 불타는 형상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도 등산 한번 해본 적 없는 우리가 무슨 생각으로 저런 무모한 도전을 하게 됐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뽀득거리는 눈을 밟으며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 속을 계속해서 걸었다. 우리가 선택한 코스는 Laguna de los Tres 루트로 왕복 약 22km 거리이다. 보통 왕복 7~9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는데 쌓인 눈이 정강이까지 푹푹 빠져 더디데 전진하다 보니 총 11시간이나 걸렸다.
계속 평지 같은 길을 걷다가 마지막 1km가 죽음의 경사로다.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싶었다. 그곳이 계단인 줄도 나중에 내려오고 나서 알았다. 눈이 너무 쌓여있어 내가 밟고 있는 곳이 계단인지 나무인지, 땅인지 절벽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보다 앞서 등반한 어느 한 발자국을 쫓아 계속 올라갔다. 나중에 올라가서 보니 첫눈이 내린 피츠로이를 촬영하기 위한 베테랑 산악인이었다.
봉우리 끝이 점점 붉게 물든다. 해가 떠오르고 있는데 아직 포인트에 도착하려면 한참 더 가야 한다.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푹푹 빠지는 눈밭을 한발, 한발 나아간다.
이때 우리의 다음 목적지로 생각했던 칠레의 파타고니아 토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를 포기하기로 했다.
참 불가사의한 일이다. 세계여행을 하며 히말라야와 킬리만자로도 포기한 우리가 왜 지금 이곳에 있는지 새삼 놀라웠다.
보통 정상에 도착하면 성취감을 느끼며 환호하기 마련인데 그럴 힘이 없었다. 고어텍스 신발만 믿고 발목양말을 신어서 발이 다 젖었다. 돈아낀다고 등산 스틱도 하나씩만 빌려서 너무 힘들었다. 헤드렌턴 충전도 끝까지 안 해서 중간이 꺼져버렸다. 핸드폰 플래시를 켜서 올라가느라 한 손을 못쓰니 더 힘들었다. 총 11시간 동안 46,000보를 걸었던 엉망진창 우당퉁탕 피츠로이 등산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시작해 세상의 끝 우수아이아를 거쳐 모레노 빙하가 있던 엘칼라파테와 피츠로이를 등반한 엘 찰튼까지, 24일간의 아르헨티나 여행이 끝이 났다. 아르헨티나를 브라질에 이어 여행했는데 붙어있는 두나라지만 여행하면서 느낀 감정이 참 많이 달랐다. 브라질은 활동적인 여름이었는데 아르헨티나는 정적인 느낌의 겨울이었다.
혹독할 것 같았던 겨울의 아르헨티나는 오히려 가장 따뜻한 기억을 안겨주었다. 붐비지 않는 풍경 속에서 느린 시간을 보내고 싶은 이들에게, 나는 주저 없이 이 계절의 아르헨티나를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