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이용할 때 목적지에서 두, 세 정류장 전에 내려 일부러 걷는 경우가 더러 있다. 물론 건강을 위해서이다. 그렇게라도 하루를 두 다리로 움직였다는 자기 확신을 가질 때 비로소 안심하게 된다.
세 달 전쯤이었을 것이다. 그날도 건강을 위하여 미리 버스를 내려 걷다가 우연히 독특한 집에 눈길을 주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독특한 집이 아니라 독특한 문이라고 해야 옳다. 길에서 볼 때 집의 형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대문의 안쪽으로 좁은 입구를 돌아 집을 지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사실 그 대문이라는 것도 흔해 빠진 철 대문이라 독특할 것도 없지만 단 한 가지, 그 문을 독특하게 만드는 것이 있으니 한쪽 문짝에 문짝의 크기에 버금가는 사각 거울이 마치 대문과 한 몸이었던 것처럼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나가는 사람이 많은 대로변이라 남의 집을 노골적으로 바라보기도 민망해서 거울을 문짝에 매달아 놓았는지, 용접을 했는지는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속으로 "집주인은 배려심이 참 깊은 사람이구나, 아마도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 거울의 존재 이유에 대하여 바삐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매무새를 다듬을 수 있도록 한 집주인의 배려라고 짐작했던 것이었다.
혹은 지나친 비약일런지는 모르지만 "너 자신을 알라."는 식으로 네 꼴을 보라는 타인과 세상에 대한 집주인의 비아냥에 목적이 있을 수도 있으리라.
아니면 집주인이 세상의 명리는 뒷전으로 고고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 속된 세상을 거울로 되비춰 자신에게로 침범치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다소 어처구니가 없는 생각들이지만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데에는 돈도 들지 않고 별다른 제약도 없다. 따지고 보면 문학과 예술도 일면으로는 이런 상상의 소산이다. 그러니 이런 상상을 하는 것도 내 자유다.
마침 지난주 중에 차를 타고 그곳을 지나갈 일이 있었다. 그런데 내 생각처럼 초로의 남자가 걸레에 비눗물을 적셔서 그 거울을 닦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세상과 등진 채 고고하게 살아가는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차를 타고 있지 않았다면 그 남자에게 대문에 거울을 단 이유라도 물어보았겠지만 그러지를 못했다.
한편으로는 집주인으로부터 거울에 관한 것을 확인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거울에 대한 나름의 상상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기에.
'거울을 닦는 남자', 초로의 남자를 이 상상의 언어 영역에 머물게 하는 한 다채로운 (문학적) 상상이 가능하고 상상의 영역 속 주인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상상력으로 빚어낸 가공의 공간이 현실보다 빛나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사실을 경험이 알려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