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점으로 우리나라도 국제화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 사회학계의 중론입니다. 올림픽 유치 당시 신군부의 치적 쌓기라는 이유로 반대도 많았지만 결론적으로 88 울림픽은 우리나라의 세계화에 큰 동력으로 작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실제 외국인들에게 한국전쟁으로만 기억되던 한국이 올림픽으로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이야 코로나로 인해 외국인의 발길이 끊기다시피 되었지만 수도 서울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생활하는 외국인의 숫자가 조선족 동포를 제외하고서도 만만찮게 되었습니다. 서울만큼은 아니지만 지방에서도 외국인은 흔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한국인과 결혼해서 이 땅에 정착한 외국인까지 고려한다면 우리나라 구석구석에 외국인의 발길이 닫지 않는 곳이 드물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지방에서 외국인을 본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남쪽의 작은 도시에서 성장기를 보낸 제가 외국인을 처음 접했던 것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습니다. 다니던 초등학교와 이웃한 가정집에 큰 코에 노랑 머리카락을 가진 외국인 두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교시가 끝난 휴식 시간이었는지, 점심시간이었는지는 정확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학급 친구들과 어울려 가정집 옥상에 올라온 두 외국인을 동물원 동물 구경하듯(아 참, 그 도시에는 동물원이 없어 각종 야생 동물을 책으로난 접했지만) 신기하게 쳐다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신기하기는 그 외국인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우리를 보고 사진을 찍기도 하면서 자기들끼리 무어라 대화를 나누기도 했었습니다. 또 한 번 외국인을 접한 것이 중학교 진학 후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와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였습니다.
그 이후로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외국인을 만났던 기억이 없습니다. 물론 대학 입시 때문에 생활 반경이 좁아진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많아지다 보니 방송에서 외국인들을 접할 기회도 많이 늘어났습니다.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외국인들의 한국 생활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수준을 넘어 기획사에 소속되어 전문 방송인으로 활동하는 외국인들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명절 연휴에 편성되곤 했던 외국인 노래자랑이나 외국인 장기자랑에서 외국인을 볼 수 있었으니 격세지감이 크게 느껴집니다.
명절에 특별 편성되었던 프로그램에서 외국인들이 가장 즐겨 불렀던 우리 노래가 2인조 혼성 듀엣 라나 에 로스포가 불렀던 '사랑해'라는 노래였습니다. 이 노래가 비단 외국인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사랑했던 그 시절의 국민가요였지만 이별의 아쉬움을 노래한 이 노래가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애창곡이 된 이유에는 사랑을 주제로 한 노래라는 것과 함께 무엇보다도 쉽게 익힐 수 있는 단조로운 멜로디에 친밀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사랑받는 노래는 단순해서 접근성이 용이해야 한다는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쉽게 부를 수 있다면 명곡이 되는 것이고, '사랑해'라는 노래는 그런 면을 확실하게 지닌 노래였습니다.
라나 에 로스포(Rana et Rospo, 개구리와 두꺼비)는 뚜와에무아와 함께 1970년대 초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혼성 2인조 듀엣입니다.
'사랑해'는 라나 에 로스포의 1집 음반에 수록된 노래로서 남성 리더 한민과 은희가 함께 불러 애창되었습니다. 라나 에 로스포는 여성 멤버가 13명에 이르기까지 교체되면서 오래 명맥을 이어갔지만 1대 여성 멤버로 '사랑해'와 '꽃반지 끼고'를 불렀던 은희와 3대 여성 멤버로 '여고 시절'을 불렀던 최안순이 솔로 가수로서 인기를 지속한 만큼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잊을 수 없는 음반을 라나 에 로스포는 1971년에서 1973년에 걸친 전성기의 끝 지점에서 강인원을 여성 멤버로 해서 남기게 됩니다.
은희가 참여해서 부른 '사랑해'가 한민의 소박한 화음에 은희가 지닌 슬픈 음성이 아련하게 들리는 매력이 있다면, 강인원이 참여해 부른 '사랑해'는 보다 세련된 편곡에 강인원의 차분하고 울림이 깊은 음색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강인원이 부른 버전이 음악적으로 성숙되고 세련된 면이 있지만, 은희가 부른 버전이 지닌 순수함과 원전성을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듣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