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비극에 투영된 흑인의 불가시성

- 리처드 라이트의 '미국의 아들'을 읽고

by 밤과 꿈

TV에서 1992년의 LA 폭동을 말하는 것을 보고 새삼 미국 흑인의 정체성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우리가 인종 갈등으로 단순화해 이해하는 흑백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이해를 필요로 하고, 미국 흑인의 정체성이라는 주제는 미국의 흑인 문학이 줄곧 천착해온 것이다.

흑인의 정체성 문제를 역사와 심리적인 면에서 접근한 수작으로 먼저 기억되는 흑인 문학으로는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의 '빌러비드(Beloved)'라는 장편소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노예 신분의 대물림을 끊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딸을 죽여야만 했던 여성 노예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빌러비드'는 토니 모리슨 특유의 시적인 문체와 상상력이 빛을 발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이 뛰어난 문학성을 지닌 작품임에는 틀림없지만 제삼자인 외국인의 입장에서 보다 용이하게 흑백 문제의 근본적인 이해에 접근할 수 있는 문학 작품으로는 리처드 라이트(Richard Wright)의 장편소설 '미국의 아들(Native Son)'을 놓칠 수 없다.

리처드 라이트는 미국 남부의 미시시피 농장 지대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 가족이 북부로 이주하게 된다. 그의 소설은 이러한 자신의 체험을 반영, 남부의 차별을 떠나 북부로 가서 도시 노동자로 편입된 흑인들이 도시의 빈곤층을 형성, 마찬가지의 차별 속에서 갈등을 겪으면서 발생하는 인종적, 사회적 문제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리처드 라이트의 대표작인 '미국의 아들' 또한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되었지만 새롭게 도시의 빈민이 되었던 흑인의 역사와 미국 사회의 모순을 파헤친 흑인 문학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북부의 대도시 시카고, 소설의 주인공 비거 토마스는 청소년기에 소년원에 가기도 했지만 비교적 평범한 청년으로서 그 나이의 흑인 대부분이 그렇듯이 별로 하는 일이 없이 빈둥거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흑인에게 우호적인 상류층 백인 돌턴 가문의 운전기사로 일하게 된다. 눈이 먼 맹인인 돌턴 부인은 유색 인종에게 관심이 많은 인물이다. 특히 당돌할 만큼 개방적인 성격으로 진보적인 사회운동에 가담하고 있었던 딸 메리는 흑인인 비거를 정치적 신념으로 스스럼없이 대하지만 비거에게는 그녀의 행동이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어느 날 술에 취한 메리를 태우고 집에 돌아온 비거는 몸을 가누지 못하는 메리의 부탁으로 그녀를 부축, 침대에 눕히는데 하필이면 그때 돌턴 부인이 메리의 방에 찾아온다. 다행히 돌턴 부인은 맹인이라 비거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흑인으로서 불필요한 오해로 낭패를 당할 수 없었던 비거는 인기척을 내지 못하도록 메리의 입을 막는다.

메리는 질식하여 목숨을 잃고, 아무도 모르게 시신을 처리하기 위해 집 안의 대형 난방로에 시신을 넣어 소각한다.

그러고서도 비거는 태연하게 그 집에서 운전기사의 일을 계속하지만 결국 엽기적인 범행은 발각되고, 이 사건으로 백인들의 분오가 폭발, 흑인을 대상으로 한 증오 범죄가 빗발치게 발생한다. 이런 와중에서 인권 변호사의 조력으로 살의가 없었던 사실을 밝힐 기회가 있었지만 비거는 사형 집행 하루 전 감방으로 찾아온 변호사 맥스의 조력을 거부하고 생의 마지막 밤을 보낸다.

이때 변호사 맥스를 향해 외치는 비거의 말이 인상적이다.

"죽일 생각은 없었어요...... 그렇지만 내가 살인까지 하게 만든 것, 그게 바로 '나'입니다! 살인까지 하게 만들다니 그것은 내 안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던 게 분명해요! 살인까지 할 정도로 그것을 지독히 절실하게 느꼈나 봐요......"

생의 마지막 시간에 평생을 자기혐오와 정체성에 대한 인식 없이 살아온 비거가 흑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깨닫는 순간이다. 이처럼 이 소설은 한 흑인의 주체적인 자각으로 끝이 난다.


1940년에 출간된 '미국의 아들'은 당시 미국 사회의 한 구성원들인 흑인들이 처한 현실을 비거라는 인물을 통해 전형으로 제시함으로써 보편성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다소 과격하고 급진적인 소설이지만 흑인 문학의 신기원을 연 소설로서, 고전으로서 평가받는 이유도 그 점에 있을 것이다.

끝으로 미국 흑인들이 겪는 정체성 부재의 원인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미국의 흑인들이 미국에 정착하게 된 사실에 그들의 자발성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그들은 그들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삶의 터전에서 뿌리 뽑혀 미국이라는 낯선 땅에 수동적으로 이식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미국의 역사를 통해 백인에 비해 열등한 존재로서의 흑인이라는 공식에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바뀌어졌지만 오랫동안 세상의 중심은 백인이었다. 뛰어난 화가, 작가, 과학자는 모두 백인이었고, 노벨상도 마찬가지. 교육의 불평등이 가져온 현실은 흑인들의 마음 한구석에 자기혐오를 심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이유로 미국의 흑인들은 지금의 미국을 형성한 하나의 중심이면서도 미국 시민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지는 것에 어색하고 자기 정체성의 확립에 어려움을 겪는, 이른바 '불가시성'의 영역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흑인들이 처한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 리처드 라이트의 '미국의 아들'이다.

소설의 제목에서 리처드 라이트는 "우리 흑인도 미국인이다."라는 자명한 사실을 항변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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