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를 이은 슬픔을 포용하는 더 큰 슬픔의 공간

- 최은영의 장편소설 '밝은 밤'을 읽고

by 밤과 꿈

2013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젊은 작가 최은영이 최근 첫 장편소설 '밝은 밤'을 출간했다. 최은영은 등단 이후 한국일보문학상, 젊은작가상 등 문학상을 수차례 수상하여 문단으로부터 줄곧 작가적 역량을 인정받아왔고, 이미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 등 두 권의 소설집을 통해 독자의 주목과 지지를 받고 있던 터, 그만큼 작가의 첫 장편소설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리고 이 소설은 다음과 같은 면에서 그 기대를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이 담고 있는 서사의 넓이와 깊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의 화자인 지연은 몰래 바람을 핀 남편, 그러니까 전 남편과 최근에 헤어진 32살의 이혼녀이다. 이렇게 말하면 흔하디 흔한 여성 문학, 그러니까 페미니즘을 주제로 하는 소설쯤으로 단순화시켜 바라보기가 십상이다. 물론 이 소설도 여성 작가의 시선으로 여성의 삶과 오랜 상처를 다루고 있는 페미니즘 문학의 범주에 속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이 유사한 내용의 다른 소설과 구별되는 것은 여성으로서의 삶과 상처를 세대를 이어 내려오는 역사성으로 서사를 확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연은 새로운 직장이 있는 회령으로 이사를 간다. 회령은 지연에게 낯선 곳이 아니라 "사찰에서 나는 향 냄새, 계곡의 이끼 냄새와 물 냄새, 숲 냄새, 항구를 걸어가며 맡았던 바다 냄새, 비가 내리던 날 공기 중에 퍼지던 먼지 냄새와 시장 골목에서 나던 과일이 썩어가는 냄새, 소나기가 지나간 뒤 한의원에서 약을 달이던 냄새......"가 떠오르는, 말하자면 회령은 냄새로 연상되는 어린 시절에 잠시 머물었던 곳이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는 외할머니라는 존재가 함께 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머물러 있던 외할머니를 회령에서 재회, 만남을 거듭하면서 둘 사이의 어색함도 점차 줄어간다. 외할머니와 손녀 사이의 어색함은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관계가 오래 단절된 결과였다.

이처럼 지연에게 외할머니가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갇힌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은 외할머니와 어머니 사이에는 서로의 입장 차이에서 나타나는 상처가 깊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지연과 어머니 사이에도 지연의 이혼과 관련한 불편함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내려온 회령에서 지연은 외할머니와 만남을 거듭하면서 외증조모와 외할머니에 대하여 새로운 사실들을 알아간다. 백정의 자식으로 태어나 사회로부터 천대받던 외증조모는 양민의 신분인 외증조부와 결혼, 양민이 되었으나(이때가 태평양전쟁이 절정으로 치닫던 일제 치하의 시기로 법적으로는 신분제도가 사라졌지만 일상에서는 유지되고 있었나 싶다. 물론 보이지 않는 차별은 상존하고 있었겠지만 아마도 1940년대일 그 시대에 백정이라 천민을 뜻하는 검은 표를 옷에 달고 생활한다는 것에는 의문이 있다. 소설의 완성도와는 상관이 없겠지만 정확한 취재에 의한 기술이기를 바란다.) 집안과 주변으로부터 표 나지 않게 차별을 받아야 했던 외증조모는 결혼 때와는 달리 자신의 처지에도 냉담한 외증조부로부터도 상처를 받았다. 식민지의 젊은 처녀를 위안부로 마구 끌고 가던 당시 외증조모는 외증조부와의 결혼으로 이를 피할 수 있었지만 대신 병든 어머니를 두고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어머니를 버렸다는 죄책감 때문에 남편과 시댁의 드러나지 않는 무시와 멸시를 견딘다.

한편 지연의 외할머니 영옥은 아버지, 즉 지연의 외증조부의 뜻에 따라 이북 출신의 남자와 혼인하지만 북쪽에서 이미 결혼을 한 남편의 원래 부인이 찾아와 남편을 빼앗긴다. 그리고 외할머니와 딸(지연의 어머니) 사이에는 법적으로 호적상의 어머니는 따로 있는 어색하고 불편한 관계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지연은 비로소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불편한 사이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소설에서 3대에 걸친 각자의 상처가 어떻게 서로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로 인한 각자의 사이에는 끊을 수 없는 가족 간의 사랑이 자리 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도 있다. 지연이 겪은 남편의 바람에 이은 이혼이라는 상처가 중혼에 의한 상처를 가진 외할머니와 맞닿아 있음으로 해서 세대를 이어주는 이해와 관계의 회복을 확인하고,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서로가 억지로 외면하고 있던 사랑의 대면에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100년의 시간을 담아내는 중심 서사 외에도 이 소설에는 서사를 뒷받침하는 인물과 심리적 얼개가 마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특히 혼란한 시대에 외증조모와 특별한 우정을 나누었던 새비 아주머니와 외할머니와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희자의 존재는 이 소설의 긍정적인 힘을 가능케 하는 요인일 것이다.


1980년대 이후로 우리 소설문학의 힘이 약해졌다는 말이 있다. 사실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기 이전에는 독재와 이를 가능케 한 분단에 대한 인식이 우리 소설에 깊이를 주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담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민주화 이후 시대에 대한 부담이 사라지고 대부분의 소설이 사적 영역에 머물고 있었던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금년의 젊은작가상 본심에 오른 일곱 작품이 모두 여성 작가라는 사실도 이런 현실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던 중 만난 이 소설의 깊은 서사가 반갑다.

이 소설이 3대에 걸친 여자들의 상처와 극복을 말하는 페미니즘 문학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지만(이 소설에서 작가는 증조모, 할머니와 같이 외가를 뜻하는 '외'자를 붙이지 않는다. 그것이 편의상의 선택인지, 페미니즘적 의미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해를 위해 덧붙였다.) 그것에 세대를 거듭한 역사적 성격을 더하면서 페미니즘이라는 한계를 뛰어넘는다.

"슬픔을 위로하고 감싸주는 것은 더 큰 슬픔의 힘 이리니. 작가가 창조해낸 특별한 공간 '회령'에서 는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선배 작가 오정희의 말처럼 이 소설은 슬픔을 위로하고 감싸주는 더 큰 슬픔이 가능한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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