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우리에게 기회일 수 있다

- 밤과 꿈의 신앙 에세이(1)

by 밤과 꿈

최근 들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그것은 교회가 우리 사회에서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치기보다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비치어지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200여 년의 시간이 흐른 만큼 시대의 모습도 전혀 다르고, 기독교의 확장성과 영향력이 초대교회와는 비할 바가 아니라서 초대교회의 면면들을 오늘에 재현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렇지만 초대교회가 지녔을 교회와 예배의 본질, 궁극적으로는 신앙의 본질적인 모습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종교의 발생 이전에 먼저 신앙이 있었다. 그리고 종교는 신앙을 양식화(樣式化)한다. 가톨릭 교회에는 가톨릭의 양식(style)이, 개신교회에는 개신교의 양식이 있다. 바꾸어 말하면 신앙이 종교로서 조직화되고 신학 체계를 갖추게 되면, 신앙의 본래 모습에 종교적 색깔이 덧입혀져 어느 정도의 왜곡이 불가피해진다고 할 수 있다.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밀라노 칙령'이 공표, 기독교는 오랜 박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막강한 제국 로마의 국교로 공인됨으로써 이후 기독교는 막강한 제국 로마의 국교로 공인됨으로써 이후 기독교가 온 세계로 퍼져나가는 교두보를 놓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긍정적인 사실에 반하여 권력의 통합을 꿈꾼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의도에 따라 교회가 세속권력에 버금가는(중세시대에는 세속권력을 능가하게 되는) 권력을 구가, 교회의 정치화를 초래했다는 사실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다.


교회에 있어서 신학적 도그마(dogma, 규범)가 집약되어있는 것이 바로 전례, 또는 예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권력화 된 교회는 이에 권력의 표징을 포함하게 된다. 가톨릭 교회는 성사(聖事)와 미사 등 전례를 규범화함으로써 교회와 사제의 권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한편 종교개혁으로 새로운 믿음의 길을 연 개신교는 개교회주의와 함께 예배에 일상적인 성찬을 '말씀'으로 대체함으로써 교황을 중심으로 한 교회 권력으로부터 탈피, 믿음의 근본인 성경 말씀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서 한 가지 우려스러운 것은 말씀 자체가 권위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의 권위가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자칫 예배의 본질을 흐리게 한다.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현현인 말씀은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으로, 예배자의 진정한 자세가 말씀에 우선한다.

말씀이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의 능력에 편향되는 현상은 교인의 특정 교회로의 쏠림을 불러오고 이는 교회와 교계에서 또 하나의 권력을 낳는다. 그리고 이렇게 권력화 된 교회는 부패한다. 사회적으로 물의가 되었던 대형 교회의 문제가 이에 기인한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성장 제일주의는 비단 대형 교회 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교회 전체가 시급하게 지양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만나는 대형 교회의 문제가 이에 기인한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교회와 예배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의 단초(端初) 신학자 로버트 뱅크스(Robert J. Banks)가 고증에 따라 쓴 '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뱅크스는 우연히 로마의 유대인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예배에 참석하게 된 푸블리우스라는 가상 인물의 시선을 통해 초대교회의 예배 모습을 독자에게 전하고자 한다.

뱅크스가 묘사하는 초대교회의 예배는 "모든 것이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졌고", 또한 "모든 것이 아주 단순하고 실제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방인인 푸블리우스의 눈에는 초대교회의 예배가 전혀 "종교적 격식에 메이지 않는 모임"으로 보인다.

우리는 지난 기독교의 역사를 통해 우리의 신앙을 이상화하고 거룩한 것으로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을까. 우리는 때때로 교회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십자가를 내려 우리의 가슴에 아프게 품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얼마나 신앙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는가를 살필 필요가 있다. 지나치게 형식이 흥하면 이에 본질이 가려진다. 예배가 일면으로는 교회 권력의 강화를 위한 측면이 있다. 그래서 조지 폭스가 창시한 퀘이커 신앙 공동체에서는 예배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퀘이커 교가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에 반하여 생긴 공동체이므로 당연한 말이다. 퀘이커 교와 같이 극단적인 태도에 동조할 수는 없지만 지나치게 예배 형식을 장식하는 것은 본질을 가리게 될 것이다.

지난 200여 년의 기독교 역사가 신앙의 지평을 넓힌 시간이었다면, 앞으로 우리의 시선은 보다 신앙의 본질을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를 위해 교회의 위기라고 이때야말로 지혜와 명철을 모아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코로나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금이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이 고난을 하나님께서 주신 연단(鍊鍛)이라고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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