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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과 꿈 Mar 29. 2022

고난은 신앙의 본질이다

- 밤과 꿈의 신앙 에세이(10)

 16세기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성서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다윗을 꼽았다. 그 이유는 이른바 신학함의 본질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학을 한다고 말할 때, 신학의 본질은 무엇일까? 루터는 신학자를 만드는 세 가지 요건을 이야기하면서 첫째는 기도, 둘째는 말씀과 묵상이라고 했다...... 그는 마지막 요건을 시험 혹은 고난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것이 신학자를 만드는 가장 핵심적인 것이라고 했다. 루터는 참된 신학, 참된 성서 해석은 기도나 말씀 묵상이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서, 번민과 고뇌와 절망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다윗이 가장 뛰어난 신학자인 이유는 그가 일생 동안 고난 받는 삶을 살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신학서인 시편을 썼기 때문이라고 했다.

 신학자 최종원 교수의 '초대 교회사 다시 읽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초대교회의 뛰어난 인물인 아타나시우스를 설명하면서 언급한 내용이다.

 325년 니케아에서 열린 공의회는 삼위일체 신조를 공식적인 신학으로 공인하고, 예수의 신성을 부정했던 아리우스 파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그러나 아리우스 파는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고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비호를 받아 6세기에 이르기까지 3백 년동안 기독교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6세기에 이르러 서방교회, 즉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황의 권위가 정착되었지만, 동방 교회의 신학은 여전히 아리우스 파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삼위일체 신도를 신봉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고,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아타나시우스라는 신학자였다.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 파를 지지하는 세속 권력에 의해 여섯 차례에 걸쳐 변방으로 추방되지만, 아타나시우스와 지지자들은 핍박에 맞서기보다는 묵묵히 감수하면서 고난의 시기를 깊은 영성에 이르는 기회로 생각했다. 

 그렇게 아타나시우스는 로마라는 세속 권력과 결탁, 세속화한 아리우스 파에 타협하지 않고 기꺼이 고난을 택해 세상적인 편안과 권력을 멀리하는 수도원 신앙의 기초를 닦았던 것이다.


 최종원 교수는 같은 책에서 기독교의 역사를 볼 때 교회가 탄압과 같은 고난 중에 있었을 때 오히려 교회는 신앙적으로 강해질 수 있었다고 하면서 초대교회의 모습에서 그 예를 찾았다.

 그러니까 초대교회가 로마의 탄압을 견디어 내는 순간에야말로 교회는 결속하고 신앙은 강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었을 때 이미 기독교는 탄압 가운데에서도 강력한 종교로 성장, 공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거대한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제국의 정치 이데올로기와 야합하여 세속화가 되었고, 이는 곧 신앙의 약화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가 외형적으로 확장되어 번성할 때 오히려 교회는 분열되었다.


 흔히 현대 기독교의 문제점을 말하면서 초대교회로 되돌아갈 것을 주창하는 소리가 많아진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형성되고 기독교가 유럽에 뿌리를 내리는 과정은 교회 분열의 역사에 다름이 아니다. 기독교가 종교로서 합법화되는 것을 넘어 국교가 되었다. 당시의 시대상으로 기독교가 국교가 된다는 것은 로마 시민이면 누구나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뜻했다. 이는 개개인이 가진 신앙의 깊이에 차별을 가져왔고, 이에 공인 이전 박해를 받았던 시절로 기독교 신앙을 정화하고자 하는 신앙 결사체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수도원 운동이었다. 수도원은 제도화된 교회 조직의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였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조직이었지만 신앙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택하고 조직화된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된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교회가 조직화되고 교리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이단의 정죄가 많았는데, 먼저 교리를 달리했던 소수가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또한 세속화된 교회를 떠나 신앙의 순결을 지키려다 이단으로 정죄된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교회사를 볼 때 기독교의 역사에서는 교회가 신앙적으로 위기에 빠질 때마다 신앙을 회복하고 정화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지금은 가톨릭 교회가 개신교회를 형제로 인정하지만 종교개혁 당시 개신교 또한 가톨릭의 입장에서는 이단이었다. 만일 개신교가 가톨릭과의 오랜 갈등에서 생존하지 못했다면 교회사에서는 또 하나의 이단으로 남았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길지 않은 기독교의 역사에서 기독교는 가톨릭과 개신교 공히 자랑스러운 역사를 형성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간 역사만을 자랑스러워 할 수 없는 것이 한국 교회(내가 개신교도이므로 가톨릭 교회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입장이 아닌지라 여기서 한국 교회라 함은 개신교를 의미한다)에 세속화가 도를 넘어섰다는 것이다. 일일이 언급하지 않아도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사실이다.

 나는 한국 교회의 세속화(심하게 말하자면 타락)가 교회가 감당해야 할 고난을 외면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한국 교회는 1970년대 국가의 산업화 과정과 더불어 성장제일주의의 길을 택해 비대해졌다. 그러나 외적인 성장을 따라가지 못하는 신앙의 깊이, 목회자의 자질 문제로 한국 교회는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

 어쩌면 이 순간이야말로 황폐한 땅에서 수도원을 열고 실천하는 신앙을 찾아가는 신앙 결사가 필요한 때일지도 모른다. 교회는 예수의 십자가 보혈로서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렇다면 신앙의 본질은 고난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2022년 사순절에 해보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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