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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예찬(禮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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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꿈
Nov 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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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을 곁에 두고 듣는 라디오가 두 대 있다.
AR 스피커 설계로 유명한 헨리 크로스가 타계하기 전에 유작으로 남긴 '티볼리 오디오 모델 원'이라는 모노 라디오가 그것이다.
뛰어난 디자인과 진공관 라디오를 연상케 하는 온기 있는 음색이 매력적인 라디오다.
지금은 흔하게 볼 수 있는 라디오이지만 국내에 처음 수입되었을 당시 한 대당 20만 원을 주고 구입한 라디오를 싫증 내지 않고 잘 사용하고 있다.
그래도 라디오는 라디오일 뿐.
본격적인 오디오의 음향을 기대할 수는 없다.
라디오의 빈약한 사운드가 오히려 장점이 될 때가 있다.
하나의 프리 앰프에 두 대의 파워 앰프와 두 대의 스피커를 구성, 진공관이 뿜어내는 따뜻한 음색으로 대편성과 소편성을 구분하여 음악을 듣고 있다.
외국의 유명한 브랜드도 아니고 앰프와 스피커 모두 국내의 장인이 수공으로 제작한, 소박한 시스템이지만 욕심 없이 만족하게 음악을 듣고 있다.
내 기준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리를 내는 기특한 녀석들이다.
그러나 이 오디오 시스템으로 듣는 음악보다 빈약한 라디오로 듣는 음악이 더 끌릴 때가 있다.
본격적인 오디오로 음악을 감상할 때는 마치 연주회장에서 음악을 들을 때와 같이 집중해서 음악을 듣게 된다.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잔뜩 볼륨을 올리게 된다. 아내의 눈치를 보면서.
음량은 어떻게 통과하더라도 열심히 음악을 듣고 있는 사람에게 이것저것 시키는 것은 왜 그렇게 많은지.
그렇게 한 번 집중해서 듣던 음악을 놓치면 김이 샌다.
뿐만 아니라 제대로 음악을 감상하려면 음의 정위감이나 음장감의 점검 등 신경 써야 할 것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라디오는 FM 주파수를 맞추고 볼륨만 올리면 그뿐, 특별히 신경 써야 할 것이 없다.
입체감 없는 평면적인 음향이지만 공간을 장악하지 않는 것이라서 음악을 들으면서도 다른 일에 몰두할 수 있다.
그야말로 차 한 잔 마시면서 편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이 라디오라는 물건이다.
한 가지 더하자면 라디오는 추억이 깃든 물건이다.
지금처럼 고가(?)의 라디오는 아니지만 국산 금성 AM 라디오로 듣던 '전설 따라 삼천리'라는 프로그램을 잊을 수 없다.
밤 10시면 "청소년 여러분, 밤이 깊었습니다."하고 흘러나오던 청소년 계도 멘트의 쓸쓸함도 잊을 수 없다.
좀 더 커서는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음악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렇게 라디오에는 지나간 시간의 추억이 묻어 있다.
나는 두 대의 라디오를 침실과 서재에 두고 편하게 음악을 듣는다.
세월의 때가 묻어 호두나무와 단풍나무 원목의 색감이 탁해졌지만 작은 몸체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만큼은 변함이 없다.
이처럼 어느 값비싼 오디오도 줄 수 없는 편안함에 더하여 지나간 시간의 추억까지 덤으로 주는, 그것이 라디오가 가진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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