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자락에서 예쁘고 아담한 어린이집을 만난다. 어린이집 안에서는 때 묻지 않은 생명들이 놀고, 먹고, 쉬고, 때때로 낮잠을 자고 있다는 생각이 절로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한다. 어린아이들의 주체 못 할 에너지가 너무 좋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천방지축인 아이들은 어른에게는 성가신 존재일 수도 있다. 어린아이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시선은 결혼을 해서 자신의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는 과정에서 바뀐다고 한다. 그렇지만 제대로 떼를 부린 기억이 없고 몸이 아파 병원 출입조차 한 번도 없었던, 비교적 키우기에 수월했던 딸 한 명만 키웠던 나는 심하게 나대는 사내아이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흔히 자식이 결혼, 손주가 태어나면 더욱 어린아이를 좋아한다지만 딸이 아직 미혼이라 그 이유로 아이를 좋아할 입장이 아닌 데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 아이들을 바라보는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어쩌면 나는 어린아이들의 넘치는 에너지를 질투까지는 아니더라도 많이 부러워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린이집에서 도로 건너편으로 지척에 한 종중의 묘지가 있다. 조선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종중 선대의 묘지에는 수백 년 전에 스러진 생명들이 잠들어 있다. 그리고 길 건너에는 어린 생명들이 벅차게 생명력을 발산하고 있다. 생과 사가 절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 공간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어디든지 삶과 죽음은 공존하고 있으며, 그 둘의 긴장이 삶에 깊이를 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의 생태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지난여름 생식(生殖)의 본능을 따랐던 숲 속의 곤충들은 생명을 다하고 스러졌지만, 생명의 DNA를 물려받은 또 다른 곤충들이 소멸의 시간을 유충 혹은 번데기의 형태로 견디다 봄이 오면 앞서 스러진 곤충의 빈자리를 메우게 될 것이다. 이처럼 앞으로 만나게 될 생명이 스러진 공간, 즉 빈 숲이 사실은 새로운 생명이 움트고 있는 공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헐벗어 거친 바람 만이 허허한 공간을 할퀴고 있는 겨울의 숲도 보다 정겹게 다가온다.
20여 년간 알래스카의 자연을 카메라에 담고 글을 썼던 일본의 사진작가 호시노 미치오의 책 ‘바람 같은 이야기’에는 백인이면서 에스키모의 가족이 되어 에스키모로 살아가는 밥 율이라는 남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자신이 혹독한 자연환경의 알래스카에 정착한 이유에 대하여 “나의 생명과, 나를 둘러싼 동물의 생명은 같은 선상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온전히 자연의 일부가 되어 대자연에서 살아가는 에스키모들에게 삶과 죽음은 일상이다. 자연의 동료인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날고기를 주식으로 하는 에스키모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다른 생명을 해쳐야 한다. 이 점은 문명인인 우리도 마찬가지이지만 에스키모들은 우리와 같이 자연에서 스스로를 분리하지 않고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생각한다는 점,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자연에서의 순환 과정으로 인식하고 감사의 마음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대자연의 관점으로 볼 때 삶과 죽음은 생명의 순환 과정 속에 있으며, 삶과 죽음은 공존하는 것이다. 알래스카의 대자연을 사랑한 일본의 사진작가 호시노 미치오는 이후 캄차카 반도에서 또 다른 대자연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다 곰의 습격을 받고 목숨을 잃었다. 그는 그렇게 평소에 사랑하던 자연의 일부가 되어 생명의 순환 과정 속에서 스러져 간 것이다.
가을이 깊어가는 절기인 한로를 지나 점차 겨울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지금, 이 자리가 생명이 스러져가는 소멸의 자리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이 움트고 자라는 자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더불어 인생의 후반기에 접어든, 장년이라는 위치가 어쩔 수 없이 노쇠라는 현상을 불러오겠지만, 그만큼 반비례해서 늘어가는 지혜로 내면을 풍성하게 할 시기가 장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이 그렇듯 우리 인생의 소멸을 반드시 부정적으로 생각할 이유가 없는 것이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이 있다는 진리 안에 우리가 속해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생명이 움트는 자리, 산자락에서 마음에 담아보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