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기슭 공원의 나뭇잎이 하루가 다르게 물들어 간다.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사진에 담을 수 없고, 말로써 형언할 재주가 나에게는 없다. 단풍 진 나뭇잎이 아름다운 것은 나뭇잎 자체의 엽록소 변화가 주된 요인이겠지만 기온과 햇빛의 영향도 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단풍의 아름다움을 인위적인 기기나 부족한 문장력으로 표현하기에는 무리라는 것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가을은 절정의 순간을 잠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재빠르게 저물어 간다. 그래서 찬란한 마지막 축제가 끝난 뒤, 기운을 잃고 메말라 가는 가을의 끝자락이 얼빠지게 서러운 까닭이다. 소멸하는 모든 것은 서러운 것이다. 흘러가는 세월은 아쉬움을 남긴다. 말하자면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젊은 날에 대한 아쉬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또한 죽음은 삶에 대한 미련 때문에 서럽다. 대부분의 경우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은 삶에 대한 강렬한 집착을 보이다가 죽음이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다가올 죽음에 대하여 초연해진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할 때는 이럴 경우는 죽음에 대한 초연이 아니라, 준비 없는 죽음에 당면한 삶의 포기에 가깝다. 어쩔 수 없이 삶을 포기해야 한다면 이 또한 서러운 일이라고 하겠다. 마찬가지로 가을이 짙어가면 짙어갈수록 한 계절을 떠나보내는 서러움 또한 짙어갈 것이다.
그리고 서러운 마음이야 어쩔 수 없이 오래 남겠지만 소멸의 순간은 어김없이 곁을 찾아온다. 물이 들고 있는 가을 나뭇잎은 곧 색깔의 향연을 펼치며 만추(晩秋)의 서정을 뽐내다 낙엽이 되어 빛을 잃어갈 것이다. 그렇게 자연의 순환을 따라 앞으로도 생명활동을 멈추었다가 다시 생명의 싹을 틔우기를 반복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식물과는 달리 한번 생명활동을 멈추면 세포 조직이 파괴되고 괴사가 되어 재활용이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2세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생명을 이어가게 된다. 어떻게 보면 동물보다는 식물의 생식 방법이 효율적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물론 착각에 가까운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래도 식물에게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덜하리라는 생각에 조금의 부러움이 있다. 그러나 우주에 깃든 만물이 시간과 공간의 한계 안에서 태어나고 스러지는, 유한한 생명일 수밖에 없다. 이를 거슬러 소멸하지 않는 생명은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여러 모습의 소멸이 반드시 서러워할 일은 아니지 싶다.
비욘 린데블라드라는 이름의 스웨덴 남자가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괜찮은 직장에서 26세의 젊은 나이에 임원이 되었지만 그만둔 뒤, 태국에서 17년간 승려로 살았다. 이후에 환속, 일반인을 대상으로 선원을 운영하던 중에 루게릭병을 진단받았다. 그리고 4년간 투병 생활을 하면서 쓴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라는 책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죽음을 앞둔 린데블라드는 “좀 더 평온한 시기에 생각을 내려놓는 법을 배운다면 두려움과 아픔이 마침내 당신을 찾아왔을 때 가느다란, 그러나 굳건한 구명줄이 되어줄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머물 때 불안에 사로잡혀 사는 현대인들에게 마음을 비우는 삶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에서 유언처럼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생명이 다했음을 알리고 있다.
자연의 섭리를 더 이상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 달리 떠오르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머물고 있는 가을은 그야말로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이’ 소멸을 향해 바삐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사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이 순간은 유한한 생명이 망설임 없이 떠나가는 시간이다. 더불어 우리의 생명이 다하는 날에 떠나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을의 풍경이 실로 장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