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라서 행복한 시간의 기억

-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by 밤과 꿈
비록 내 사랑에 희생이 포함되었다고 해도,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행복했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했을 뿐이다.

-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중에서


사랑에 빠진 사람은 바보가 된다.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이 말이 유효한 지는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들은 순수한 감정에 깊게 빠지기에는 너무나 영악하고 가벼운 세상에 내던져진 청춘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같은 순수한 감정을 유지하기에는 그들이 감당해야 할 미래가 너무 무겁다. 사랑의 보금자리인 집 한 채 마련하기도 어렵고, 설혹 집을 마련한다고 해도 은행에서 빌린 대출금 갚을 걱정이 앞서는 현실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현실 앞에서 순수한 사랑은 또 하나의 무거운 짐이 될 수도 있어 오늘의 젊은이들에게는 사랑도 선택적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내 나이가 이십 대의 시간에 머물고 있었던 때를 돌이켜 보면 그 시절은 그나마 순수했고, 낭만이 살아있었다. 그렇다고 지금의 젊은이들이 예전보다 덜 순수한 세대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현 세태가 순수의 가치를 가리고 있기 때문에 젊음이 태생적으로 지닌 순수함이 발현하지 못할 따름이다. 순수는 본질적으로 이상을 향한다. 그러나 지금의 젊은이에게는 현실의 무게가 지나치게 무겁기 때문에 이상이 삶에 터 잡지 못하고, 순수는 빛을 발할 기회도 없이 사그라들게 되는 것이다. 부침 많았던 우리 역사에서 언제나 젊음은 불행과 동행했지만 경제적으로 가장 풍요를 구가하고 있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야말로 진정 불행한 세대라는 생각이 드는 까닭이다.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의 베스트셀러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원 제목은 ‘Essays In Love’이다. 이 책의 성격을 명확하게 설명하기에는 난감함이 앞선다. 제목과 같이 사랑을 내용으로 하는 수필이라고 하기에는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넓이와 깊이가 만만치 않다. 사랑을 말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 마르크스,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사상가와 역사, 종교의 영역까지 넘나 든다. 사랑과 연애에 대한 감정을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랑학 개론, 혹은 연애학 개론과 같은 개론서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지만 지나치게 딱딱하다. 저자는 클로이라는 여자를 등장시켜 소설의 형식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연애 감정을 해석, 흥미를 더한다. 그러니까 ‘소설로 쓴 사랑의 깨달음’이 이 책의 내용이라고 하겠다.


사람마다 경험하는 사랑의 모습과 과정이 각자 다르다. 그리고 나름으로 곡절이 없는 사랑도 없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수월해 보이는 사랑도 몇 번이고 헤어질 위기를 맞이하면서 이를 극복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기희생이 따르지 않는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 아니라고 확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성 간의 사랑은 본질이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알랭 드 보통은 이에 대하여 “사랑에는 우리를 피해 달아나는 것을 미친 듯이 쫓아가는 욕망밖에 없다”라는 몽테뉴의 말과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기초로 해서만 생길 수 있다”라는 스탕달의 말을 인용한다. 이렇게 보면 젊은 남녀의 사랑은 곧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욕망이 인간의 본능적인 감정이라고 해서 이를 순수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알랭 드 보통은 연애 과정에 대하여 “연인들은 누군가를 향한 갈망과 그런 갈망을 없애고자 하는 바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이른바 밀당이라는 것이다. 지난한 연애 과정을 거쳐 사랑이 결합이라는 결실로 나타난다고 해서 타인끼리의 만남이 야기하는 갈등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아는 뻔한 이야기로 결혼의 연차가 쌓이더라도 부부 싸움의 횟수는 줄어들지를 않는다. 나아가 “사랑의 요구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늘 갈망의 요구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알랭 드 보통은 말한다. 갈망, 즉 욕망은 그것이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온전히 충족되지 않으며, 심지어는 결혼한 대상이 아닌 이성에게서 충족되지 못한 갈망의 요소를 때때로 발견한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이처럼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사랑의 과정인 연애의 심리적인 면모가 전혀 지루하지 않게 다루고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우리의 속을 비로소 깨닫는 즐거움이 있다. 그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내 마음에 와닿았다.

“비록 내 사랑에 희생이 포함되었다고 해도,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행복했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했을 뿐이다.”

이 책의 주인공이 클로이에게 가진 감정을 빌려 저자가 실연한 사람의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평범할 수 있는 문장이지만 내가 이 문장에 이끌린 것은 내 나름의 이해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여기서 말하는 희생은 바그너의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죽음으로 사랑을 완성하는 이졸데의 희생처럼 의도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의 갈망을 성취하기 위해 자아를 양보하고 포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희생이다.

알랭 드 보통은 말한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제대로 된 정체성을 소유할 능력을 상실한다. 사랑 안에서 자아가 지속적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라고. 그러니까 불명확했던 자아가 사랑이라는 행위를 통해 드러나고 이를 위해서는 희생이 수반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을 통해 사람이 성장한다는 말이 틀린 것이 아니다.

또한 이 문장에서 말하는 행복의 성격은 시간과 관련되어 있다. 사실 실패한 사랑은 쓰라린 경험이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기억은 긴 시간 동안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유령처럼 떠돌게 된다. 시간이 흘러 기억 속의 고통이 희석될 때에야 비로소 가치를 발하는 것이 사랑을 위한 자기희생이다. 유일하게 자신을 내려놓고 이해를 구하는 행위가 사랑이라면 흘러간 시간 속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사랑의 기억은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스스로가 느끼기에 그 시간을 살았다는 사실 자체가 행복일 것이다. 이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모두가 잘난 모습으로 살아가는, 그리고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바보로 살아 행복으로 기억되는 시간을 일깨우는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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