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아픔

- 정현종의 시 '견딜 수 없네'

by 밤과 꿈
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 정현종의 시 ‘견딜 수 없네’ 중에서


산다는 것은 해를 거듭하며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해마다 묵은 상처는 딱지가 생겨 아물기도 하고, 새로 생긴 상처 가운데는 쉽게 아물지 못하고 덧나 아픔이 오래가기도 한다. 상처는 사람이 혼자가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뽑아도 자꾸 자라나는 잡초와 같이 끊임이 없는 상처, 그리고 이로 인한 아픔도 망각이라는 장치가 있어 느끈히 견디며 살아가게 된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도 종국에는 잊히리라는 믿음이 있기에 삶의 중심을 잡는다. 그렇게 열두 달 아픔을 마음에 새기고, 또 잊어가면서 한 해 동안의 이력을 남기게 된다.

11월이면 한 해도 저물어가는 즈음, 되새김하듯 올 한 해 동안 마음에 생긴 상처의 흔적을 더듬어 본다. 아직은 아픔이 생생해서 더듬는 마음에 이물감을 느낄 수가 없다.

아프다. 상처로 인한 아픔에 더하여, 지난 한 순간의 전부였을 상처가 아물고 잊힌다는 사실이 또한 아픔이다. 지금 크낙한 아픔도 시간과 함께 흘러 기억의 저편으로 잊힌다는 것이 축복이면서도 안타까운 까닭이다.


정현종 시인의 시 ‘견딜 수 없네’는 이와 같은 시간의 흐름과 삶의 지극한 유현(幽玄)을 오롯이 노래하고 있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먼저 시인은 시간의 무상한 흐름을 끔찍해하며, 뒤를 이어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라고 시상을 심층적으로 전개한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잊히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노래한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물론 이것에는 생명의 절멸과 이별을 포함한 삶의 양태를 모두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또한 “시간을 견딜 수 없네”라고 다분히 선언적으로 노래한다.

흔히 ‘시’를 ‘노래’와 연관 짓는 것은 정형률에 의해 노래되었던 전통에 따른 것이지만, 정현종 시인의 시에서 두드러진 언어의 내재한 리듬감은 평소에 시인의 시에서 느끼는 뚜렷한 특징으로 시상의 전개에 따른 이 시의 리드미컬한 호흡에 놀란다.


얼마 전에 형님과 함께 부모님 산소를 다녀왔다. 형님이 지방에서 살기에 다른 볼 일로 서울에 올라온 김에 함께 서울 인근의 공원묘지에 들른 것이다. 형님의 나이가 칠십 대에 이르다 보니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사무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본인이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 생긴 조바심도 있는 듯싶었다. 아마도 형님도 흘러가는 것들, 그리고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에 머물고 있는 시간을 살고 있으리라.

형님처럼 인생의 황혼기에서 삶을 정리해 보는 경우가 아니라도 누구나 마음에서 지우지 못하는 지나간 시간의 흔적 때문에 아파한다. 내 경우에는 1980년대 초 가장 치열했던 이십 대에 한 여자와 시대를 사랑했지만 어떤 사랑도 이루지 못했다. 한동안 이를 두고 내 젊은 날의 좌절로 생각했었지만, 뒤늦게 자신의 비겁을 이유로 인식하게 되었다. 한 여자를 죽어라고 사랑하지 못했고, 1980년대라는 암울했던 시대를 가슴 뜨겁게 끌어안지 못했다.

그렇게 한 여자에게, 그리고 살았던 시대에 비겁했던 젊음을 오래 아파했다. 그 상처가 깊어 방황한 시간이 길었지만, 철저한 자책과 반성 없이 시간은 흘러 장년의 나이에 들어서도 여전한 아픔을 안고 살아간다. 이 상처가 쉽게 아물고 잊힐 것이라면 그 또한 아픔이 될 것이다. 그래서 영탄조의 문장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다음과 같은 정현종 시인의 시 ‘견딜 수 없네’의 마지막 문장에 마음이 아프게 공감하는 것이다.

“모든 흔적은 상흔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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