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대의 정서를 읽어내는 재미

by 밤과 꿈

정말 오랜만에 시내 대형서점에 들러 시집 두 권을 샀다. 요즘에는 인터넷 서점이 활성화되어 있는 데다가 코로나19로 인해 직접 서점에 들를 일이 줄어들었다. 그러다 보니 직접 이 책 저 책 들추어 보다가 책을 고르는 재미가 없어졌다. 그리고 시내로 나온 김에 내쳐 청계천을 30분 정도 산책했다. 제3차 유행기를 맞이했다는 코로나19의 탓도 있겠지만 갑자기 떨어진 기온으로 해서 청계천을 산책하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코로나19만 아니었다면 매주 토요일에 출석 교회 인근의 성북천에서부터 연결된 청계천을 9가에서 1가에 이르기까지 산책을 했을 것이다.

예배 이외의 모든 모임이 중단된 상태에서 이렇게 30분의 발품으로 만족할 수밖에.

청계천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서울의 도심을 이 작은 하천이 흐름으로 해서 서울에서의 삶은 한층 여유롭고 풍부해졌다는 사실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에 처음 정착했을 때 복개된 청계천 주변의 풍경은 혼잡스럽고 정돈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 청계천이 2003년 복원을 시작, 2005년 지금의 잘 가꾸어진 모습으로 서울 시민에게 되돌아오게 되었다.

청계천은 이름 그대로 맑은 물이 흐르는(淸谿) 하천(川)이었지만 1392년 이 씨 조선이 한양을 수도로 정하면서 도시의 생활용수가 흘러 이름과 같은 깨끗함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청계천의 물은 비록 인공적으로 흘러 보내는 것일지라도 600여 년만에 맑음을 되찾은 것이라고 하겠다.


일제강점기인 1940년이 시작되어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어 이루어진 청계천 복개 이전 청계천의 모습과 청계천을 터전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 시대의 소설을 읽음으로 해서 간접적으로나마 지난 시대를 경험하고 그 시대의 정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역사서나 기록물을 통해 한 시대의 편린들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들이 그 시대의 정서까지 온건히 담아내지는 못하기 때문에 문학 작품은 한 시대를 이해하는 텍스트로 작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가 박태원의 장편소설 '천변풍경(川邊風景)'은 복개 이전 청계천의 모습과 청계천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서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소설이다.

1936년에 월간 종합잡지 조광의 지면을 통해 연재를 시작, 1938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소설 '천변풍경'에서 일제강점기 서민들의 소소한 일상과 정서를 감지해낼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에 대한 장수익의 "식민지라는 파행적 상황에서 기형적으로나마 실현되었던 근대화의 양상을 기층 민중의 생활을 통해 본격적으로 포착해내었다"라는 언급과 같이 이 소설은 천변에서 살아가는 서민의 일상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표명하고 있다. 이는 식민지라는 상황에서 겪는 일상의 한계일 것이다.


너무 먼 과거가 아닌, 우리 근, 현대사의 큰 사건인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전후 시대를 문학 작품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그 시대를 살았던 부모 세대의 삶과 내면을 이해하고 동질감을 가지게 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흥미롭고 가치 있는 일임에 틀림이 없다.

이것이 한 세대 이전의 문학 작품에서 느끼는 생경스러운 문장과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이들 작품을 대해야 하는 까닭이다.

한국전쟁을 온몸으로 겪어야 했던 세대의 아픔과 부조리한 현실을 다룬 손창섭의 '비 오는 날'이나 이범선의 '오발탄'과 같은 소설이 그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미래를 향해 닫힌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그 시대적 절망을 부모 세대의 보편적 정서로 솔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나아가서 그 절망적인 현실의 늪에서도 미래를 열어 나간 그 세대에 대한 감동과 찬사의 마음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문학 작품을 통해 한 세대 전의 삶과 정서를 읽어내고 사유하는 재미야말로 독서가 주는 호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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