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을 요란스럽게 하던 빗줄기와 바람에가로수는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비에 젖은 낙엽이 늦가을의 풍경에 처연함을 더하고 있다. 비는 그쳤지만 찌푸린 하늘은 한낮이 되어도 햇살을 보여주지 않고 풍경을 따라 마음이 처연하다.
축 처진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음악을 선택해 듣는다.
비틀스의 'Norwegian Wood'. 일렉트릭 기타를 사용하지 않은 어쿠스틱이 좋다.
음악과 함께 보는 사진 속 오래전 리버풀 출신 네 젊은이의 몹 톱 스타일이라는 더벅머리가촌스러운 것이 오히려 정감이 간다.
날씨가 우중충하니까 잡다한 생각이 많아진다.
이 노래의 wood는 노래의 가사로 보아 가구를 뜻한다. 그러니까 제목을 번역하면 '노르웨이산 가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노래의 제목을 차용하여소설을 쓰면서 그 제목을 '노르웨이의 숲'이라고 썼다.
노르웨이의 숲. 한때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소개되었던, 그래서 국내에 하루키 열풍을 가져왔던 소설 말이다.
"서른일곱 살, 그때 나는 보잉 747기 좌석에 앉아 있었다."라는 인상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
그리고 소설은 뒤이어 "거대한 기체가 두꺼운 비구름을 뚫고 함부르크 공항에 내리려던 참이었다."라고 쓰고 있다. 오늘의 날씨처럼 우중충한 날씨였나 보다.
무라야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은 네 명의 청춘 사이의 얽힌 운명에 대한 이야기이다.
절친한 친구 기즈키의 자살에 대한 충격과 슬픔을 간직한 채 고향을 떠나 동경의 한 대학에 진학한 와타나베는 그곳에서 기즈키의 여자 친구 나오코와 재회하게 된다.
같은 슬픔을 지닌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서로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뒤섞인 감정을 가지게 되지만 연락이 끊기고, 어느 날 요양원에 있는 나오코의 편지를 받게 된다.
와타나베에게는 미도리라는 생기 발랄한 성격의 여자 친구가 있었지만 아직 남자 친구 기즈키의 죽음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나오코를 찾아가게 되면서 와타나베는 두 여자 사이에서 모호한 입장이 되지만 나오코의 죽음으로 미도리를 찾게 된다.
얽히고설킨삼각관계를 다룬 흔한 내용이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감각적인 문체가 청춘의 아픔과 방황을 아름답게 묘사한 소설이다.
어느 시대이든지 아프지 않은 청춘은 없다. 소설과 같이 아픈 사랑의 열병에 휩쓸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일종의 성장통으로 열병이 지나갔을 때 한동안은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은 허무가 우리를 지배하더라도 언젠가는 그 끝을 만나리라는 기대를 잊지 않고, 또한 반드시 그 끝을 만나게 된다.
우리 세대에게는 독재라는 시대의 억압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때로는 아픔이 되어 나타나기도 했다.
어느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잘못된 현실 앞에서 행동과 무관심의 선택을 강요받는다는 사실이 곧 아픔이요, 방황을 유발하는 요인이었다.
그와 같은 현실에서의 행동에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신념과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결국 믿음대로 새로운 시대는 시간이 흐른 뒤에 찾아왔다.
그런데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는 그들이 맞이할 미래가 확실하지 않다는 것에서 아픔이 있을 것 같다. 이전 세대에게는 젊음의 깊숙하고 불안한 터널을 지나면 맞이할 미래를 그릴 수 있었지만 지금 이 시대에 젊음을 보내고 있는 세대에게 확신할 수 있는 미래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 그것이 이 시대에 젊은이들을 고독하게 만드는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의 젊은 세대야말로 가장 고독한 세대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선배 세대가 해줄 것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 안타깝고, 그것이 그들을 더더욱 슬프고 고독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만 큰 위로는 안 되겠지만 오늘의 청춘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을 겨우 찾아본다면 젊음이니까 아프다는 것, 그 무심한 한마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