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으로 쓰는 에세이(8)
어느 책에선가 ‘사랑은 대화’라는 글을 읽었다. 그런데 그만 그 책이 어떤 책인지, 그 책의 저자가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책을 찾아볼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너무나 당연한 말이라서 그 책의 저자가 한 독창적인 사유도 아닐뿐더러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봄직한 생각이 아닌가.
사랑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에 기반한다. 이해는 대화 없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바라기는 이성으로서의 호감과 사랑이 혼용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내가 ‘한눈에 반하는 사랑’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바라보는 첫 시선에 이성에게서 느끼는 강렬한 인상이 곧 사랑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굳이 표현하자면 사랑의 출발이라고 할 수는 있겠다. 첫인상에서 사랑을 느끼게 되든지, 아니면 더디게 사랑을 깨닫게 되든지 간에 상대방을 이성으로 느끼게 되는 순간, 그 사람은 최소한 사랑의 출발선 상에 서게 된 것이다. 이른바 두 눈에 불꽃이 이는 순간이 사랑의 당자자인 두 사람에게 동시에 찾아온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렇지가 못하기 때문에 사랑은 이내 장벽에 부딪혀 이를 극복해야만 비로소 이루어지는 성취와 같은 것이다. 흔히 하는 “나는 그 사람에게 첫눈에 반했어”라는 말을 사랑의 전부로 기억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사람들이 있다. 첫인상의 기억이 워낙 강렬해서 그런다고 이해할 수 있겠지만, 사랑은 그처럼 짧은 순간의 인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랑을 하기로 결심한 두 사람이 곧 현재가 될 미래라는 시간을 함께 하면서 깊이를 더해가는 과정 자체가 궁극적인 사랑일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이란 말은 완결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라고 하겠다. 그런 시각으로 접근한다면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도 궁극적으로는 사랑이 아니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내가 잘하는, 첫사랑에 대한 기억 떠올림이 사실은 뒤늦은 후회가 가져온 자기 연민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때때로 우리에게는 자신을 포함한 모두에 대하여 연민의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런 마음이야말로 우리를 교만에 빠지지 않게 한다. 그러니 자기 연민을 부끄러워할 것까지는 없으리라.
“죽음에 대한 모든 공포가 삶에 대한 질투에서 비롯되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소설가 알베르 카뮈의 말이다. 그가 소설과 에세이의 형식을 빌려 남긴 실존적 질문이 결국 홀로 스스로에게 되묻는 독백이었음을 깨닫게 하는 말이다.
사랑은? 독백이 아니라 함께 하는 대화여야 할 것이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나 이혼이라는 결론으로 헤어지는 사랑이 모두 함께 하는 대화로 사랑이 무르익지 않은 결과라고 하겠다. 사랑이 온전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그 사랑이 독백이 아니라 함께 하는 대화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음악만큼 대화가 중요한 또 예술이 없다. 여러 종류의 악기가 모여 화음을 맞추고 앙상블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의 소리를 듣는 대화가 필요하다. 현악기와 현악기는 물론 관악기와도 음악을 음악 되게 하는 것은 서로가 함께 하는 대화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합창도 마찬가지, 각 성부가 소리를 모아 화음을 맞추는 과정 자체가 서로의 소리를 듣는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음악 중에서도 보다 긴밀한 대화가 필요한 장르라면 단연 실내악이라고 할 수 있다. 악기의 구성이 단출한 만큼 악기 간의 대화는 보다 긴밀할 수밖에 없다. 특히 현악사중주하는 장르는 주도권을 가지는 악기 없이 네 대의 현악기가 동등한 입장에서 앙상블을 이루어야 하기에 양보와 조화를 전제로 하는 대화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가곡이나 바이올린 소나타와 같이 독창, 독주 악기가 피아노와 함께 앙상블을 이루는 경우에서도 반주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이중주의 개념이 정착된 지 오래되었다.
협주곡 또한 독주악기와 오케스트라 간의 대화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대립하듯 격렬하게, 때로는 서로를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독주악기와 오케스트라가 나누는 대화가 협주곡이라는 장르의 매력이다.
특히 대화라는 점에서 정말 아름다운 음악이 있다. 브람스가 작곡한 ‘독주 바이올린과 첼로,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일명 ‘이중 협주곡’이라고 부르는 곡이다. 브람스가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에 대한 평가 때문에 서먹한 사이가 되어버린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에 대한 화해의 의미를 담고 있는 음악이다. 그래서 ‘화해의 협주곡’이라고도 부르는 이 곡은 필시 바이올린은 요아힘을, 첼로는 작곡자 자신을 의미하며 작곡되었을 것이다. 그만큼 두 독주악기 간의 대화가 각별하다.
그렇지만 나는 이 곡을 들을 때마다 ‘사랑의 협주곡’으로 생각하면서 듣는다. 자신의 스승인 슈만의 아내 클라라에 대한 연정을 가지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간 브람스. 그가 현실에서는 클라라와 함께 할 수 없는 대화를 음악으로 함께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바이올린은 클라라를, 첼로는 브람스로 상정하고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상상해 본다.
우정이 되었든, 사랑이 되었든 모두가 화해와 이해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인내하면서 나누는 대화가 중요하다. 사랑은 함께 하는 대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