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날 그 아이의 어머니가 우리들을 집으로 초대한 적이 있었다.
당시는 학급 인원이 많아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쪼개어 수업을 하던 시절이었다.
많은 인원을 초대할 수는 없는 일, 교실에서 그 아이와 가까운 자리에 앉는 아이 대여섯 명을 초대한 것으로 기억한다.
나 또한 초대 인원에 포함되어 그 아이의 집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 아이 만을 생각했다면 초대에 응할 까닭이 없었다.
그 아이의 어머니가 집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나와 동갑의 외동아들을 둔 젊은 어머니가 바깥에서와 같이 집에서도 아름다운 자태를 유지하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당시 많이 잡아도 나이가 서른 초반을 넘기지 않았을 그 아이의 어머니는 어린아이의 턱없는 안목으로도 절정에 이른 여인의 아우라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 감정이 온전한 이성감정일 리는 없었겠지만 적어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대상에 대한 자연적인 반응임에는 틀림이 없었을 것이다.
불과 일 년 후인 사 학년, 학급 반장을 맡고 있었을 때 부반장이었던 한 여학생에게 호감을 가진 적이 있었다.
산달이 가까이 다가오면서 잠시 휴직한 담임 선생님의 부재로 한 달을 자율학습으로 일관하던 때였다.
반장으로서 자율학습을 통제한답시고 분단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괜히 그 여학생 주변을 맴돌며 흰소리를 늘어놓기 일쑤였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내 수작에 시달렸으니 그 여학생도 지긋지긋했으리라 생각한다.
오죽하면 방과 후 집으로 가는 길목을 자기 어머니와 함께 지키고 있었을까.
내가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그중 한 가지가 그 여학생의 집을 지나쳐 가는 골목길로 내가 지나갈 줄 용케 알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붙들여 집 안에서 걔의 어머니로부터 반장이라는 애가 선생님도 안 계신데 모범이 되어야지 학습 분위기를 흐리면 되겠냐, 생긴 건 얌전해 보이는데 그렇게 나대냐는 등 장황한 훈계를 들어야만 했다.
물론 다음부터는 그 여학생의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내 마음을 설레게 하던 그 여학생의 하얀 얼굴이 얼마나 밉상스럽게 느껴지는지, 내 감정이 두서가 없는 왜 바람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마찬가지로, 그 아이의 어머니에 대한 내 감정도 방향도 없이 스치는 바람, 혹은 자의식 없는 몽정과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 아이의 집은 으리으리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 도시에서는 드문 이층 양옥집이었다.
그리고 수국과 백일홍이 아름답게 꽃 핀(물론 꽃 이름은 훗날 알게 된 것이다), 아담한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었다.
정원이야 그 아이가 이사를 오기 전부터 누군가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 모두는 멀지 않은 동네에 그런 집이 있는 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아이에게는 지나치게 높은 담벼락이 집을 향하는 시선을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날 그 집에서 무엇을 하고 놀았는지, 무엇을 먹었는지는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것은 내 관심을 모두 앗아간 하나, 장전축이라는 물건 때문이었다.
나뭇결이 아름다운 값진 가구를 연상케 하는 몸통을 울리며 나오는 우렁찬 소리는 집에서 듣던 라디오의 소리와는 비교 자체가 되지 않았다.
새벽에 기침하는 참새 소리와 모기가 웽웽거리는 소리 정도의 차이라면 심한 말일까.
장전축 앞에 앉아 넋을 놓고 음악을 듣고 있는(음악은 무슨, 사실은 소리를 듣고 있었을 것이다) 내 모습을 눈여겨보고 있던 그 아이의 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얘, 너 이 음악이 좋아?"
"......"
나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당당하지 못한 내 모습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고는 더욱 마음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너, 부끄럼이 많구나, 남자아이가."
"......"
"호호호. 이 음악은 경기병 서곡이라는 음악이란다. 주페라는 사람이 쓴. 음악이 신이 나지?"
여자의 웃음소리에 내 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아 더욱 부끄럽고 비참한 생각이 들어 한시라도 빨리 여자의 조롱에 찬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애써 여자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으면서도 줄곧 장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마도 부끄러운 상황을 마음으로 모면할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의미도 없이 음악의 제목을 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경기병 서곡이라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