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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희 Feb 29. 2016

무언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척 해요

"니가 나를 사랑하면 또 얼마나 사랑하겠니.."

그 말이 자꾸 귀에 맴돌아서 슬프다.

교복을 입고 무표정한 흰 얼굴로 빙판 위를 유영하던 여자아이는 물 속으로 가라앉으며 "여기 참 따뜻하다"고 말했지. 가장 추운 곳조차 날 선 시선보다는 포근해. 그래서 나는 자꾸 어는가 봐.


자꾸 딱딱해지는 눈빛에 찔리면서, 나는 피를 질질 흘리며 엉금엉금 기어가. 어디로 가는 지는 몰라도 여기보다는 편하기를 바라면서.


네가 내 종착지이자 피난처라면 좋겠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왜 나는 그 안에서도 추워 벌벌 떠는 걸까. 문을 열어줘, 애원하며 아무리 두드려도 애초에 없는 문이 어떻게 열리겠어.


얕은 균열을 사이에 두고 우리의 계절이 달라져.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이 헤어지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 니가 비웃으며 치는 코웃음에 다리가 베어나가서 나는 이제 떠나지도 못한다.


사선으로 부는 바람이 풍경을 반쯤 잘라먹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진다. 그 바람에 몸이 댕강 잘려 나는 다시금 무너지고, 나 없는 자리엔 봄이 오려나. 만년설이 된 거 같아. 사람들은 봄에 서서 나에게 인사하고. 다리도 형체도 없는 나는 존재하지도 소멸하지도 못하고. 끝내지 못한 문장만 메아리친다.


목을 휘감는 말은 유언이 되고 니 이름은 내가 목 멜 나무가 돼. 죽지 못해 사는 것과 살지 못해 죽는 것 사이의 간극은 얼만큼일까.

궁금해하며 파란 알약을 삼켰어.


잠이 퍼지고 나는 네 얼굴을 떠올린다.


빙하를 유영하는 여자아이는 어느새 내가 되고 나는 물 속 깊이 가라앉으며 생각해. 이곳이 포근한 이유는 물 밑 가장 깊은 곳에서 네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구나. 나를 잡은 손도, 안아 내리는 팔도 온통 네 것. 눈을 감는다.

여기 참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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