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 ㆍ야채 ㆍ생선이 시가 된다면
사과 ㆍ 양파ㆍ 갈치가 시가 된다면
# 사과의 일생
"높은 나뭇 가쟁이에 빨간 사과가 그렇게 탐스럽게 열렸더라.
그래서 내가 얼른 가서 땄지."
어느 날인지 엄마가 내게 일러준 나의 태몽!
군것질거리 드물던 어린 시절, 철 되면 아버지가
직접 과수원에서 오토바이 뒷자리에 검은색 고무 밧줄로
단단히 묶어 나무 궤짝 속에 하나 가득 담아 사온 너는,
어떤 날은 창백한 연둣빛 노오란 낯빛으로
어떤 날은 상기된 두 볼이 발그레레 타오르고
어떤 날은 풋풋한 새콤달콤 초록빛 상큼함으로
그렇게 너는 병약한 가녀린 소녀였다가
그렇게 너는 수줍음 타던 아가씨였고
그렇게 너는 싱그러운 내 청춘이었다
머리에 하나 둘 눈발이 나리는 지금도
살며시 눈 감고 깊은숨 한번 들이쉬면
은은히 퍼지는 너의 그 달콤한 향기!
그러고 보니 엄마의 분내와 닮아 있구나...
# 양파의 고백
당신은 양파예요
까도 까도 보이지 않는 당신의 마음
이젠 볼 수 있겠지
하지만 역시나 또 한 겹이 저를 기다려요
깔 때마다 맵고 시린 내 눈과 마음
이젠 그만하고 싶어요
강이라도 바다라도 채워야 할까요
바위산이라도 뚫어야 할까요
모두가 당신을 뭐라 해도
흔들리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흔들리는 나!
그렇지 않은 척하지만
제 마음은 서서히 썩어가고 있어요
# 갈치의 최후
한때는 은빛 찬란한 화려함에 도취되었지
그 영광이 영원할 듯 무한한 세상을 꿈꾸었다
실비단 두른 레이스는 그렇게 나를 돋보이게 했고
무용수의 손끝처럼 한없이 부드러웠다
그 어느 날이 오기 전까진...
그러다 그만 뿌리칠 수 없는 유혹에 이끌려
나도 모르는 새 꽂혀버린 북극의 비수여!
이리저리 안간힘으로 몸부림쳐 보지만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
난 왜 행복했음을 알지 못했는가?...
이젠 과거의 나와 작별해야만 한다
달콤한 포도주, 빛나던 다이아몬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을 순간들이여!
그 모두를 뒤로 한 채 나는 홀로
떠나야만 하는 어느 몰락한 귀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