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고마우신 실장님

by 그리움 나무

미스 0, 이거 내가 K대 다닐때 쓰던
사전인데 쓸래?



결혼 전 다니던 K사(해운회사)텔렉스실 실장님은 자그마하신 체구에 순수한 소년 이미지가 남아있는 중년의 내 직속 상사셨다. 본인께서는 끝맺지 못한 공부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후배가 되버린 내게 끝까지 잘 마치라는 격려의 말씀과 함께 직접 쓰시던 영어 사전을 건네주신 자상한 아버지같은 분이셨다.


본인의 못다 이룬 꿈을 끝까지 이루라는 무언의 무한 지원이었던 것이다. 직업과 학업을 병행한다는 게 어렵다는 것을 공감하시어 적극 밀어주셨던 아낌없는그 마음!



업무상 서투르고 부족한 아래 직원이었음에도 단 한번도 꾸짖거나 채근하는 법이 없으셨다. 지금 이야 진작에 컴퓨터가 책상 앞에 한 대씩 놓여있어 외국과의 서신이 자유롭지만 그 시절 국내외 정보 통신을 책임지는 단독 부서였으니 만큼 회사 입장에선 막중한 업무임에는 틀림없었다.



/// U R G E N T ///

+++ very urgently +++

= urgent urgent urgent =


가장 흔하게 본 메시지들이다. 해운회사이기 때문에 대형 컨테이너 선박이 독일, 핀란드 같은 유럽 뿐만 아니라 남아프리카, 중남미 등 여러 라인을 담당하는 파트별 업무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나라별 기상 상태같은 급변하는 상황이나 입ㆍ출항시 법적인 문제 내지는 국내 수출사와 외국 바이어와의 갈등, 서류상 요구되는 절차 등에 얼마든지 컴플레인이 생길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을 수시로 주고받는 기능을 담당했던 게 우리 텔렉스실 업무였다.



그러니 우리의 업무는 받는 즉시 보고가 바로 이루어져야 하는 사항들이 잦았다. 실장님은 그당시 상고 출신임에도 개인적으로 학원이나

독학으로 영어 구사력이 어느 정도 가능하셨다. 여러 면에서 본받고 싶은 점이 많은 분이셨다.



당시 이런 업무상 남자 직원들은 기본적으로 무역 실무 영어 능력을 요했고 그러면서 여자도 능력을 갖춰야겠다는 현실이 눈에 탁 들어왔다. 참고로 여직원은 고졸, 남직원은 대졸이 기본이었다.



간단한 영어 문장도 있지만 꽤나 길고 난해한 문장도 있어 대충 넘겨짚는, 한 마디로 감으로 일하는 답답함이 피부로 와닿았다. 감으로 운전한다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이겠는가?


이렇게 무지에서 오게 되는 답답함이 싫었다. 대학나와 떳떳한 자기 실력으로 능력을 인정받는 남직원들이 은근 부럽기도 하면서 스스로의 열등감에 화가 불끈나기도 했다. 그에 반해 여직원들은 업무상 보조 역할에 그치는 회사 시스템에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불만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러니 고등학교 졸업한 이후 대졸 남직원들 사이에서 홀로 그때껏 30년 인생을 회사에 바치셨던 실장님의 외줄타기 인생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때 내 나이 이십대 초반.

이런 내 모습을 어리지만 대견해 하는 직장 동료들과 상사분들의 따뜻한 지지가 없었던들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을까?



그런 분들 중에 실장님이 늘 중앙에서 나를 지켜주셨다. 10년간 근무하다 대학도 졸업하게 되면서 내 길을 찾아가겠다는 나를 서운하지만 잘됐다고 빙긋이 웃어주셨고, 나는 마지막으로 실장님께 예쁜 넥타이를 포장해서 큰 맘먹고 선물했다. 그때 당시 내겐 꽤 큰 지출이었지만 절대 과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 이상도 해드리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까.



퇴사 후 나의 결혼식장까지 축하해 주러 오신 모습이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실장님 모습이다. 그러다가 이런저런 일들을 하면서 여유없이 가사와 육아를 병행하다 우연찮게 실장님 전화를 받게 되었다. K사 다닐적 친했던 동생이 우연히 알려줬다며 연락이 온 것이었다. 그 당시 학원과 과외까지 뛰며 어린 아이들과 복잡한 신랑 사업일로 숨고를 새도 없다시피 살았다.


그런 상황에서 실장님이 전화를 하셨는데 마침 얼마있다 사모님이랑 우리집 방향으로 볼 일이 생겼다며 얼굴보자고 하셨다. 알겠다며 그러자고 대답하고는 얼마 후 핸드폰을 분실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연락처가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으니 안심이라는 생각만 하고 정신없다보니

사후 돌발 상황을 대비하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이사까지 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실장님 연락처는 물론이고 다른 지인들 연락처까지 날라가 버려 지금까지 연락이 두절된 친구나 지인이 많다. 나만 이렇게 사는 건지 한심하기도 하고 그래서 내 마음의 짐은 두 배가 되었다.



부모님 이상으로 내겐 소중하신 분이신데 어떻게 살고 계신지도 모르고 더군다나 보자는 약속까지

했는데 나를 서운히 여기시진 않은지 건강은 하신지 그래서 마음 한 켠이 못내 무겁다.



혹여 어쩌다 만나뵙게 된다면 너무 죄송했다고, 힘든 시절 일주일에 한번씩 꼬박 잊지않고 맛난 점심을 사주셨던 따뜻한 마음 덕분에 제가 견텨냈다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자기 개발에 매진하시고 주변 사람들에게 아낌없는 마음으로 살뜰히 살피시던 진정한 나의 아버지셨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다 간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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