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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철 Apr 13. 2023

강희대제 (얼웨허 작)


얼웨허 작가의 “강희대제”를 읽고...


중국 작가 얼웨허가 쓴 “강희대제”를 완독했다.

얼웨허는 우리나라 조정래 작가와 견줄 수 있는데, 조정래가 3부작인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으로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다뤘다면, 얼웨허는 제왕삼부곡(帝王三部曲: 강희대제, 옹정제, 건륭제)으로 청나라 강건시대(康建時代)를 아우르는 대작을 완성하였다.


동 강희대제는 제왕삼부곡의 1부로서 청나라 초기 이민족으로서 한족의 영토 지배와 함께 만주족과 한족 간의 동화를 위한 강희제의 처절한 노력으로 일관된 그의 행적을 담고 있다.

동 작품을 접하기 전, 김영민 교수가 저술한 “중국정치사상사”를 통하여 하-상-주-진-한-수-당-송-요-금-원-명-청에 이르는 중국 역사를 통독한 것이 명청 시대의 전반적 흐름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강희대제”는 총 12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강희제의 등극

2. 보정대신 오배의 제거 과정

3. 삼번의 난(三蕃之亂)

4. 영토 확장 및 국경의 확립

5. 황하치수(黃河治水)

6. 황자들의 난립

이라는 6개의 단락으로 요약할 수가 있다.


강희제는 아버지 순치황제가 24세의 나이에 천연두로 사망했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순치제는 극진히 사랑하던 후궁 동악씨가 천연두로 병사를 하게 되자 실의에 빠져 삶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차에, 동악씨를 황후로 추서하고자 하였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고 황태자였던 4남까지 급사를 하게 됨에 따라 고뇌 속에서 결국 출가의 길을 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에 따라 강희는 1661년 8세의 나이로 황제에 오르게 된다.

이 같은 순치제의 행보는 15세기 일본에서 일본전국(戰國)시대의 단초가 된 오닌(應仁)의 난을 떠오르게 하는데, 당시 쇼군의 지위에 환멸을 느낀 이시카가 요시마사가 건축과 예술을 즐기며 여생을 마감하고자 했던 것이 결국 군웅할거를 유발하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귀결되는 전국시대를 초래하였던 것이었다.  


일본 오닌의 난과 달리 청나라의 경우, 순치제가 출가하면서 마지막 유언을 남겼는데 그에 따라 강희에 대한 수렴청정 대신 4명의 보정대신(輔政大臣)으로 정무를 맡아 통치하게끔 한다는 것이 다른 점이라 하겠다.

4명의 보정 대신은 색니, 알필륭, 소극살합, 오배 등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중에서 병부상서인 오배가 병권을 잡아 실질적인 지배를 하게 된다.

색니는 강직한 충신이었으나 노환으로 명을 달리하였고, 그의 아들 색액도가 후에 강희에게 충성을 한다.

알필륭은 현명하지만 심약한 성격으로 오배의 눈치를 보며 자신의 보위에 급급한 처신으로 일관한다.

소극살합은 오배에 맞서 강희의 황권을 보호하려 하지만 오배의 모함으로 인해 처형되는 불운을 겪는다.

오배는 만주족(여진족)인 후금이 명나라를 진압하고 자금성을 정복하는데 혁혁한 전공을 세운 영웅이었으나, 어린 강희제의 등극이후 마치 자신이 황제인 양, 모든 상소문을 자신의 손을 거치도록 하는 등 전체적인 정무를 관장하였으며, 심지어 재물에 대한 욕심이 극에 달해 당시 권지(圈地)라고 일컫는 방식으로 양민들의 토지를 개인적으로 착복하여 재산을 불려 나갔다. 권지라 함은 말(馬)을 풀어 하루 종일 달리게 하여 해질 무렵 도달하는 지점을 영지로 삼는 방식인데 정복자인 만주족이 자행한 횡포 중의 하나였으며 이를 권지난국(圈地亂國)이라 부른다.


강희는 어릴 적부터 영특함을 발휘하였고 학문에 대한 탐구심과 호기심이 깊었으며 무예에 대한 재능도 남달라 소위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라고 한다. 매사에 생각이 깊고 문제 해결 능력이 특출한 인물이라 하겠다.

특히 보정 대신 오배의 제거 과정은 그의 치밀함을 엿볼 수 있는데, 강희는 오배의 감시 속에서도 무술 수련과 씨름 연습을 한다는 명목으로 실제로는 자신의 친위대를 조직하여 힘을 키워 나간다.

이렇게 8년의 세월 동안 준비를 한 강희는 자신의 권세를 믿고 안일함에 빠져 있는 오배의 허를 찔러 1669년 궁정에 알현하러 온 오배를 전격적으로 체포하여 구금하기에 이른다.

“나무가 숲보다 빼어나면

 바람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

강희가 가슴속에 칼을 품고 다짐할 때 나오는 문장이다.


이로써 강희는 재위 8년 자신의 친정 체제를 구축하기에 이르는데, 비록 어린 나이지만 강희의 뚝심과 치밀함, 그리고 영민함을 볼 수 있는 대목이 바로 오배의 제거 과정이다.

   


강희의 학문에 대한 사랑은 유교와 도교를 비롯한 한학(漢學)에 그치지 않고 서양으로부터의 학문, 특히 수학과 천문학, 병기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으며 심지어 다민족 통치를 위하여 만주어, 중국어, 몽골어 등 7개국의 언어에 능통하였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은 강희가 죽을 때까지 제왕학에 대한 끊임없는 노력을 기우렸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당시 만주족들에게 있어 교양서이자 역사서로 가장 많이 거론되었던 책이 바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였다고 하니 한족과 만주족의 학문과 의식 수준의 차이는 상상 이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한족의 우월 의식과 만주족의 열등의식은 통치자에게 있어 심해와도 같은 깊은 고뇌를 안겨주었으리라 생각된다.

이 같은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자 강희는 하루도 빠짐없이 공부를 하고, 한족 스승을 모시고자 했으며 인재 등용에 있어 종족에 구애받지 않도록 노력하는 등 강희는 평생 동안 한족과 만주족의 동화(同化)에 진력을 다 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일례로 박학홍유과(博學鴻儒科)라는 과거 시험을 통하여 다양한 인재들을 천거하도록 장려하였는데 사서삼경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 천체, 의술, 점성술까지 포함하여 사회 다방면에 필요한 인재를 발탁하고자 했다. 박학홍유과 시험은 당송 이후 500년 만에 실시한 과거 시험이었다.


여기에서 되짚어봐야 할 것은 명나라의 멸망 과정이다.

당시 후금이었던 청나라의 위세에 정복되었다기 보다 명나라는 자멸의 길을 스스로 걸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즉 명나라 말기에는 황실과 관료들의 부패로 말미암아 여기저기에서 민란이 끊이지 않았고 특히 이자성을 필두로 한 반군의 세력은 온 나라를 삼킬 듯 했는데 이 때 후금의 누루하치가 명나라의 장수였던 오삼계, 상가희, 경정충 등과 결탁하여 이자성은 물론 명나라의 잔존 세력이자 마지막 황제 영력제를제거하기에 이른다.

이런 연유로 강희의 통치론은 청이 명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보국안민을 위하여 명나라의 대체 국가로서 청나라가 등장하였다는 이론을 전개하기에 이른다.


명나라 말기를 노래한 대목이 가슴에 와 닿는다.

“ 군주가 성 위에 깃발을 세워서 항복을 하는데,

  첩은 깊은 궁궐에서 낮잠만 자는구나“

“하늘이여, 나이가 많아 눈과 귀가 예전같지 않나요?

 사람이 보이지 않고 듣지도 못하는 건가요

 양민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악마에게 힘을 주시면 어떡하나요

 한 평생을 선량하게 산 사람은 지옥에 떨어지게 하고요

 하늘이시여

 더 이상 하늘 역할을 하지 못할 거라면 무너져 내리세요

 무너져 버리라고요!“


이렇게 명나라를 저버리고 후금과 결탁한 3명의 장수들을 번국(藩國)의 왕으로 대접을 하기에 이른다. 이를 삼번(三藩)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오삼계는 평서왕으로서 운남과 귀주지역의 번을 갖고, 상가희는 평남왕으로서 광동 지역을, 경정충은 정남왕으로서 복건지방을 맡아 중국의 강남 지역을 통치하게 된다.

특히 오삼계는 그 위세가 대단하여 강력한 군대 보유는 물론, 병기 제조, 자체적인 화폐까지 주조하였다. 게다가 황실로부터 전국 세금의 절반에 해당하는 세수를 보조받는 등 경제력 또한 막강하였다.

이는 친정 체제 이후 중앙집권제를 희망하는 강희제와 충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강희제는 백성들의 조세 부담을 덜어 줌으로써 민심을 얻고, 한족 출신의 우수한 인재와 장수들을 곳곳에 과감히 등용하여 경제력과 병력을 키워나간다.

결국 강희제는 철번(撤藩)을 단행하는데 상가희와 경정충에게는 회유와 압박으로 철번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결국 오삼계를 비롯한 삼번연합국과 처절한 전투 끝에 승리하여 철번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

이로써 1681년 강희 20년 중국 본토는 하나가 된다.

그리고 2년 후 강희는 서양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제조한 대포를 앞세워 대만을 비롯한 팽호제도, 금문 등을 정복함으로써 명실 공히 중국 통일을 달성하게 된다.


강희제 시대 이전부터 만주 지역 특히 흑룡강 주변은 수시로 러시아와 국지전이 끊임없이 진행되던 곳이었다. 전쟁과 휴전을 거듭하였는데 1689년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음으로써 동북쪽의 광활한 영토를 확보하기에 이른다. 네르친스크 조약은 중국이 국가 간의 평등한 위치에서 맺은 국제 조약으로 그 의미가 크다.


삼번의 난으로 청나라가 혼란해진 틈을 타 몽골의 준가르족이 중원으로의 진출을 꾀하였다. 이에 강희제는 1690년 친히 병력을 인솔하여 친정에 나선다. 지루한 전쟁 끝에 1697년 준가르족을 격퇴한다. 그리고 1721년 티베트를 청나라의 정식 영토로 편입시키게 된다.


이로써 강희제 시대 동안 청나라는 삼번을 비롯한 대만을 복속시키고, 동북으로는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통하여 광활한 영토를 확보하고, 서북으로는 몽골과 티베틑 편입하여 현 시대 중국 영토의 90% 이상을 확립하게 된다(위구르 신장 지역은 건륭제 시대에 확보).  

이는 강희제의 대단한 치적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조선 세종대왕의 4군6진의 개척을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다.

만주족인 후금이 만리장성을 넘어 광활한 명나라의 본토를 장악한 것은 결과적으로 볼 때, 기존 만주 땅에다가 중국 본토를 더하고 그리고 몽골과 티벳까지 얻게 되는 금상첨화의 역사적 축복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의 중국으로 엮어 낸 인물이 강희제라는 사실에 있어 한 인간의 위대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강희제의 치적으로 빠트릴 수 없는 것이 바로 황하강의 치수(治水)이다. 치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군주가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 과제로서 강희제 역시 황하 치수를 필생의 과업으로 생각하고 10년 가까이 매달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막대한 예산을 책정하여 집행하였다. 근보와 진황이라는 황하를 평생 연구한 한족 출신의 인재를 과감히 발탁하여 그에 대한 신뢰를 갖고 막대한 자금(총 예산의 1/10)을 지원하였다. 황하강의 범람은 매년 되풀이 되었고 수 천 명의 수재민 발생은 물론 조운(漕運:세금으로 내는 곡식을 운반하는 일)에 막대한 지장이 있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 문제까지 야기되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결국 황하 대운하의 완성은 수재민의 발생을 막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물류 체제를 원활히 함으로써 국가 전반적인 경제를 활성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청나라의 당시 경제력을 세계에서 으뜸으로 평가하는데, 아주 오래 전 읽은 안드레 군더의 저서 “리오리엔트”에 따르면 전 세계 은(銀)의 물동량의 60%이상이 청나라였다고 하니 황하 치수가 가져온 경제적 파급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라 보여 진다. 당시 17세기에는 스페인의 식민지인 멕시코에서 생산되는 은이 유럽으로 건너가서 청나라와의 교역으로 청나라에 전해지고 청나라 자체의 경제 활성화로 인해 자국 내 거래 수단으로 다량의 은을 보유하게된 것으로 사료된다.  


강희제는 61년 재위 기간 동안 35명의 황자와 20명의 공주를 배출하였다.

그 중에서 2째 황자인 윤잉의 인간사가 특이한데, 윤잉의 산모는 강희제의 황후 혁사리씨의 소생이다. 혁사리씨는 총명한 기지로 내궁을 잘 다스리고 위기 상황에서 적절한 조언을 하는 등 강희제의 총애를 받았으나 난산 끝에 숨을 거둔다. 이를 슬퍼한 강희제는 유능한 아들을 후계자로 선정하는 만주족의 전통을 깨고 둘째인 윤잉을 태생 시점부터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윤잉을 금지옥엽처럼 특별대우를 하며 다른 황자들과 차별을 두어 교육도 철저히 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강희제가 장수를 하게 됨에 따라 윤잉은 황태자 생활만 30년 이상을 하게 되고 강희제의 지나친 기대와 숨 막힐 정도의 엄격한 교육 등으로 인해 엇나가는 길을 걷게 된다. 주색잡기에 빠진 윤잉은 급기야 강희제의 비빈인 정춘화와 눈이 맞아 정을 통하기도 하는데 이에 따라 윤잉은 두 번이나 황태자에서 폐위되는 시련을 겪게 된다. 지나친 부정(父情)의 비극인 것이다.

윤잉과 사랑에 빠진 정춘화의 경우는 당나라 때 태종의 후궁이었다가 아들 고종과 결혼하게 되는 측천무후가 연상되고, 아들의 며느리인 양옥환(양귀비)을 후궁으로 앉힌 당 현종이 연상되는 장면이다.

아무튼 윤잉이 폐위되자 약 14명의 황자들이 황제 자리를 놓고 패권을 다투는 형세를 보이게 되는데, 강희제는 황태자 책봉이 불러오는 파당 정치를 방지하고자 임종 시점까지 황태자를 정하지 않고 상호 경쟁 체제로 돌입하게끔 한다.

각 황자들은 조정의 주요 기관에서 실무를 맡아 강희제를 보좌하지만 물밑에서는 서로 이합집산을 하여 황제 자리를 위한 치열한 암투를 벌인다.


황자들 간의 황위 쟁탈전에 있어 임백안이라는 특이한 인물이 등장한다.

임백안은 강희 15년 과거에 합격하여 이부에서 20년간 고공사 서류를 작성하는 일을 맡았던 인물이다.

그는 형부에서 보관하고 있는 기밀 서류인 백관행술(百官行述)을 빼돌리게 된다. 백관행술이란 조정 백관의 크고 작은 실수를 정리한 비밀 장부인데, 탐관오리들을 압수 수색하면서 나오는 비리와 그들의 뒤를 봐준 고위 인사들의 연루 사실 등도 함께 기록되어 이는 기밀 장부이다. 현재 시각으로 보면 개인 사찰의 일종이기도 하고 국정원의 소위 “파일”이라는 것 혹은 검찰의 소위 “캐비넷”이라고 하는 고위 관료에 대한 사찰 기록물 성격으로 보여 진다.

당시 굵직한 비위 사건들은 거의 다 황자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 같은 비밀 장부를 임백안은 여덟째 황자인 윤사에게 제공하고 그와 결탁하여 많은 이권 사업을 통하여 돈벌이는 물론 모든 관청을 떵떵거리면 활보하게 된다.

심지어 임백안은 다른 황자들에게 검은 돈을 대여해 주기도 하고 채홍사 역할은 물론 미약(媚藥)과 점술사 등을 연결시켜 주기도 한다.

8째 황자 윤사는 비밀 장부를 근거로 말단부터 고위직 관료들까지 그의 족쇄에 얽어 넣으며 심지어 경제적 지원 등을 함께 함으로써 자신의 지지 세력으로 확보하기 시작한다.

이는 강희제가 윤잉의 황태자 폐위 이후 ‘고관 대신들의 중지를 모아 후계자를 책봉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었는데, 이를 염두에 두고 윤사는 물밑 작업을 진행한 것이었다.

그리고 윤사는 임백안의 명의로 전당포를 자신의 궁궐 근처에 두고 운영하면서 장부의 보관은 물론 비밀 아지트로 활용하고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을 파악한 4째 황자 윤진과 13째 황자 윤상은 전당포를 급습하여 장부를 확보하고 임백안을 처형하게 된다.

윤진은 매사에 진중하고 사려 깊은 성격으로 한 번 뱉은 말은 꼭 실행하는 냉철한 이미지가 강했다. 강희제는 내심 윤진을 맘에 두고 있었으나 항상 윤진의 부족한 인간미를 질책하기도 했다.

이처럼 황자들의 업무 수행 능력과 화이한만(華夷漢蠻)의 통합된 청나라의 미래를 끌고 갈 후계자를 평가한 강희제는 고관대신들의 빗발치는 청원(8째 황자 윤사를 천거)에도 불구하고 4째 황자인 윤진에게 황위를 넘기게 되는데 그가 바로 옹정제가 된다.


임종을 눈 앞에 둔 강희제는 상서방(청와대의 기능을 한 부서)의 측근들을 아주 사소한 죄목으로 하나씩 구속을 시키는 작업을 감행한다. 이는 자신의 타개이후 벌어질 정치 보복을 예견하여 그들을 미리 구속함으로써 사후 휘몰아칠 정치적 광풍에서 그들은 미리 배제시켜두고자 한 보호막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후계자가 그들을 사면할 수 있도록 조치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던 것이었다.

과연 강희제다운 부하 사랑 방식이었다.


천고일제(千古一帝)라는 말이 있다.

천년에 한 번 나오는 황제라는 뜻인데 바로 강희대제를 일컬음이다.

8살에 즉위하여 61년간 그는 누구보다 많은 인간적 고뇌와 삶과 죽음의 위기를 겪고 세계 최강의 청나라를 만들어낸 인물이 강희제인 것이다.

강희제로부터 옹정제, 건륭제로 이어지는 강건시대의 영화는 장구한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강건시대의 부활을 갈망하는 현재의 중국은 앞으로 어떤 도박을 하게 될까 염려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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