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500년 제 15 권

by 이병철


신봉승의 조선왕조 500년

제 15 권 [광해군]


어릴적부터 영특한 것으로 알려진 선조는 비록 15세에 보위에 올랐지만 현명한 처신으로 나름 자리를 잘 잡아나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다가 임진년 운명의 1592년이 다가오는데, 약 200여 년간 소소한 왜구의 침입과 여진족과의 마찰은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태평한 세월을 영위하고 있던 조선에 크나큰 파고가 찾아들기 시작한다. 바로 임진왜란이다!


임진왜란의 전후 사정을 알기 위해서는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야마오카 소하치의 작품 [대망]을 참조하여 당시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래는 예전에 상기 [대망]을 읽고 정리한 독후감의 내용 중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임진왜란에 관한 것을 발췌한 내용이다.

“히데요시는 오와리라는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타고난 비상함으로 따로 공부하지 않았음에도 천문과 지리에 밝았다고 한다.

주변 상황 파악에 대한 동물적 감각, 상황에 따른 능란한 임기응변, 강철같은 체력, 목표 달성을 위한 집요함, 무엇보다도 주변 세력의 규합을 이루는 정치력과 민심을 얻기 위한 인기 전략, 그리고 미래 비전의 제시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히데요시는 문맹을 간신히 면한 학문 수준이었지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데에는 뛰어난 달변가였다.

그리고 오다 노부나가의 말고삐를 잡는 시동으로 시작하였지만

전장에서는 말의 속도에 버금가게 달음박질하는 건장한 다리의 소유자였다.

그가 마굿간 지기를 담당할 적에는 사흘간 마굿간에서 먹고자니 말들과 대화가 되었다고 하며, 노부나가의 신발 시중을 드는 자리에 있을 때에는 매일 새벽 노부나가의 신발을 등짝에 꽂아 따뜻하게 녹여 두었다고 한다.

가슴에 품으면 배앓이를 할 수 있기에 등짝에 두어 예열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노부나가의 신임을 얻어 승승장구하던 때에,

마쓰히데의 반란으로 노부나가가 비명횡사를 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히데요시는 군력을 추스려 반란군을 진압함으로써 자타가 공인하는 노부나가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노부나가의 자손들도 있지만 전쟁의 국면을 교묘히 이용하고 민심 속에 파고드는 전략으로 노부나가의 후계 자리를 히데요시답게 파고든다.

그의 유일한 라이벌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존재하고 있었지만 노부나가의 죽음 당시 노부나가의 초대로 쿄토와 오사카를 유람 중이었고, 오히려 마쓰히데의 추적을 피해 구사일생으로 탈출하는데 급급하였던 관계로 히데요시의 위대한 전과를 멀리서 구경할 수 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즉 하늘의 손길이 히데요시로 향하였다고 밖에 해석이 되지 않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히데요시와 이에야스는 서로 사생결단을 회피하고 견제적인 세력으로 양립하는데,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히데요시는 자신의 누이 아사히히메를 이혼시킨 후 이에야스의 두번째 정실로 보냄으로써 처남 매부의 관계를 맺고자 한다.

이처럼 모든 일본인의 소망이던 일본의 천하 통일을 외형적으로나마 이루게 되자 히데요시는 천왕으로부터 간파쿠(관백)의 직위를 받음으로써 명실 공히 최고 지배자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그는 기세를 몰아 당시 일본 내 해외 문물과 정보에 가장 정통한 사카이 지방의 유지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내고 쿄토의 관문이랄 수 있는 오사카에 대하여 대대적인 도시 계획을 수립하여 전 일본의 물산과 인재가 주변에 모이도록 기획한다.

이 시점부터 즉 1588년경 조선과 명나라 침공에 대한 욕망을 수시로 드러내고 히데요시는 세계 정복의 꿈을 구체화하기 시작한다.”


“히데요시에 의하여 120년간의 전국시대(戰國時代)가 끝나갈 무렵, 그는 간파구의 지위를 아들 히데쓰구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태정대신이자 다이코의 절대적 지위에 오르게 된다.

히데요시의 정명가도(征明假道)의 말처럼, 조선과 명나라를 모두 굴복시켜 무사들에게 봉토와 영지를 한껏 분배해주겠다는 야망의 발로였음은 확실해 보인다.

아마도 통일 일본의 미래 비전을 나름대로 제시한 것이었으리라....

전국시대의 전쟁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실직자로 나앉은 낭인 무사 계급이 무려 수 십 만에 이르게 됨에 따라 이들에 대한 구제책이자 히데요시의 개인적 야망이 함께 어우러진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히데요시는 일본 전체의 동원 가능한 군사가 약 1백만 명 정도로 예상하였고 이 중에서 약 40만 명을 정벌에 파견할 계획을 세운다(실제로는 약 25만 명 투입).


당시 협상을 주도한 명, 일, 조선의 책임자 중 그 누구도 자신의 절대 권력자의 눈 밖에 날까 두려워 사실을 은폐하고 자신의 절대자의 입맛에 맞는 유리한 보고만으로 일관하였던 것도 전쟁 발발의 요인 중에 하나이다.

히데요시의 성격상 돌출 행동과 비상식적 언행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과대망상적 자만심이 가장 큰 요인으로 보인다.

“여기에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장조카인 자차히메(당시 18세, 후에 요도기미로 불림)와 58세의 나이에 첫 아들 쓰루마쓰를 얻게 되는데 쓰루마쓰는 출생 후 3년 만에 이유 없이 급사를 하게 된다.

쓰루마쓰의 급사는 히데요시에게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주었고 그는 천하를 가졌으나 자식이 없는 신세를 한탄하다가, 죽기 전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명예욕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이 또한 임진왜란의 요인 중 하나로 보이는 대목이다.

아무튼, 임진왜란에 있어 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3사람이 소하치의 소설에 있어 주요 인물로 부각되는데, 히데요시 사후에 벌어지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가토 기요마사만이 이에야스의 편에 서서 일본 평화의 주축 세력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한편, 임진왜란의 전황은 히데요시의 예상과 달리 조선의 의병과 승병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고 명나라, 조선과의 협상도 지지부진한 채 답보 상태로 빠져든다.

임진왜란의 실패는 히데요시의 건강 악화를 재촉하여 결국 1598년 임종에 이르게 된다.

죽기 전 히데요시는 그의 둘째 아들 히데요리의 안위를 위하고자, 이미 처남 매부 지간인 이에야스에게(1부에서 언급) 히데요시의 아내 요도기미의 동생 다쓰히메를 이에야스의 아들 히데타다와 결혼을 맺게 한다.

즉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와 처남 매부지간이면서 이에야스의 아들 히데타다와는 동서지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다가 아니다.

히데요시는 홀로 남은 히데요리(양자인 히데쓰구는 자결하였고, 쓰루마쓰는 급사)를 히데타다의 갓 태어난 딸 센히메와 맺어줄 것을 이에야스에게 신신당부한다. 이로써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와 2중 3중의 혈연 관계로 묶어 두는데 히데요리와 센히메와의 관계는 족보상으로 무어라 불러야할지 알 길이 없다.”


1592년 4월에 시작된 임진왜란은 약 3년이 지난 후 휴전 아닌 휴전으로 답보 상태에 이르게 된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명나라의 심유경 사이에 강화 회담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일본은 부산 울산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군사를 서서히 철군을 한다. 불행히도 강화 회담에 조선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일본은 일본대로, 명나라는 명대로 자신의 유리한 측면만을 생각하며 강화에 나서지만 서로 어처구니없는 주장만을 확인하게 되는데,

먼저 명나라에서 도요토미에게 보낸 문서에는 3가지 조항이 있다.

1. 봉封은 허락하나 공貢은 허락하지 않는다.

즉 도요토미를 일본 왕으로 책봉할 것이나, 조공등의 교류는 허락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2. 모든 군사가 바다를 건너 돌아갈 것.

3. 영구히 조선을 침범하지 않을 것 등이었다.


조선의 선조가 항복 문서를 들고 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던 도요토미는 오히려 아래와 같은 7대 조항을 요구한다.

1. 명나라 황제의 딸을 맞아 자신의 비로 삼을 것.

2. 뱃길을 다시 트고 상선을 왕래시켜 무역을 번창하게 할 것.

3. 일본과 명의 양국 대신이 서약서를 서로 교환하여 우호를 도모할 것.

4. 조선의 4도(경기, 충청, 전라, 경상)를 떼어주고 나머지 4도 및 한양은 조선에 돌려줄 것.

5. 조선의 왕자 1인, 대신 1인을 볼모로 일본에 머무르게 할 것.

6. 조선의 두 왕자를 돌려보내는 것은 이미 시행되었음.

7. 조선으로부터 영원히 일본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받아줄 것.

상기 6항의 두 왕자라 함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의 명에 따라 임해군이 함경도로 가서 근왕병을 모집코자 하였으나 그 곳 백성들을 괴롭히는 행패를 일삼다가 국경인이라는 조선인들이 다른 왕자 순화군과 함께 생포하여 왜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겨진 사건을 말한다.


아무튼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가 결렬되자, 도요토미는 다시 군사를 내어 재차 조선을 침범하는데, 이를 정유재란이라고 부른다.

왜군은 임진왜란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다 치밀하게 조선 반도를 공략하기 시작했고, 우선 무참하게 패했던 진주성 탈환에 전력을 기우린다. 그리고 전과 달리, 곡창지대인 호남 지방을 점령하는 작전을 개시한다.

정유재란에 따른 피해가 더 클 수밖에 없었고, 전쟁도 더욱 치열하기만 했다. 심지어 도요토미는 조선인의 수급대신 코를 베어 본국으로 보낼 것을 명하기까지 하는데, 현재까지 쿄토 시에는 코무덤(어감이 너무 섬뜩한지 지금은 귀무덤이라고 부르고 있음)이 남아 있고, 약 12만 6천 명 정도의 조선인이 희생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진주성 또한 2차 전쟁에서 함락되었고, 이때 왜군 장수와 함께 투신한 논개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조선반도에 파견된 명나라 군대는 거만하기가 이루 말 할 수 없었으며 조선의 군관민은 이들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대느라 그 고통은 극심하였다. 오죽하면, “일본군은 얼레빗이요, 명나라군은 참빗이다”라는 말까지 생겨났을까?


그러나, 1598년 권율·이시언의 조명 연합군은 직산에서 일본군의 북상을 막았고, 삼도수군통제사에 복귀한 이순신 역시 12척의 함선으로 300여 척의 일본수군을 명량에서 대파하였다. 수륙 양면에서 몰린 일본군은 패주하여 남해안 일대에 몰려 있었다.

1598년 1월 권율 지휘하의 조선군은 울산의 가토군을 공격했고, 각 지역에서 일본군 잔당들을 섬멸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598년 9월 도요토미는 숨을 거두고, 이에 따라 일본군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에 철군을 시작한다. 11월 이순신 휘하의 수군이 노량에서 일본의 퇴로를 차단하여 해전에서 수많은 왜군들을 무찌르고 승리와 함께 이순신은 순직한다. 이 노량해전을 끝으로 일본과의 7년에 걸친 전쟁은 끝나게 되었다.

7년간의 전쟁에서 승자는 아무도 없었다.


임진왜란이라는 참혹한 역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일지 그리고 당시의 면면을 조금 더 들여다보고자 한다.

1. 황윤길과 김성일이 통신사로서 일본을 방문하였고, 히데요시와 굴욕적인 면담을 가진 바 있었다.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 야욕에 관하여 구체적인 보고를 하였으나 김성일은 민심의 동요를 염려하여 전쟁의 소지가 없다고 평가하였다. 이 같은 상반된 보고에 있어 선조를 비롯한 조정 중신들은 하나같이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만 골라 자의적인 해석을 했다. 당시 3정승 중의 하나였던 유성룡이 후에 징비록을 남겨두고 명나라와의 교섭에 있어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모두가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 아니었을까? 당시 일본은 봉건주의 국가로서 영주와 무사 간에는 계약 관계로 이루어진 사회였다. 전쟁이 끝난 후 무사 계급은 낭인이 되어 생계가 어려웠던 것이었고, 히데요시는 팽창적 진출을 감행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일본은 전쟁 준비를 하기 위해 이시다 미쓰나리의 주도하에 마치 5호 담당제 같은 제도를 구상하여 도망가거나 탈향하는 백성들이 있을 시에는 그 책임자를 문책하도록 할 정도로 군량미와 전쟁 물자를 악착같이 모아뒀던 것이다. 일본 시골 농민들 모두가 전쟁이 발발할 것을 알고 있는 엄연한 사실인데도 그리고 이 같은 보고를 구체적으로 하였음에도 이를 모르는 척 방관하였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경상도와 전라도 주요 거점에 대한 성벽을 증축하는 등의 나름 대비 태세를 갖췄지만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 중도에 그만뒀다는 기록도 있다. 200년간의 태평시대를 누리며 안이한 자세로 당쟁에만 골몰했던 대가가 무엇이었을까.

2. 선조는 임진왜란 후에 수훈을 세운 무관과 문관들을 치하하는데, 1등 공신으로 세 사람이 거론된다. 이순신, 원균 그리고 권율 장군이다.

이순신의 업적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원균이란 인물을 과도하게 혹평한 측면이 있지 않을까? 단 3명에게만 주어지는 1등 공신의 자리에 원균이 포함되어 있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3.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 회담에 전쟁 피해국인 조선이 참여할 구석이 없었다는 점은 마치 6.25 전쟁 휴전 협정에 당사국인 대한민국이 제외되었다는 것과 흡사하다.

외세에 의존하는 국방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 지를 다시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임진왜란이후 정확히 300년 후에는 동학혁명을 쟁점으로 청나라와 일본 간에 조선반도를 두고 엇비슷한 경합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치욕의 역사가 시작된다.

역사가 주는 교훈을 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P/S

7년간의 전쟁 이후 명나라와 일본의 지각 변동에 관하여 덧붙이고자 한다.

명나라는 만주를 중심으로 한 여진족의 세력이 점차 커져가고 있었으며 누루하치란 자가 중심에 있었다. 서서히 자멸해가던 명나라는 후금(청나라)에 조금씩 자리를 내어주다가 한 세대가 지난 후에 정복당하게 되고 한족으로서 마지막 왕조가 된다.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 이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소위 간토 8주 라고 하는 일본 동북부 지역에 대한 토벌 전쟁을 성공리에 수행하였다.

이에 히데요시는 기존 이에야스의 본거지인 미카와 지역을 내어놓고 그가 새로 개척한 간토 8주로 영지를 이전할 것을 명령한다.

히데요시의 속셈은 지역적으로 자신의 본거지인 오사카와 가까운 곳을 측근이나 친척으로 방어를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고향과 본거지를 옮겨야 하는 상황에서 많은 고민을 한다.

이 시점에서 히데요시에 반발하여 한 판 승부를 보든지, 간토 8주로 옮기든지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가장 용맹하기로 소문난 미카와의 장수들은 이구동성으로 결사항전을 부르짖지만 이에야스는 혀를 깨무는 고통을 인내하며 진정한 일본 나라의 평화를 추구하는 대망의 큰 그림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가까스로 히데요시가 어렵사리 이룩한 평화의 물결 속에서 지금 다시 전쟁을 치러야 하는지 아니면 인내해야 하는지 과연 무엇이 옳은 것인지...

결국,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에게 ‘쿄토에는 오사카같은’ 방어벽과 물산의 집산지가 있듯이, 슨푸(현 시즈오카)에도 이 같은 도시 건설의 필요성이 있음을 호소한다.

이것이 바로 에도 시대 탄생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히데요시와 이 같은 타합을 이룬 후에 이에야스는 측근들과 함께 눈물을 머금고 간토 8주로의 영토 교체를 받아들인다.

슨푸를 본거지로 하면서 에도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바로 이런 면에서 “인내의 이에야스”라는 칭호가 나오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이에야스는 5세때부터 18세까지 10여년의 볼모 생활을 비롯하여 죽을 때까지 근검 절약을 생활 신조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정적이나 반란군을 진압할 때에도 아무리 힘의 우위에 있을지라도 손쉬운 완력을 최대한 자제하는 등, 이 모든 행동거지가 “인내”라고 하겠다.


천우신조라고 하던가? 전화위복이라고 할까?

이 같은 영토 교체는 이에야스에게 임진왜란 동안 자신의 힘의 축적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시간이자 계기로 작동하는데, 그 이유는 히데요시가 조선 침공을 결정할 당시 영주들로부터 군사 및 군량미 차출에 있어 간토 8주의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이에야스를 책무에서 제외하기에 이른다. 이는 임진왜란 동안 소실된 군사, 초토화된 민생 등으로 모든 영주들이 허덕이고 있을 때 이에야스만이 건재한 군사와 양곡을 비축할 수 있었으며, 이는 히데요시 사후 힘과 명성을 함께 보유한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의 실질적인 후계자로 발돋움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개막을 의미함이다.


----- 조선왕조실록 제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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