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봉승의 조선왕조 500년
제 16 권 [인조반정]
동 16권은 제목과 달리 광해군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인조반정(1623년)과 이괄의 난(1624년)까지를 다루고 있다.
개인적으로 광해군에 관한 이야기가 궁금했는데, 그 이유는총명했던 광해군이 어떻게 조선 역사상 2번 밖에 없는 반정의 대상이 되었는지 그것이 알고 싶었다.
선조는 적자가 아닌 서자 출신의 왕이다 보니 내심 자신의 적자로 보위를 잇기를 바랬던 바 있었으나, 후궁으로부터 임해군과 광해군 등 여럿 왕자를 생산하게 된다.
임진왜란 동안 광해군에 의지하여 분조分朝를 통한 수습을 하는 등, 광해군의 외교술과 총명함에 많은 의지를 해 온 것이 사실이었지만, 선조는 죽는 순간까지 광해군에 대한 미움을 버리지 않는다. 특히 왜란 전에는 정철이 광해군에 대한 세자 책봉을 건의했다가 귀양을 갔던 적이 있었고, 왜란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분조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조정에서는 광해군에 대한 세자 책봉을 명나라에 주청을 하지만, 형인 임해군이 있다는 이유로 정식 책봉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이에 수차례에 걸쳐 주은사를 보내기도 했다.
1600년(선조 33)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죽자, 1602년 선조는 51세의 나이에 18세 왕비를 맞아들이는데, 그가 후에 인목대비가 된다. 그때 광해군의 나이는 28세였다. 그리고, 1606년 광해군 나이 32세에 선조의 정비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출산하게 된다.
1608년 선조가 세상을 떠나는데, 광해군은 34세의 나이, 세자로 지명된 후 17년 만에 보위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형인 임해군의 존재를 문제 삼아 승인을 하지 않고 있었다.
선조 말기부터 세자 광해군에 대한 선조의 타박은 심하기가 이루 말 할 수 없었으며 그때마다 김상궁(김개시)으로부터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아가며 광해군은 인내한다.
동복同腹 형인 임해군, 자기보다 나이어린 모후로 등장한 인목왕후, 그리고 영창대군.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조정 세력 속에서 광해군의 등극은 시작부터 피비린 내나는 옥사獄事가 예견되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복잡한 조정 세력 구도 하에서 광해군은 궐내 소식에 정통하고 정세 판단에 일가견이 있는 개시 김상궁의 조언에 많이 의지하게 되고, 김상궁 그녀는 타고난 미모와 화술로 광해군을 매혹하여 광해군이 가장 총애하는 애첩으로 자리 잡게 된다.
개시 김상궁은 광해군을 등에 업고 정사에 개입함은 물론 사적으로 관직을 사고파는 일에 적극이었고, 심지어 광해군의 후궁들로부터도 뇌물을 챙겨가며 그들의 편의를 봐주곤 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왕후궁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마치 명종 때의 정난정이 연상되는 인물이다.
개시 김상궁의 예를 통해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광해군은 그의 총명함과 달리 실제 성격은 매우 우유부단하고 심기가 약한 결정 장애가 있던 인물이었다고 보인다.
선조가 승하한 후 자신의 친정체제 구축에 미진했던 것은 선조의 유교라는 이유로 대다수 중신들을 유임시켰으며, 그러다보니 원로 중신들의 의지에 내내 끌려 다니다 반정을 맞이한 형국이 되었다.
광해군 시절 무엇보다 주목할 인물이 있는데, 다름 아닌 홍길동전의 작가 허균이다.
허균은 서경덕의 수제자인 허엽의 아들로서 그의 이복 형 허성은 임진왜란 직전 일본에 갔던 통신사 중의 일인이고, 동복 누님이 허난설헌으로 유명한 허초희이다.
허균은 유불선儒彿禪 심지어 서학西學(천주교)까지 통달한 인물로 알려지고 당대 최고의 문필가였다. 자유분방한 영혼을 가진 기인奇人이라 할 수 있는데, 그는 서자 출신인 스승 이달의 영향을 받아 서얼庶孼 문제에 관하여 관심이 많았다. 즉 인재를 널리 등용하지 않는 조선 사회의 폐쇄성을 비판하고 경국대전으로 금지된 서얼금고법庶孽禁錮法의 혁신을 주장하였다. 그의 사상은 허균이 공주 목사로 부임하면서 서얼 출신의 인재들을 식객으로 받아들이며 소위 강변칠우라는 서얼들 간의 모임을 주선한다. 강변칠우는 서얼의 등용이 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힘을 키우고자 하는데, 그 수단으로 문경새재에서 은 700 냥을 강탈하는 소위 칠서의 난이 일어난다. 이 사건을 당시 실세였던 이이첨이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시키는데, 박응서를 고문하여 ‘은상을 공격한 것은 선조의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을 옹립하는 거사 자금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는 자백을 받아낸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이자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이 있다고 조작한다. 그리고 이는 바로 계축옥사로 이어지는데,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처형되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어 증살(蒸殺: 방에 가두어 문을 걸어 잠그고 불을 때서 쪄서 죽이는 형)당한다.
이때 허균은 이이첨을 찾아가 몸을 의탁하는데, 이는 고양이 앞에 있는 생쥐의 신세가 됨을 의미한다. 이이첨은 허균의 필력과 인지도를 이용하여 인목대비의 폐모 상소를 올리게 하고, 다른 한 편으론 허균의 서얼평등 사상을 탄핵하는 상소를 준비한다. 이렇게 하여 이이첨은 허균을 통하여 폐모론을 현실화하고 다른 한편으론 허균에 대한 탄핵을 추진한다.
허균의 민본주의적 사상은 홍길동전에서 유감없이 나타나는데, 동 소설이 화근이 된 것은 아니지만, 평소 그의 남다른 기행과 당시 그의 불온한 사상으로 인하여 그는 역성혁명의 모함으로 능지처참을 당한다.
영창대군의 증살보다 인목대비의 폐모는 유교 사상이 팽배한 당시에 많은 선비들에 있어 공감을 받지 못하는 조치였지만, 광해군 세자빈의 아버지 이이첨은 영창대군을 제거한 후에도 인목대비의 폐모를 적극 주청하여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에 가둬두고 이를 서궁西宮이라 부르도록 한다. 비록 나이는 10살이나 어리지만 인목대비는 광해군에 있어 모후의 지위에 있는 것이다. 영창대군의 증살에 이어 인목대비의 실제적 감금은 도덕적 지탄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이는 반정의 주요 원인 중에 하나로 작용한다.
광해군에 있어 빠트릴 수 없는 것이 북방 외교이다.
제15권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 만주 지역을 기반으로 한 후금의 위세는 점차 강대해져서 명나라를 위협하고 있었는데, 그 시대 상황을 예전 얼웨허의 작품 [강희대제]를 읽고 쓴 독후감에서 아래와 같이 발췌하고자 한다.
“되짚어봐야 할 것은 명나라의 멸망 과정이다.
당시 후금이었던 청나라의 위세에 정복되었다기 보다 명나라는 자멸의 길을 스스로 걸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즉 명나라 말기에는 황실과 관료들의 부패로 말미암아 여기저기에서 민란이 끊이지 않았고 특히 이자성을 필두로 한 반군의 세력은 온 나라를 삼킬 듯 했는데 이 때 후금의 누루하치가 명나라의 장수였던 오삼계, 상가희, 경정충 등과 결탁하여 이자성은 물론 명나라의 잔존 세력이자 마지막 황제 영력제를 제거하기에 이른다.
이런 연유로 강희의 통치론은 청이 명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보국안민을 위하여 명나라의 대체 국가로서 청나라가 등장하였다는 이론을 전개하기에 이른다.
명나라 말기를 노래한 대목이 가슴에 와 닿는다.
“ 군주가 성 위에 깃발을 세워서 항복을 하는데,
첩은 깊은 궁궐에서 낮잠만 자는구나“
이렇게 명나라를 저버리고 후금과 결탁한 3명의 장수들을 번국(藩國)의 왕으로 대접을 하기에 이른다. 이를 삼번(三藩)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오삼계는 평서왕으로서 운남과 귀주지역의 번을 갖고, 상가희는 평남왕으로서 광동 지역을, 경정충은 정남왕으로서 복건지방을 맡아 중국의 강남 지역을 통치하게 된다.“
광해군 시대는 명과 후금간의 알력이 막 시작되어 명나라에서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게 된다. 만주를 중심으로 한 후금을 협공하자는 것이었다.
광해군은 대세가 이미 후금으로 기울어졌음을 직관하고 될 수 있는 한 명나라의 파병 요청을 차일피일 지연을 한다. 하지만 향명배금向明排金 사상에 물들어 있던 대다수 중신들로부터 심각한 비난에 직면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파병을 하게 된 광해군은 도원수 강홍립에게 조선 군사들의 안위를 위하여 밀지를 내리는데, 두 가지 사항이다.
1. 우선은 국경에 머물면서 될 수 있는 한 도강하지 않는 것을 최상책으로 하라.
2. 그 형세를 보아 향배向背를 정하라.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는 것은 상황이 엄중하면 투항해도 좋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1만 3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압록강으로 간 강홍립은 명나라와 연합한 전투에서 6,000명을 잃고 남은 병사 7,000명과 함께 후금에 투항을 한다. 명나라의 요동도독 유정이 전사하는 등, 욱일승천으로 기세가 오른 후금의 병사들에 있어 조명 연합군은 상대가 되지 않는 판국이었다. 이 같은 대륙의 급격한 정세 변화를 깨닫지 못한 조정 중신들은 하나같이 강홍립의 투항을 두고 비난 일색으로 떠들썩하지만 광해군은 내심 강홍립의 결단을 지지한다. 광해군은 후금과 상호 불가침 조약 성격의 강화를 맺고자 하지만,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에 빠져있는 중신들은 이를 죽기 살기로 반대하는데 결국 이 같은 북방 외교 노선의 차이는 광해군을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상기 언급한 바와 같이 광해군은 우유부단한 성격과 심기가 약한 탓에 측근을 자기 사람으로 채워 두지 못했는데, 그나마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 즉 덕으로 다스리지 못하면 힘으로라도 통치해야 함에도 그에게는 그런 정치적 의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이 반정의 대상이 된 주요 원인은 3가지이다.
1. 모후인 인목대비를 삭호하고 서궁에 유폐시키는 부도한 일이 저질러졌다는 것
2. 이이첨, 개시 김상궁 등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조정은 썩을 대로 썩어 있었다는 것.
3. 향명배금 사상에 젖은 중신들에게 있어 강홍립을 오랑캐에 투항하게하고 화친을 도모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혼조의 상황에서, 이귀를 비롯한 김유, 김자점, 이괄 등은 광해군의 이복 형제인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을 옹립하고자 반정을 계획한다.
이들의 거사는 사전에 누설되어 밀고자가 있었음에도 광해군은 항시 그랬듯이 거짓 고변에 근거한 또 다른 옥사獄事가 일어나는 것에 미리 진저리를 치고 주연과 향락에 빠져 이를 애써 무시한다. 그의 운명이 다 한 것이리라.
1623년 능양군을 옹립한 반정 세력은 창덕궁을 진압하고 인목대비가 있는 경운궁에서 옥새를 건네받는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으로부터 10년간의 유폐된 생활을 떠올리면서, 광해군의 36 가지의 죄목이 적힌 비망기를 내리고, 광해군으로 하여금 경운궁의 뜰에 엎드려 자신이 내린 비망기를 큰 소리로 외치게 한다. 자신의 유폐와 어린 영창대군의 죽음을 떠올리며 적은 비망기의 내용은 광해군에게 천지에 다시없을 수모를 안겨다 준다. 아녀자의 원한은 오뉴월에 서리로 내린다고 했던가! 비망기의 내용을 요약하면 폐모살제廢母殺弟, 즉 모후를 폐하고 동생을 죽인 죄이다.
인조반정으로 숙청이 된 사람은 120여명에 이르고, 유배, 삭제, 파직된 사람은 부지기수였다. 중요한 점은, 이제 향명배금은 조선의 국시가 될 수밖에 없었다. 후금 땅에 연금되어 있는 강홍립, 김경서 등의 장수들을 배신자로 낙인찍어 버리는 것과 다름없으며 광해군의 밀지에 따라 슬기롭게 처신한 강홍립은 졸지에 나라를 배신한 반역자로 전락하게 된다. 이는 5년 뒤에 밀어닥칠 ‘정묘호란’의 불씨를 댕기는 일이었다.
미래의 난국을 아는지 모르는지 반정 주도 세력들은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통에 공신책록 또한 여섯 달이나 지나서야 이루어졌다. 애당초 김유와 이괄의 불화가 있었지만 2등 공신에 책록된 이괄의 불만은 갈수록 쌓여갔고, 부원수겸 평안병사로 이괄을 제수함에 그의 분노는 극에 달하여 있었다.
외방으로 발령이 난 것에 불만을 갖고 있던 이괄에게 조정은 오히려 이괄의 역모를 의심하게 되고, 이에 그의 아들을 불러서 문초를 하고자 한다. 어떤 아비가 아들을 의금부에 순순히 보낼 것인가? 결국 인조반정 1년 만에 이괄이 선조의 10번째 아들 흥안군을 옹립하고자 난을 일으켰다. 이괄의 반군은 기세가 대단하여 관군을 밀어내고 도성에까지 진입하는데, 인조는 수원으로 갔다가 공주까지 피신하는 몽진을 해야만 했다.
도성에 진입한 이괄은 경복궁에 둔진하고, 흥안군의 즉위식도 거행했다. 또 하나의 조정이 생겨난 셈이다. 미처 난을 피하지 못한 조정의 미관말직과 패잔병들은 속속 이괄의 휘하로 모여들었다. 그런 북새통 속에서 관군은 병력을 정비하여 길마재(현재의 무학재)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게 되고, 피신하던 이괄 일당은 그의 수하인 기익헌과 이수백에 의하여 잠든 사이에 사살이 된다. 어이없는 종말이었다.
*P/S
광해군이 즉위한 1608년경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하여 통일된 나라의 수립과 함께 쇼군을 중심으로 하는 도쿠가와 막부의 시대가 열린다. 광해군의 혼조와 인조반정이 일어나는 시기에 일본의 변화가 어떠했는지 야마오카 소하치의 작품 “대망”을 통하여 비교해 보고자 예전 독후감 내용을 발췌한다.
“이에야스는 장군의 지위를 아들 히데타다에게 물려준 이후, 일본의 총화와 나라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우린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보다 큰 그림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국민 통합에 절대적 필요성이 있는 황실을 극진히 대하여 잘 보존하였고, 튼실한 대비로 외부로부터의 전쟁을 미연에 방지토록 했다.
신불(神佛)의 뜻을 깨닫고자 수련을 통한 구도의 길을 찾는데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를 생불(生佛)이라 칭하기도 한다.
120년 이상 동안 전쟁으로 인해 피폐될 대로 피폐된 민중의 영혼을 구하고자 하야시 도슌을 발탁하여 유교를 적극 받아 들였으며, 인쇄 출판 등을 통하여 국민 계몽에 노력하였다.
농민으로 하여금 사공육민(四公六民: 소작인이 40%를 갖고 60%를 영주에게 납부)의 소작제에 빈틈이 없도록 직소제를 창안하기도 했다.
특히 이에야스는 좁은 일본 국토를 탈피하고자-히데요시의 정벌과 달리, 세계 주요 국가들과의 통상을 적극 장려했는데,
1609년 네덜란드와 무역을 허가하여 히라도에 상주관을 설치하도록 하였고, 안남(베트남)으로부터 사절단을 맞이하고, 사쓰마의 시마즈 가문에 편입된 오키나와 류규 왕국의 쇼네이 왕을 에도로 초빙하는 내용이 나온다. 더불어 명나라 복건성 총독과 교역을 인가하는 내용도 있다.
1610년 스페인의 루손(현 필리핀)총독 돈 로드리고(Don Rodrigo)가 새로 부임할 멕시코로 가는 길에 난파하여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배를 새로이 건조하여 일본인과 함께 멕시코 연안까지 입항하도록 선처하였다.
이에 스페인의 특사로 세바스찬 비스카이노가 이듬 해 방일하여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당시 비스카이노는 특사의 목적 외에 전언한 지팡구(현재의 사도)를 찾아 오랜 기간 일본에 체류하며 일본 연안의 지도를 만들기도 했다.
*멕시코는 당시 누에바 에스파냐(Nueva Espana, New Spain으로 불렀다)가 국명이었고, 나는 약 30년 전 멕시코에 체류할 때 태평양 연안 Acapulco라는 휴양 도시를 일본인 가족과 함께 갔었는데, 일본인 방문 기념비가 근처에 있다고 다녀온 기억이 있다. 아마 이때(1610경) 돈 로드리고를 수행했던 일본인이 남긴 흔적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1613년에는 영국 사령관 존 세이리스가 제임스 1세의 국서를 갖고 방일하여 통상 조약을 맺었다.
이 같은 일련의 통상 무역을 장려하여 이에야스 집권 초기에는 9척에 지나지 않던 무역선이 10년 후 200척으로 늘어나게 되었으며 이를 관장한 인물은 자야 시로지로였는데 세계 동향에 대한 발 빠른 정보를 바탕으로 국제 통상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현재 세계를 주름잡는 일본 재벌 상사들의 효시이자 정신적 창시자가 바로 자야 시로지로라 해도 과언이 아닐 성 싶다."
당시 일본은 스페인, 포르투갈인들을 남만인南蠻人이라 불렀으며 그들로부터 주로 선박 건조와 항해술을 배우고자 하였고, 영국과 네덜란드인들을 홍모인紅毛人이라 부르며 총기를 비롯한 병기 제작 기술을 배우고자 막부 차원에서 우대를 했다.
---조선왕조 500년 제 16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