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봉승의 조선왕조 500년
제 17 권 [남한산성]
제 17 권은 인조반정 이후 이괄의 난이 진압된 1624년부터 정묘호란(1627)과 1636년 병자호란까지의 실록을 담고 있다.
인조는 반정 세력의 힘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짧은 시간에 3번의 몽진(蒙塵:머리에 먼지를 쓴다는 뜻으로,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안전한 곳으로 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경험한다.
첫 번째는 이괄의 난으로 공주로 도피하였고, 두 번째는 정묘호란때 강화로, 그리고 병자호란때는 강화의 길이 차단되어 부득불 남한산성으로 몽진을 떠나게 된다.
약 260년 후에는 고종이 아관파천(1896)을 하게 되고, 현대사에 접어들면서 6.25전쟁 때 이승만의 한강다리 폭파가 연상되는 부산 피난을 비슷한 경우라 하겠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7년 전쟁이 끝나고 3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조선은 정묘호란을 겪게 되고, 그리고 9년 만에 병자호란의 시련을 당해야만 하는데, 이는 반도 국가로서 섬나라 일본의 침입과 북방 대륙 세력권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고 자기 합리화를 하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너무 많다. 즉 이런 식으로 역사를 두루뭉술하게 훑고자 한다면 역사 공부 자체의 의미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제16권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광해군에 대한 고찰이 더욱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인조 치세 동안 벌어진 두 차례 호란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된다.
광해군은 연산군과는 질적으로 다른 인물이다.
아버지 선조로부터 받은 박해로 말미암아 정서적 불안은 있다손 치더라도 그의 국제 정세 판단과 외교력은 돌이켜보면 정확한 진단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광해군의 실정失政이 다소 있었지만, 그를 폐위시킨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향명배금주의向明拜金主義에 절대적으로 치우친 조정 중신들이었다.
240년간 명나라를 아버지 국가로 모시던 폐습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럴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는 기존 사대부들에게 있어 조상이 하던 바를 답습하고 신분과 혈연을 통한 지위 상승과 유지에 골몰했던 시간이었다.
임진왜란을 기화로 조선 조정과 백성들은 명나라에 대한 의존이 과연 조선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지에 의문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고, 당시에는 ‘왜놈은 얼레빗이요, 명군은 참빗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명나라 군사에 의한 수탈 또한 극심했던 것이다.
광해군이 선조의 눈 밖에 난 이유 중의 하나로서 임진왜란 동안 광해군은 ‘명나라가 조선을 돕는 이유가 후금과 대치한 상황에서 후방에 대한 견제 세력으로서 조선과의 협력이 절대적인 것이기에 이를 외교 전술에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했다가 선조로부터 타박을 받고 경원시되기 시작한 점도 있었다.
명나라에 대한 절대적 사대주의가 바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결정적 원인이 되는 것인데, 광해군의 밀지에 따라 강홍립이 후금에 투항한 것은 명분보다 실리를 앞세운 외교 전략의 하나였다. 후금의 누루하치는 조선과 명나라 간의 관계를 십분 이해하였으며 조선이 명나라에 대하여 가지는 굳은 마음을 오히려 숭고한 정신으로 인정하고자 했다.
그러나 후금을 오랑캐 집단으로 비하하고 멸시하는 데서 두 나라 간의 감정이 고조된 것이라 해석해야 할 것이다.
강홍립의 투항이후 누르하치는 명나라와의 대결에 전력을 쏟고 있었고, 조선에 대항할 여력이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누루하치가 명나라의 명장 원숭환과의 대결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고 타계하자 조선은 후금의 멸망과 명나라의 부흥을 예견하며 기뻐하였다. 그러나 35세의 나이로 뒤를 이은 홍타이치는 누르하치가 창설한 ‘8기 제도’를 재정비하여 내정을 착실히 다진다. 그리고 누르하치에 대한 조문 사절조차 파견하지 않았고, 그의 등극 때에는 하례 사절단도 보내지 않은 조선에 대하여 극도의 분노심을 품는다. 오랑캐의 족장의 장례에 예를 표할 필요도 없다는 조선의 태도는 욱일승천으로 일어나는 후금의 세력을 전적으로 오판한 것이다.
게다가 광해군의 밀지에 따라 투항한 강홍립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은 고국에서 가장 비열한 배신자로 낙인이 찍혀 있는 것이며 이 또한 표현하기 힘든 적개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광해군의 실질외교가 참담하게 무너져 내린 결과가 바로 정묘호란이다.
“우리는 조선과 형제지의로 지내기를 갈망해왔는데, 저들이 어찌 우리의 국장에 조문 사절을 보내지 아니하는가. 이는 필시 조선이 우리를 아직도 오랑캐로 여기고 있음이니, 발병 남진을 해서라도 우리의 힘을 보여줄 것이오.”
홍타이치의 명을 받은 아미타수는 요동에 주둔하고 있던 3만의 병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진격한다. 이괄의 난으로 어수선한 시국에 들이 닥친 후금군은 이렇다 할 전투도 없이 의주를 점령하고, 의주부윤 이완을 끓는 기름 솥에 넣어 죽이는 등 참혹하고 무자비한 도륙을 감행한다. 더불어 곽산군수 박유건과 정주목사 김진 등도 기생의 치마폭에만 쌓여 있다가 사로잡히게 된다. 그들의 정실부인을 끌고 나온 아미타수는,
“네놈들은 머리를 깎아 내 병졸이 되고, 저 계집들을 내게 준다면 목숨만은 부지하게 될 것이니라. 따르겠느냐?”
다음날 김진과 박유건은 말고삐를 잡았다. 바로 그 말 위에 아미타수의 노리개로 변한 정실부인들이 타고 있었다. 박유진이 말에 탄 정실부인과 주고받은 말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네 어찌 정조를 잃고도 버젓이 살아 밝은 햇빛을 본단 말이냐? 네가 그런 년인 줄은 미처 몰랐구나.”
“영감은 어찌 나라에 대한 절개를 잃고도 버젓이 살아 밝은 햇빛을 본단 말이오. 영감이 그런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소.”
왜란에 비하여 호란이 훨씬 더 잔혹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국익을 위한 전쟁이라지만 무시당한 자의 보복이기에 그만큼 더 잔인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강화도로 몽진을 떠난 인조는 석 달 동안의 교섭 끝에 삽혈을 통하여 후금과 화친의 조약을 맺는다.
오랑캐라고만 보아온 금나라와 대등한 자격으로, 아니 오히려 조선을 깔아뭉개려는 위치에서 맹약을 했기에 마음의 상처가 깊이 남은 외란이 바로 정묘호란이다.
정묘호란이라는 외침은 지나갔지만, 조선 조정 내의 갈등은 최명길을 중심으로 하는 화친파와 김상헌을 필두로 하는 척화파로 나뉘어 공론이 분열된다. 이 같은 갈등은 향명배금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음이며, 홍타이치의 무리한 요구(식량 조달, 군사 지원등)가 있을 때마다 조선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명나라가 저무는 태양임을 알면서도 명분을 좇지 않을 수 없고, 후금(청이라 칭함)의 기세에 부응하여 실리만을 좇을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런 와중에 명나라와의 전쟁을 위한 힘을 비축한 홍타이치는 후방 세력인 조선 정벌을 계획하던 차에 결정적인 꼬투리를 잡아내는데, 그것은 인열왕후(인조의 중전)의 서거에 파견한 조문사절로부터 발생한다. 조정 대신들은 청나라를 여전히 오랑캐로 여기고 있음에 그들의 조문을 호락호락 받아들이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문사절로 온 마부대와 용골대가 조문 제례를 올리는 날, 빈전도감들은 오랑캐의 제례가 마땅치 않다고 생각하여 빈 천막을 치고 거기를 빈소인 양 속였던 것이다. 마부대와 용골대는 빈 장막에 제물을 진설하고 제례를 올리기 시작했는데, 그때 뜻하지 않게도 일진돌풍이 불어 닥치더니 장막의 한쪽을 들추어 버린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들려 왔다. 홍타이치의 측근인 마부대와 용골대는 자신들을 해치려는 줄 알고 부리나케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이들이 당한 수모는 그대로 홍타이치에게 보고가 되었고, 바로 전에 인목대비의 조문 때 당한 푸대접과 멸시 등과 합해져서 청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인조는 겉으로는 객관으로 사람을 보내 그들을 달래보려 하지만 내심으론 통쾌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곤 이를 기화로 조선의 공론을 척화로 하고 오랑캐의 침공에 대비하라는 어의를 중외에 반포한다. 조정의 분위기는 척화론 자들의 독무대였다. 앞을 다투어 척화의 소를 올려대곤 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냉철하게 조선의 군사력과 오랑캐의 군사력을 비교해보는 사람은 없었다.
청나라가 도성을 심양으로 옮긴 이후 사신으로 간 박인범이 돌아와 인조에게 아뢰기를,
“오랑캐의 한汗이 이르기를 ‘동짓달 스무닷새까지 왕자와 대신을 보내서 정중히 화의를 청하지 않는다면, 크게 군사를 일으켜서 조선을 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거짓이 아닌 듯 싶었사옵니다.” 라고 한다.
인조는 며칠을 생각한 끝에 박노와 박난영을 사신으로 삼아 심양으로 떠나가게 하였으나, 이미 때가 늦어 홍타이치가 기한으로 정한 11월 25일을 넘기고 있었다.
12월 6일 기어코 청나라는 군사를 일으켜 의주를 침범해오고 있었다. 청의 장수 용골대는 의주부윤 임경업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는 터라 의주 백마산성에서 대치하고 있는 임경업과의 전투를 피해 우회하여 남진을 거듭한다. 군사와 병학에 일천한 도원수 김자점은 모든 병사들이 각 지역별 산성으로 들어가 대치하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청군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산성을 우회하여 급속한 속도로 남진을 계속한다. 김자점의 군령이 잘못된 것이다. 그로 인해 산성에 진을 친 조선군보다 심지어 파발의 속도를 앞질러 청병들이 남진을 하게 됨에 따라 파발들이 적진을 누벼야 했던 탓으로 청병에게 잡혀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여차하는 순간에 청병들이 개성에 까지 진입하게 된 것이다.
다급해진 인조와 신료들은 파천을 결정하고 종묘의 신위와 왕자, 빈궁등이 먼저 강화로 가고, 자신은 좀 더 대세를 살피고자 한다.
하지만 12만 대군의 청병은 14일 만에 개성을 지나 한양으로 남진하고 있다는 장계가 도달한다. 곧이어, 선봉 마부대가 홍제원을 점령하고 강화로 가는 길을 차단하였다는 보고가 올라온다.
차선책으로 남한산성으로 가기로 했으나 문제는 과연 남한산성까지 무사히 도달할 시간적 여유가 있느냐하는 것이었다.
이에 화친을 주장해왔던 최명길이 적장 마부대와의 안면이 있는 고로, 자신이 적진으로 가서 시간을 벌어 보겠노라 자원을 한다. 동시에 인조는 눈발이 성성이 내리는 남한산성으로 3번째 몽진을 한다. 참으로 서글픈 신세가 아닐 수 없다.
12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친정을 나온 홍타이치는 남한산성을 고립무원으로 차단하는데 주력하는 한편, 이복 동생 도르곤으로 하여금 세자 빈, 봉림대군, 인평대군이 피신한 강화를 공략하도록 한다. 이는 왕자들을 인질로 하여 피해를 최소화 하면서 인조가 스스로 항복하게 금 하는 전략이었다. 인조는 지방에 거주하는 군사를 소집하는 격서를 보내 근왕병을 모아 대항코자 하였으나 그들은 청병의 상대가 되지 않았고 번번이 패하기만 한다.
모든 시도가 수포로 돌아간다.
결국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는 추위와 기아 그리고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청군의 홍이포 공격에 굴욕적인 항복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항전 45일 만이다.
청과 조선은 항복의 절차를 두고 교섭을 하는데, 함벽여츤(銜璧輿櫬; 옥을 입에 물고 관을 등에 지다)과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중에서 후자로 하기로 하고,
장소는 삼전도, 복장은 곤룡포대신 남융복(藍戎服 평민이 입는 남색 옷), 출구는 죄인의 통로인 서문을 통해서 나오기로 한다.
일설에 따르면, 인조가 구고두를 하면서 얼어붙은 땅바닥에 이마를 짓이긴 탓으로 용안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아무튼 항복이었다. 조선왕조가 창업한 이래 줄곧 오랑캐로 여겨왔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마련해주기도 했던 여진의 우두머리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을 머리 숙여야 하는 치욕의 의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병자호란의 상흔이 비단 치욕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P/S
- 누르하치의 8번 째 아들 홍타이치는 후에 청 태종으로 알려지는 인물로서 그가 숭덕제이다.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한족 관리들을 중용하였다. 중원 정복의 꿈을 이루고자 먼저 몽고와 조선을 굴복시키는 기민한 전략가이기도 했다.
후에 만리장성의 동쪽 산해관 외성을 모두 함락시킴으로써 중원 진출을 목전에 두지만 51세의 나이에 급사한다.
명나라 정복은 홍타이치의 아들 순치제의 섭정왕이자, 이복 동생인 도르곤에 의하여 완성된다. 도르곤은 병자호란때 강화도를 공략하여 왕자와 세자빈을 사로잡은 바 있다.
- 실리외교를 지향하던 광해군이 반정 세력에 의하여 퇴출됨으로써, 조정의 국시는 당연히 향명배금이 될 수밖에 없었다. 돌이켜보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충분히 예견되었고, 조금만 더 국제 정세를 이해코자 노력을 기우렸다면 충분히 방지할 수 있었던 환란患亂이었다. 그것은 광해군이나 인조라고 하는 왕정 시대의 제도적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정세 판단을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이다. 민주적 절차를 통하여 리더를 선출하는 현재의 오늘날에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되풀이 되고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우크라이나 전쟁이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지 않는가.
- 김훈 작가의 동명 작품을 영화화한 황동혁 감독의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으로 인한 백성들의 고충과 애환을 잘 묘사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500년 제 17 권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