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봉승의 조선왕조 500년
제 18 권 [북벌]
삼전도의 치욕을 대변하는 인조의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로써 병자호란의 여파가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돌이켜 보면, 국호를 금에서 청으로 개명한 홍타이치는 정묘호란 때의 경험을 발판으로 보다 효율적으로 조선을 공략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정묘호란과 달리 병자호란 전쟁에서는 오로지 인조의 생포를 위하여 의주부터 구축되어 있는 산성들을 모두 우회하여 급속도로 도성까지 몰아치는 전략을 구사한다. 그리고 인조가 천하의 요새인 강화도로 피신할 것을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도성의 서쪽부터 차단하면서 몰아치기에 인조는 어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병력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강화도로 피신한 세자빈과 왕자들을 굴복시켜 이들을 포로로 사로잡는다. 인조의 항복을 끌어내기 위함이다.
그리고 최대한 많은 수의 포로를 청나라로 데려간다. 그 숫자가 자그마치 60만 명에 이르고, 끌려간 백성들의 대다수는 곱고 나이어린 규중 처녀들과 사대부가의 내당마님이라는 사실이다. 청나라로 끌려간 가족들을 다시 조선 땅으로 찾아오는 것을 속환贖還이라 하는데, 이 같은 속환을 위해서는 막대한 금품과 물자가 필요했다. 효도를 으뜸으로 치는 조선의 정서를 10년전 정묘호란 때 숙지해 둔 것이었다. 잡혀간 어버이를 천금을 내서라도 모셔오는 것이 자식의 도리였고, 혼기를 앞둔 규방 처녀를 찾아오는 것은 어버이의 도리였기에, 그들은 이 점을 노리고 최대한 많은 백성을 데려간 것이었다. 속환금으로 그들은 국가 재정에 충당하기도 한다.
이 와중에 영의정 김유는 소실 딸의 속환을 위해 천금을 내겠다고 한 탓으로 포로들의 몸값을 터무니없이 올려놓았고, 연고가 없는 포로들은 어쩔 수 없이 포로 시장에 내놓아 매매가 되기도 했다.
후에 최명길이 사신으로 건너가 홍타이치와 대면하여 연고가 없는 포로 700 여명을 무상으로 해금하도록 하고, 속환이 결정된 사람 2만 9000여, 총 3만 여명을 귀국길에 오르게 하는 외교술을 펼친다.
하지만 속환 이후에 파생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환향녀還鄕女라는 말이 후에 화냥년으로 변질되어 불리게 되듯이, 조선으로 돌아온 부녀자들을 몸을 망친 여인으로 천대하는 사회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에, 최명길은 인조에게 건의하기를,
“정해진 날에 환향녀들로 하여금 지정된 강에서 몸을 깨끗이 씻게 하는 것으로 심신을 모두 닦은 것으로 하되, 그런 연후에는 환향녀를 따뜻이 맞아들이도록 하는 성교를 내리심이 옳은 줄로 아뢰옵니다.”
즉 이는 환향녀가 강물에 몸과 마음을 닦았는데도 사대부가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벌을 내릴 수도 있다는 교지를 내리라는 뜻이었다.
이에 인조는, 다음과 같은 교지를 내린다.
“도성과 경기도 일대는 한강, 강원도는 소양강, 경상도는 낙동강, 충청도는 금강, 전라도는 영산강, 황해도는 예성강, 평안도는 대동강을 각각 회절강回節江으로 삼을 것이다. 환향녀들은 회절하는 정성으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고 각각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라. 만일 회절한 환향녀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례가 있다면 국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이 같은 수습책으로 걷잡을 수 없던 흉흉한 민심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한다.
내 생각으로는 인조 치세 26년 동안 가장 잘 했던 정책이 아니었나싶다.
그리고 이에 연상되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떠오른다.
제우스의 아내 헤라 여신은 매번 사랑을 나눈 후 임브라소스(Imbrasos)라는 샘에서 목욕을 함으로써 처녀성을 회복했다고 하는 내용이 있는데, 동양이든 서양이든 생각하는 것은 엇비슷한가 보다. 최명길이 그리스 로마 신화를 참조하지 않았다면. . .
청나라는 인조의 항복을 받고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그리고 봉림대군을 볼모로 데려간다. 더불어 홍타이치는 자신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삼전도에 기념비를 세우도록 명한다. 그 비문은 당연히 조선에서 알아서 쓰라는 것이다. 그 내용은 인조가 홍타이치의 위대함을 모르고 경거망동했으나 청나라 황제의 은덕을 입어 목숨을 구했고, 그 영광은 천세 동안 영원할 것이다 . . .이런 내용의 비문을 조선에서 직접 작성해서 기념비를 세우라고 하니 이는 소위 요즘 말로 두 번 죽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홍타이치의 변덕은 수시로 발생하는데, 특히 남한산성에서 척화를 내세웠던 주동자를 심양으로 송환하도록 한다. 당연히 김상헌이 대상이 된다. 김상헌은 시조 한 수를 읊으며 자신의 심회를 달랜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심양으로 송환된 김상헌을 용골대를 비롯한 장수들은 그의 학문와 인품의 깊음을 알고 나름 예의를 갖추어 대접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형식적으로 진행되는 재판이었지만 그 과정에서도 김상헌은 기개를 잃지 않았고, 사형에 처해지는 것이 당연시 되었다. 그러나 용골대는 홍타이치에 청하여 김상헌을 사형에서 면제키로 하고, 의주옥에 투옥하기로 한다.
요하에서 해 넘기며 고국을 그리워할 때
세자궁 가까운 것을 다행으로 여겼더니
내일 아침 나 홀로 요하를 건너 돌아가니
세자궁 돌아보며 눈물로 옷깃을 적시네.
(*세자궁은 볼모로 있던 소현세자가 머물던 조선관을 지칭함).
마침내 볼모생활 9년을 청산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귀국길에 오른다.
소현세자는 심양에 있으면서 북경에도 다녀올 기회를 가지는데, 아담 샬이라는 선교사와 깊은 친교를 갖게 되고, 서구 문명을 접하며 서서히 개안을 하게 된다. 그리고 조선의 변화를 모색하고자 많은 고민과 비젼을 스스로 구상하게 된다. 귀국길에 역법, 천문학, 심지어 천주교 등에 관한 서책과 여지구, 천주상 같은 서양 문물을 한 짐 가져오게 된다. 실로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꿈으로 가득 찬 귀국길이었다.
허나, 그가 도성에 도착하자마자 마주한 것은 인조의 냉대와 미움뿐이었다. 바로 인조의 총비인 귀인 조씨의 모함과 질투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소현세자가 정성껏 가지고 온 서양 물건들은 사치의 대상으로 폄하되었고 해괴망측한 물건으로 평지풍파를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인조는 소현세자가 어렵게 가져온 서양 책자며 지구상이며 천주상 들을 몽땅 불태워버리는 지경에 이른다.
미래의 꿈 하나로 9년간의 볼모생활을 버텨온 소현세자에게는 청천벽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의 모든 꿈은 한 줌의 재로 변해갔다.
온 몸에 신열이 나고 소현세자는 자리에 드러누워 속 앓이를 하기 시작한다.
소현세자는 환경단으로 옮겨지고 주변의 접근이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치료를 받게 된다. 민회빈 강씨도 출입이 금지되었고, 귀인 조씨의 천거로 이형익이라는 의원이 전의로 발탁된다. 그로부터 나흘 후 소현세자는 주검으로 변해 있었다.
인조실록에 따르면,
‘세자의 시신은 진흑盡黑으로 변해 있었으며, 7혈穴에서 출혈하고 있어 마치 독약에 중독된 사람 같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소현세자는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발병한 지 나흘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34세였다.
귀인 조씨는 세자빈인 민회빈 강씨에 대해서도 모함과 함께 자작극을 벌이는데, 우연히 소주방(燒廚房:대궐안의 음식 만드는 곳)에서 민회빈 강씨의 시녀가 있는 것을 보고 일부러 음식에 비상을 타고 인조에게 바친다. 인조가 먹기 직전 은수저로 독이 있음을 확인하고 그 시녀가 독을 탔을 거라고 고해바친다. 귀인 조씨의 무고임에도 불구하고 인조는 민회빈에게 사사賜死를 명한다.
삼전도의 치욕에 기인한 인조의 정신질환이 아닌가 싶다. 여기에 더해 진 귀인 조씨의 요망함으로 민회빈 강씨는 죽음을 맞이한다. 9년의 볼모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지 1년 만이며, 소현 세자가 독살된 지 9달 만이었다. 그녀 나이 36세였다.
이 모든 비극은 귀인 조씨가 인조반정의 주도 인물 중의 하나이자 실세였던 김자점과 결탁하여 자신들의 아들 딸들(귀인 조씨의 딸 효명옹주와 김자점의 아들 김세룡)의 혼인을 약속하고 심지어 귀인 조씨의 소생인 승선군을 보위에 앉히고자하는 황당한 계략에 의한 것이었다.
1649년 5월 8일
인조는 조용히 아주 편안한 상태에서 영면을 맞는다. 그의 치세가 전란과 그 후유증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현군의 자질은 빛을 보았을 지도 모르지만, 반정이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풍진 세월을 보낸 삶이었다.
소현세자의 동생 봉림대군이 보위를 잇게 되는데 그가 바로 효종이다.
효종은 볼모생활을 같이한 소현세자의 웅지가 무엇이었는지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리고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으로 복수의 칼을 갈기 시작한다.
조정의 분위기 쇄신을 위하여 효종은 새로운 인물을 등용하고자 하는데 자신의 사부이기도한 송시열을 적극 옹호하며 마치 정암 조광조의 도학 정치와 비슷한 주자학을 바탕으로 하는 정치론을 전개해감으로써 조정에 새로운 기풍을 진작한다.
더불어 이완 장군을 발탁하여 군사에 관한 일을 전담하도록 한다.
‘문文은 송시열, 무武는 이완’을 중심으로 체제를 새롭게 구축해 나간다.
군사력의 증강, 성곽의 개수, 군량의 비축!
이 세 가지가 가장 시급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청나라에서 금하고 있는 일이었으며, 허락 없이 착수했다가 나중에라도 눈치 챈다면 심각한 힐책이 따를 것이었다.
영의정 이경석은 효종의 의지를 파악하고선 한 가지 묘책을 낸다.
바로 왜정가려倭情可慮라는 자문을 보내면서 성곽을 수축하기 시작했다.
왜정가려란 남부 지방에 출몰하는 왜구들을 방어하기 위함이니 성곽 수축 등을 고려해 달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청나라와 내통하면서 후일을 도모하고 있던 김자점이 조정의 속내를 고해 바치는 바람에 청나라는 3만의 군사를 파견하면서 사신 파흘내를 통하여 왜정가려를 기안한 자를 물색하여 극형에 처하라는 황제의 교지를 보낸다.
효종이 사정사정해서 이경석을 의주 백마산성으로 보내고, 자신의 딸(공주)를 청나라 구왕(도르곤)에게 보내겠노라 약속한다.
효종의 북벌 정책은 조선으로서는 여태껏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황당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명청 교체기의 상황을 좀 더 들여다 봐야할 필요가 있다.
홍타이치가 급사하고, 순치제가 5살의 나이로 황제에 오른다. 그리고 섭정왕은 구왕인 도르곤이 맡기로 한다. 즉 도르곤이 실제적인 황제가 되는 것이다. 구왕이라 함은 아홉 번 째 왕자라는 뜻인 것 같다(실제로는 누르하치의 14남이지만 생존해 있는 왕자 중에서 아홉 번째라는 뜻). 효종은 이경석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딸을 도르곤에게 바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는 금림군의 딸을 의순공주로 삼아 북경으로 떠나 보냈다).
순치제의 섭정왕 도르곤이 실제적인 황제였고, 그의 뛰어난 전술로 인해 중원에서 명나라는 남명이라 부를 만큼 쪼그라져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와 지속적으로 교전 중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중원 공략에 집중하느라 만주와 요동 지방은 거의 무방비 상태였고, 아마도 효종은 이 같은 청나라의 허점을 노려 요동과 만주를 차지한 후에 튼튼한 방어책으로 견디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을 것 같다. 그리고 유사시를 대비하여 조선 영토 내 요소요소에 성벽을 튼튼히 하고 청의 공격을 막아 낸다면 퇴치할 수 있다고 본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너무나도 높았다.
병자호란 이후 거의 와해되어 버린 병력을 다시 모으고 훈련을 하는 과정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이완 장군을 훈련대장으로 임명하여 군사 조련에 박차를 가하고 약 1만 명의 정예부대를 조직하였으며 이들에 대한 열병식도 거행하였다.
그러나 몇 년 간 계속되는 기근과 홍수로 민생이 피폐해지는 상황에서 전쟁 준비를 한다는 것이 가능이나 한 일이던가? 게다가 거듭되는 흉년에도 관원들의 토색질은 더욱 극성을 부리고 백성들의 신음은 비명으로 변해갔다.
비축한 군량미를 진휼미로 방출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인조의 애첩이었던 귀인 조씨는 마가이馬加伊라는 무당을 불러 자신의 아들 승선군이 보위에 오를 수 있도록 대비와 세자를 저주하는 굿판을 벌인다. 심지어 김자점은 청나라 병사들을 불러 역모를 꾀하고자 한다. 결국 귀인 조씨는 사사되고, 김자점은 대로상에서 참수를 당하게 된다.
1659년 4월 기우제를 드리던 효종이 쓰러져 기력을 차리지 못하게 된다.
효종의 용안에 생긴 종기가 점점 커져만 가고 전의들이 협의한 결과 피고름을 짜내는 수술을 감행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1659년 5월 북벌의 한을 간직한 채 효종은 눈을 감는다.
북벌이라는 웅대한 포부도 한낱 종기로 인해 물거품이 되고 만다.
보위를 이어받은 현종은 효종의 장례 문제부터 예송禮訟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그 논란의 중심에는 송시열이 있었는데, 그가 주장하는 4종지설(4種之設)에 따르면 적자와 장자, 그리고 서자는 구별이 되며 장자가 아니라면 모두가 서자이기 때문에 효종은 적자이자 장자인 소현세자가 죽어 왕위에 오른바 서자로서 대우하여 모후인 장렬왕후가 효종을 위해 1년짜리 상복인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하는가, 3년짜리 참최복(斬衰服)을 입어야 하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여기에 윤선도를 비롯한 내로라하는 유학자들이 파당을 지어 달라붙어 상소를 올리는 등 가당찮은 일로 국력을 소진한 경우를 예송논쟁이라 하며, 기해예송(효종 승하)과 갑인예송(효종의 부인 인성왕후 승하)으로 두 차례가 있었다.
오늘날 되짚어보면, 아무런 의미 없는 논쟁이기도 하고 어처구니없는 작태가 아닌가 싶지만, 이는 당파싸움의 연장에서 봐야하는 것이고, 심지어는 왕권과 신권의 대립이기도 했다.
시작부터 논쟁에 휘말렸던 현종은 그의 치세 15년간 내내 조선이라는 국토가 기근과 홍수 그리고 역병에 시달리는 세월을 보냈다. 조선왕조 역대 임금 가운데 가장 불행한 군왕이라 평가받는다.
1674년 현종은 배와 허리의 통증을 호소하며 병석에 눕는다. 창역이 안으로 번진 것이었다.
15년의 재위 기간을 마감하고 눈을 감는다. 나이 34세였다.
세자 이순이 14세의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오르니 이가 19번째 임금 숙종의 탄생이다.
*P/S
1. 효종의 북벌 정책을 되짚어본다. 9년간의 볼모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것은 1646년이다. 명나라는 1644년 이자성의 침공으로 숭정제가 자진함으로써 막을 내린다. 그리고 이자성은 오삼계와 청나라의 협공에 1645년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다. 즉 청나라로서는 이미 명나라가 멸망하였고 더 이상 조선이라는 후방 세력의 교란이 없다고 판단되었기에 볼모를 풀어준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북벌을 계획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보다 무모한 측면이 있다. 게다가 수 년간 계속된 흉작으로 제대로 실행에 옮길 여유가 주어지지도 않았다.
소현세자가 구상했던 바처럼 북경을 통한 서구 문명의 도입으로 힘을 키워야 했던 것이 아닐까.
2. 선조의 광해군에 대한 핍박, 인조의 소현세자에 대한 타박을 꼼꼼히 살펴보면 둘 다 공히 피난을 겪은 왕들이다. 그리고 둘 다 어릴 적부터 영특하다는 평을 들어왔고 나름 나르시시스트적 성향이 있었으리라. 하지만 의주까지 도망가서 명나라로부터 멸시를 당한 경험은 트라우마로 남게 되고, 인조의 경우는 더 심한 상처를 안고 지내게 된다.
이런 경우 자신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사고와 지식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반대와 무시를 하게 된다. 특히 소현세자는 인조가 겪고 있던 정신질환의 직격탄을 맞은 꼴이 된다. 소현세자가 보위에 올랐다면 조선은 국력 배양의 새로운 길을 맞이 했을 지도 모르겠다.
3. 인조가 보위에 오른 1623년부터 현종이 눈을 감은 1674년 약 50년간이 구한말을 제외하고 조선왕조에 있어 가장 무기력하고 어려운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세 번의 몽진을 경험한 인조, 없는 살림에 북벌이라는 당찬 결기 하나로 의욕을 불태운 효종, 당파 싸움의 절정 속에서 연속되는 자연 재해와 역병을 겪어야 했던 현종.
글을 읽어 내려가는 사람도 힘든 시간이었다.
------------ 조선왕조 500년 제 18 권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