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500년 제 14 권

by 이병철


신봉승의 조선왕조 500년

제 14 권 [왜란]


동 14 권은 1544년 11월 중종의 승하부터 1592년 4월 임진왜란 발발 후 당해년 10월까지, 48년간의 조선왕조의 역사를 담고 있다.

1544년 11월 15일 중종은 조용히 눈을 감는다.

제왕으로서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한 인간으로서도 실로 파란 많은 일생을 마치게 된다.


동년 11월 20일 보위에 오른 인종은 어릴 적부터 잔병치레가 끊이지 않았으며 3개월간의 국상 또한 그의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초래하였다. 인종의 심성은 후덕하여 매사를 원만하게 처리하고자 하였으며, 특히 기묘사화로 사약을 받은 조광조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현량과도 복과를 시킨다. 건강만 허락되었다면 성군으로서의 자질이 충분하였던 인물이었다.

1545년 7월, 보위에 오른 지 9개월 만에 인종은 이복동생인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세상을 떠난다.

11세의 나이에 보위에 오른 경원대군(명종)은 대비인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하에서 조정을 운영해 나가게 된다.

문정왕후는 가세가 기울어진 파평 윤문 윤지임의 딸로 태어나 17세 때 중종의 세 번째 계비로 입궁을 하였고, 이름뿐인 중전이었던 시절을 겪었다. 중종의 총애를 받고 있는 경빈 박씨와 희빈 홍씨가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의 훈구대신으로부터 비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문정왕후는 공주만을 넷을 생산했던 까닭으로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생 윤원형의 소실인 정난정과 봉은사의 보우 스님을 알게 되고, 회임불공을 통한 덕분인지 경원대군을 얻고 난 다음부터 알게 모르게 경원대군으로 보위를 이어야겠다는 야망을 키워 왔던 것이다.

성종 때 정희왕후 이후 조선 창업 이래 두 번째 수렴청정이 문정왕후에 의하여 이루어지게 된 것이며, 이는 곧바로 정난정의 시대가 완연히 열리게 됨을 의미하는 여인천하를 맞게 된다.


또한 인종의 외숙인 윤임과 문정왕후를 배후에 둔 윤원형/윤원로 형제 간에 벌어진 세력 다툼을 대윤과 소윤 사이의 갈등이라고 부른다.

칼을 빼든 것은 대윤인 윤임 측이었다. 인종의 승하이후 위축되는 기세에 이를 만화코자 윤임은 윤원로에 대한 탄핵을 진행한다. 윤원형의 형인 윤원로는 성격이 괄괄하고 단순하며 욕심이 많은 지라 주변으로부터 인심을 많이 잃고 있었기에, 문정왕후와 윤원형은 전라도 해남으로 부처되는 상황을 방관한다. 그럼으로써, 윤임으로 하여금 자신의 세도가 아직 사그라지지 않았음에 자조의 웃음을 짓게 만든다.

그러나 윤원형은 윤임을 제거하기 위하여 무시무시한 자작극을 연출하는데, 윤임은 문정왕후가 있는 대왕대비전 앞에서 서성이다가 봉투 하나를 떨어트리고 숨어서 지켜본다. 자나가던 내시가 봉투를 열어 내용을 확인하고선 화들짝 놀라 대왕대비전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다. 그 내용은 마치 윤임이 공의전(인종의 비)앞으로 보내는 서신인 것으로 유추되는 것으로서, 공우(중종의 여섯째 아들로 희빈 홍씨의 소생)를 정승들과 함께 옹립할 계획으로 있으며, 지난 번 윤원로를 귀양보낼 때 윤원형까지 치죄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것이었다.

이에, 문정왕후는 윤원형에게 윤임과 그와 가까운 정승들을 모두 문초하여 역모를 밝히라는 밀지를 써준다. 이것이 대윤과 소윤의 피비린내 나는 옥사의 시작이었다.

윤임과 관련이 있는 중신들을 모두 잡아들이고 유배를 내리는데, 이에 불복하는 상소가 빗발치듯 밀려온다. 치죄에 대한 죄목이 불분명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불복하는 자들을 모조리 묶어 더 큰 응징으로 처단코자 한다. 이때 임백련의 정인이었다가 윤임의 소실이 된 옥매향을 불러 중신들 앞에서 문초하기 시작한다.

옥매향은 “윤임과 유관, 유인숙 두 대감께서 윤원로 형제를 제거해 대왕대비 마마의 양팔을 꺾어 놓은 다음, 어리신 주상 전하를 폐위시키고 계림군과 봉성군 두 분 가운데 한 분으로 왕통을 잇게 하여야 한다고 말했사옵니다”라고 진술한다.

익명의 서신으로부터 옥매향까지 이 모든 각본은 정난정이 구성하였고, 옥매향과 임백련의 밀회를 주선한 것도 윤임 내부에 첩자를 심어두기 위함이었다.

옥매향의 결정적인 거짓 증언으로 희생된 사람들은 윤임, 유관, 유인숙을 비롯하여 무여 61명에 달하는데, 이를 을사사화(乙巳士禍)라고 한다.

이로써 대윤이 뿌리째 뽑혔고, 조정은 윤원형을 거두로 하는 소윤의 손아귀에 돌아간 것이며, 이는 곧 정난정의 득세를 의미한다.


을사사화 이후 유배간 윤원로는 다시 도성으로 복귀한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것은 돈령부 도정이라는 한직만이 제수되어 있었다. 돈령부란 곳은 왕실이나 종친들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설치된 관청으로 직위도 정3품이었다. 2등 공신이자 사헌부 대사헌이 된 윤원형에 비하면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만큼 윤원로는 사람됨이 부족하고 거들먹거리는 통에 안팎으로 인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문정왕후와 정난정이 있는 자리에서 그는 정난정이 소실 주제에 당의(입궐할 때 입는 의복)가 웬 말이냐며 핀잔을 주기도 하는데, 이때 정난정의 눈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정경부인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고 그를 위해 정실인 김씨까지 독살한 정난정에게 소실을 운운했으니 역린을 건드린 꼴이 되었다.

정난정의 성격을 잘 아는 윤원형은 형 윤원로를 제거하고자 급기야 육촌 동생인 윤춘년을 찾아가 윤원로에 대한 탄핵 상소를 올리게 금 유도한다. 윤춘년 역시 윤원형의 편에 서는 것이 훨씬 유리한 형국이라 이를 흔쾌히 받아들이고, 그간 있었던 윤원로의 비행을 샅샅이 적어 길고 긴 상소문을 작성한다. 윤원로는 미친 사람처럼 요로를 찾아다니면서 윤원형과 정난정을 비방하지만, 대사헌인 윤원형은 윤원로의 삭탈관직과 함께 유배의 길에 오르게 만든다. 그리고 1년 후 1547년 윤원로는 사약을 받아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다.


중종 때 심정은 경빈 박씨를 팔아 목숨을 보전했고, 윤임은 김안로를, 결국 윤원형은 윤원로를 쳐내는 형국으로 이어진다. 동지가 동지를 배신하게 만들고 동생이 형을 쳐내게 하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던가.


문정왕후의 총애를 받는 정난정은 결국 왕명으로 소실에서 정실부인으로 신분 세탁을 하게 되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때부터 정난정은 재물 모우는 것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윤원형과 더불어 매관매직과 함께 임금 노릇에 빠져 사치가 극에 이르렀다. 사관들의 표현을 빌면 아래와 같다.

“임금과 신하의 구분은 의복과 기용의 등급에서 분변되는 것인데, 문에는 휘장을 쓰고 그릇은 금은으로 장식하였으며, 공장供帳과 집물什物은 임금보다 사치하고 화려하였으며, 희첩姬妾의 복식은 아름다움이 궁중보다 더하였다. 시비들의 의복과 머리 단장도 모두 궁중의 단장을 모방하였다. 무릇 사람들이 보내는 물품은 차지를 맡은 사람으로 하여금 분패粉牌에 써서 올리게 하였다. 혼인과 연회때에는 좋은 비단 포장을 내청에 둘러쳤으니, 무릇 거처하고 거동하는 것을 한결같이 궁궐을 모방하여 엄연히 하나의 모습을 지었다.”

정난정의 사특邪慝한 모양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으며, 문정왕후의 그늘에서 피어난 독버섯이라 하겠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했던가!

윤원형과 정난정의 세도가 하늘을 찌르지만 연이은 가뭄으로 흉년이 계속되자 민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임거정(임꺽정)의 반란은 명종 15년부터 17년까지 3년간 지속되어 민심은 흉흉하였다.

게다가 명종과 중전 심씨 사이에서 태어난 순회세자가 11세에 빈궁을 맞아들이고 2년 만에 급사를 하게 된다. 문정왕후가 청정을 내려놓은 후, 그녀에게 있어 유일한 삶의 희망이었던 순회세자가 홀연히 세상을 떠나자 병석에 눕는 일이 잦아진다. 명종 20년(1565년)4월 7일 석가 탄신일을 기하여 회암사에서 무차대회와 수륙제을 올리고자 행차를 준비하는 와중에 문정왕후는 힘없이 주저앉는다. 그렇게 세상을 호령하던 문정왕후는 세상을 떠나게 된다.

5월이 되면서 조정은 ‘요승 보우를 교살하여 숭유억불의 국시를 세워주시오소서’라는 보우에 대한 탄핵이 시작된다. 제주도로 부처된 보우에게 제주목사 변협은 불경죄를 적용하여 곤장을 때린다. 결국 보우는 장살杖殺을 당하는 처참한 종말을 맞게 된다.

더불어 윤원형의 온갖 비리를 담은 탄핵 상소가 뒤이어 올라감에 명종은 이를 가납하여 전리방귀(田里放歸: 부처의 일종으로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것)라는 관대한 조처를 내리게 된다. 윤원형과 정난정은 패물을 챙겨 황해도 교하로 떠나지만, 교하에 있는 백성들은 그들의 악행을 익히 알고 있는 터라 그들에게 온갖 욕설과 협박을 해댄다. 더 이상 머물 수 없음을 깨닫고 정난정의 먼 친척이 있는 강음으로 야반도주를 한다. 강음에서 오두막 하나를 빌려 생활하던 중, 정난정은 이미 비상을 챙겨두고 있었으며 의금부 장졸이 보이면 바로 자결을 하겠노라 공공연히 말하곤 했다. 마침 평안도에 도적의 소동이 있어 이를 진압하고자 장졸을 파견하였는데, 이를 정난정은 자신을 향한 사약이 내려진 것으로 지레 짐작을 한다. 정난정은 윤원형에게 이르기를,

“대감, 소망을 이룬 정난정이옵니다. 이렇게 죽는다 한들 무슨 원한이 다시 있으리이까? 저는 대감이 지켜보는 앞에서 또 비바람을 막아주는 방에 앉아서 죽을 수 있음을 부처님께서 내려주신 자비라고 생각하옵니다, 부디 존체를 보존하소서.”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비상을 삼킨다. 윤원형 또한 정난정을 따라 자결을 한다. 공수래 공수거란 말이 적절한 표현이라 하겠다.

정난정은 조선왕조 엄격한 신분 제도에 과감히 도전하여, 명가의 며느리가 되고 정경부인이 되기 위해 투쟁으로 살아온 여인이었다. 비록 소망을 이루었으나 결국 모든 영화를 빼앗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1565년(명종 20) 섣달의 일이었다.


명종은 문정왕후 승하 후에 나름대로 개혁적인 일을 도모하지만 흐지부지 되고 윤원형과 정난정의 처단 후, 2년 만에 세상을 하직한다.

일찍이 명종은 순회세자가 죽어 후손이 없었기에, 중종의 9번째 아들이자 명종의 이복형인 덕흥군의 세 아들을 곧잘 궁으로 불렀는데, 한 번은 그들에게 익선관(왕관)을 한 번씩 써보라고 한다. 두 형은 시키는 데로 써 보았는데 하성군 이균만은 '익선관은 왕이 쓰는 것'이라며 극구 사양했다. 이에 명종은 이균에게 왕과 아버지 중 누가 중요하냐고 묻자, 하성군은 “둘은 다르게 보이지만 본디 충과 효는 하나”라고 대답한다. 이에 감동을 받은 명종은 하성군을 후계자로 내심 결심을 하고, 임종을 목전에 두고 하성군 이균을 다음 보위로 이을 것을 유언한다. 이렇게 보위에 오른 하성군이 바로 선조가 된다.


*P/S

동 14 권은 1591년(선조 24)와 1592년 진주성 대첩까지 다루고 있으나 임진왜란은 15권까지 이어지므로 14권의 후반부는 15권에서 함께 다루고자 한다.


-----조선왕조 500년 제 14 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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