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cc. 오랜만에 마시니까 금방 취해버렸어. 그래, 뭐. 원래도 맥주는 몸에 잘 안 받는 거 알잖아. 한 캔에 삼천 오백 원, 네 캔에 구천 원 하는 맥주를 한 캔만 사는 건 눈 뜨고 코 베이는 느낌이 들지 않니. 그래서 네 캔을 우선 들었어. 내 품이 커봐야 얼마나 크겠어. 역시 꽉 차더라고 벅찰 정도로. 그래서 계산대를 한 번 다녀왔지.
그런데도 뭔가 부족했나 봐. 생레몬이 띄워져 있다는 하이볼 유행을 뒤늦게나마 따라 해보려고 그것도 세 캔을 샀어. 역시 한 캔보다는 세 캔이 합리적인 소비처럼 보였거든.
종량제 봉투 20리터짜리에 출렁출렁 알루미늄끼리 마찰시켜 가며 집으로 왔어. 어둡고 가로등이라고는 무늬만 있는 좁디 좁은 그 골목길을 지나서 말이야. 텅 비어있던 냉장고에 넘실거리는 4도와 7도짜리 맥주캔을 줄지어 세워놓고 보니 애석하게도 속이 쓰리게 가득 찬 기분이 들더라.
어느 날엔가, 아니 꽤 자주. 끼니를 때우지 못하고 여덟아홉 시 무렵이 되어서야 첫끼를 먹으려고 할 때가 있었어. 그때마다 꼭 자극적인 음식이 당기고는 했거든. 그게 나를 해하는 일인 줄도 모르구. 지금 생각하면 조금 먹먹할 때가 있어. 내가 언젠가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는데, 기억해? 연민이 참 쉬워. 자기가 참 불쌍하다는 거야. 스스로가 불쌍하게 느껴진다고. 이런 말이 꽤 우습니. 내가 가끔 우습지.
며칠 전에는 그 사람이랑 통화를 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어. 잠시 통화를 끊었을 때 고개를 바짝 들었어. 짐은 줄이는 게 어렵지 늘리는 건 너무 쉽잖아, 그런데 내 작은 공간에 마련된 신발장은 참 좁거든. 사람들이 가고 나면 먼지를 쓸고 물을 뿌려 바닥을 닦아도 어디선가 계속 먼지가 나와. 마음 쓰인다는 말이랑 그래서 미안하다는 말이 참 무책임해서 종종 화날 때가 있어. 멍해질 때는 이따금 맥주 생각이 나.
취해도 전할 곳이 없어, 나는. 홀로 이겨내는 사람이고 싶기도 해. 그래서 잘 안 취해. 핸드폰을 떨어뜨릴까 봐 손에 힘을 주고 있고 물을 끝없이 마시지. 부질없지 않은 무언가가 필요해. 마침 수첩과 함께 선물 받았던 책이 보여. 책장 한 편을 오래오래 자리하겠지. 가끔은 다른 책들 사이를, 전혀 다른 공간을 옮겨 다니며-
어쩌다가 우린 고슴도치가 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