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저녁 무렵이 되면 내 안에서 구멍이 열린다. 처음엔 작은 틈에 불과했던 것이 점차 커지고 깊어졌다. 이제는 발끝에서부터 목까지 자라나서 숨을 쉴 때마다 구멍에 발이 묶인 채로 어둠을 둘러볼 수밖에 없다. 발목에는 초록빛 줄기들이 촘촘히 감겨 있다. 마치 갯벌에 빠진 것처럼, 그 줄기들이 점점 나를 끌어내리고 나는 더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어릴 적, 덩굴식물이 자라나는 이야기를 썼다. 그때 내가 만든 세계는 공기가 짙푸르고 맑아, 하늘의 빛이 초록으로 스며들던 곳이었다. 덩굴은 끝없이 뻗어나가 하늘을 유영하며 별들과 나란히 춤을 추었다. 중력이 없는 그곳에서 빛은 자유롭게 부서지며 반짝거렸다. 언제까지나 아이로 남아있어도 괜찮았다. 사람들은 시간이란 존재를 잊은 채로, 단지 순간의 감각만을 간직하며 하늘 끝으로 향했다.
하지만, 점차 덩굴이 시들어갔다. 내가 속한 세상의 질서가 침투하면서부터였다. 질서 속 자전거의 바퀴는 둥글고, 눈물은 짠맛이 났다. 무겁게 쌓인 생각들이 뿌리를 얽어매기 시작했다. 나는 매일 손끝으로 덩굴의 잎을 쓸어보았다. 어느 날, 덩굴은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손끝에서 자라던 줄기들은 시들며 바싹 말라갈 뿐이었다.
오늘도 눈을 감고 구멍 속을 들여다보았다. 덩굴의 잔해가 여전히 보였다. 옅은 초록빛은 거의 사라져 있었고, 건조한 가지들만 삐죽삐죽 돋아 있었다. 그 잔해를 따라가던 내 시선은 갑자기 멈췄다. 새싹. 덩굴의 끝자락에 아주 작은 새싹이 돋아 있었다. 그건 내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이야기의 파편이었다. 손끝에 따스한 감각이 스며들었다.
새싹은 천천히 줄기를 내리며 시작했다. 내 손목을 감싸며 팔꿈치를 지나 어깨를 타고 오르더니, 이내 목덜미를 휘감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그 감촉은 오래전 들었던 바람의 소곤거림과 같았다. 나는 팔을 뻗어 덩굴을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그 순간, 줄기에서 싹이 터지고 잎사귀가 피어나면서 주변이 초록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나를 감싸던 어둠이 잎사귀 사이로 뚫리며 빠져나갔다. 다시금 하늘을 향해 자라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빛의 흐름을 따라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구멍은 끝내 나를 삼키지 못한 채로 메워지고 있을 뿐이었다. 어딘가 나도 알 수 없는 새로운 곳으로 길은 이어졌다. 다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세계였다. 잎은 내 손끝을 따라 천천히 나선형으로 뻗어갔다. 그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여전히 이야기 속에 살아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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