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긋난 궤도, 낯선 차원 너머
나는 그 여름을 기억하지 못해. 아니, 기억하기 싫다는 게 더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내 말을 믿어줄 사람이 있기는 할까, 그런데 분명히 밝혀두지만 이건 모두 실제로 있었던 일이란 말이야. 언젠가 내 말을 믿어줄 누군가가 있을 거라고 믿으며 이 글을 적어.
기계는 정확했지. 늘 그랬듯이, 하루 24시간을 분 단위로 기록했고, 나는 그걸 아주 오래 믿었어. 하지만 그 해 여름은 조금 달랐어. 나뭇잎처럼 부드럽게 시간의 차원을 흘러 다녀야 했는데 어딘가 미끄러진 것처럼 왜곡되었거든. 차원을 지나다니는 동안에는 잠시 멍해지는 기분이 들고는 해. 차원을 넘나드는 횟수가 누적될 때마다 아득한 기분은 쉽게 가시질 않았고, 나는 그 속에서 줄곧 나를 잃어갔던 거야. 내가 어느 차원에 내리기로 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몽롱해졌을 때, 결국 지구에 떨어지게 되었지.
처음 지구에 왔을 때는 내 머리 위로만 자욱한 그늘이 져서 고개를 땅에 처박고 다니는 수밖에 없었어. 햇빛을 기대하면서 이 행성에 온 건데, 이게 뭔가 싶더라. 고장 나버린 시계가 내 머리 위에 둥둥 떠다녔어. 가끔 사람들의 잡념을 먹어치우면서 말이야.
다행이라고 말해야 할까, 지구 사람들은 내 머리 위의 ‘시계’를 보지 못하는 것 같았어. 나중에야 알았는데, 이들은 나의 시계와 똑같이 생긴 것을 광장에서 줄지어 팔고 있기도 했어. 얼음 위에 처박힌 채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죽은 시간들, 완벽히 죽어있었지. 머리 위가 아닌 바닥에 제멋대로 놓여있다니. 어쩐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오래 쳐다볼 순 없었어.
“얘, 생선 살거니?”
파란 앞치마를 한 여자가 나와서 나한테 말을 걸었거든. 나는 잠깐 동안 이곳에서 얘, 꼬마, 야 등으로 불렸어. 그래, 그건 지구 말로 생선. 아니면 물고기랬어. 그런데, 지구의 시계는 모양이 다양한 것 같아. 죽은 눈을 한 것들이 정말 많았단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는 시간을 봤어. 좁고 둥근 통 안에서 헤엄치는 ‘생선’ 말이야. 그것들은 분명 시간이겠지.
가만 보면 지구는 조금 더 발전한 차원인 걸까? 그래서 지구에 대한 설화가 많았던 게 아닐까. 시간들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차원을 헤엄치고 있었지. 저기엔 누가 타고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들었어. 시계로 변하지 말아야 할 텐데. 아, 그러고 보니 이상하잖아, 내 머리 위에 ‘이건’ 보지 못하는데 시계들은 보는 게. 나는 여자에게 솔직하게 물어봤어.
“이것도 보여요?”
손가락을 쭉 뻗어서 내 머리 위를 가리키며 여자에게 말했어. 갑자기 차가워진 말투로 그 사람은 말했지, 복 나간다고 안 살 거면 썩 나가라고 말이야. 어쩔 수 없이 뒷걸음질을 치고 그곳에서 나와서는 어디로 가야 할까 고민하며 계속 걸었어. 끊임없이 맨발로 걷는 동안에 바닥에는 날카롭고 뾰족한 것들이 많아서 아팠어, 많이.
우리 행성의 바닥은 늘 촉촉하고 부드러운 풀들이 가득해서 발바닥이 간지럽곤 하잖아. 그런데 이곳, 지구의 땅은 아주 단단하고 거칠어. 가끔 물고기가 대신 울어줬어. 우르르. 우르르. 울음소리가 아주 커서 나는 두 귀를 막고 걸었는데, 그럴수록 더 크게 울더라?
그런데 사람들은 무심하게 지나쳤어. 지구라는 게 정말 존재하나 싶었어. 이게 실은 꿈일 수도 있겠다고 말이야. 지구는 늘 조금씩 흔들려. 불안하게 떨리면서도 그 덕에 사람들의 그림자가 길게 뻗어 서로 닿을 수 있게 해 주지. 아빠는 그게 지구가 서로를 가까이 묶어주는 다정함이라고 했어. 아빠가 살아있을 때는 자기 전에 지구 얘기를 가끔 들려주곤 했는데, 그때 들은 지구는 참 다정했거든.
그런데 왜 여긴 다정이 없지. 나는 다정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어. 지구에서 다정함을 찾지 못하면 나의 시간은 영영 멈춰있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들었거든. 그러다가 어떤 집 앞에서 멈췄어. 그땐 아직 해가 쨍하게 내리쬐고 있었는데, 그 집 앞은 유독 붉게 빛나고 있어서 똑똑 문을 두드렸지.
인기척이 느껴지질 않았어. 알다시피 원래 내 성격대로였다면 그런 무모한 일은 일어날 수 없었을 거야. 하지만, 이게 정말 꿈이라면 내 마음대로 못할 것도 없지 않니. 그래서 문고리를 돌려본 거야. 달칵. 명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어. 이상했어. 분명 밖에서 문을 열었는데, 문을 열자마자 작은 방 하나가 보였어. 뒤를 돌아보니까, 바깥 풍경은 아니었지 분명.
나는 조심스레 문을 닫으며 뒤를 돌아봤어. 여긴 이미 가득 차보였어. 혹시 나뭇잎이 검은색인 걸 본 적이 있어? 그래, 거긴 기묘하게 퀴퀴한 공기가 맴돌았고 쓸쓸한 냄새가 났어. 누군가 잃어버린 기억 같았어. 검은 나뭇잎들이 신나게 팔랑거리다가 내가 약간 허우적거리니까 다시 가라앉아버렸거든. 그때, 내가 울었던 이유는 뭐였을까. 나도 뭔가 잃어버린 걸까. 빨리 나가야 한다는 직감이 들었어. 오래 있으면 내가 나뭇잎이 될 것만 같았거든. 방문은 굳게 잠겨 있어서 창문을 향해 절박하게 손을 뻗었어.
어두운 복도가 끝도 없이 있었어. 복도 끝까지 다다르니까 문이 하나 또 있더라고, 이번에는 처음보다 무서웠어. 그래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다. 가끔 밖에서 지구인들의 목소리가 커졌다가 작아졌고, 내가 무릎을 웅크리고 쪼그려 앉았을 때는 집 밖에 두고 온 시계가 우르르. 우르르. 또 울기도 했어. 허리가 조금 아파올 즈음에 계속 복도 안에 갇혀 있을 수는 없어서 결국 하나의 방문을 또 연거야. 이번에는 많이 겁을 먹어서, 방문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었어.
걱정과는 달리 방은 정말 평범했어. 아니, 아까 그 방이랑 벽지색만 달랐지 구조는 완벽히 같았어. 구조의 동일함이 신기해서 쭉 둘러보다가 아까랑 다른 걸 하나 발견했어. 빠알간 장미. 왜 빠알간 장미냐면, 꽃봉오리부터 줄기까지 전부 빨갰거든. 이상해, 이상해. 생각하며 그 꽃을 바라봤어. 두 팔을 벌리고 나를 부르는 것 같았지. 한 발씩 내딛기 시작했어. 몇 발자국 되지 않는 거리가 정말 멀게 느껴지더라, 그 사이 시간도 훌쩍 지났나 봐. 바깥은 깜깜했어. 꽃 앞에 도착했지. 나는 인사를 건넸어. 대답은 없었는데, 어색함을 풀기 위해 건네기 좋은 적당한 일이라는 걸 알았기에 어쩔 수 없었어.
그 꽃은 대답 대신 후드득 가시를 떨어뜨렸어. 아, 나는 그때 알게 된 거야. 드디어 지구에서의 다정을 찾았어. 눈을 가늘게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 평소와 같이 차원을 여행하고 있었지. 장미 모양 볼펜을 들고 이 글을 마무리해. 지구의 다정함이 이런 모습이라면, 나는 더 많은 다정을 찾아도 괜찮겠지.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아.
“저는요, 다른 행성에서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