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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유 Oct 08. 2024

00년 00월 00일 0요일, 무채색.


 억울했다. 뉴스 한 면에도 장식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예쁘게 차려입었는데, 기껏 하는 생각은 이게 뭐야.


 다소 충동적인 생각이었다. 많은 말은 필요하지 않다. 지쳤다는 사실, 편해지고 싶었다. 한강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다. 그런데도 새삼스레 물이 왜 이렇게 어두운지, 밤이 왜 이렇게 차가운지 실감하게 된다. 옷자락을 끌어당기는 바람에 밀려왔다. 손끝이 싸늘해지고, 왠지 모르게 발끝부터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람들은 다들 집으로 돌아갔는지 강변은 텅 비어 있었다. 고작 눈앞을 흐르는 물줄기와 맞은편의 자그마한 조명들만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여의도 한강공원, 뼈가 시릴 정도로 춥다. 땅과 구름이 모두 무색해진 밤이었다. 두꺼운 코트 안으로도 찬기가 스며들어왔다. 차갑다는 감각이 있다면, 그건 어쩌면 옷깃 속의 피부가 아니라 뼛속의 깊은 곳, 그곳으로부터 스며 나오는 게 아닐까.


겨울이라서 해가 빠르게 지는 시간. 금방이라도 눈이 올 듯한 무거운 구름들이 하늘을 짓누르고 있었다. 혼자였지만 혼자라는 감각은 없었다. 마주할 누군가가 없어서 좋았다. 다들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다. 그저 한참 동안 강변에 서서 반대편 빌딩들을 바라보았다. 물 위에 비친 불빛이 찰나의 떨림을 만들 때마다, 그곳에 다다르면 손끝으로 무언가를 붙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손이 닿기 전에, 이미 흩어지고 만다.


 오늘 처음으로 뮤지컬을 봤다. 원래 한참 전부터 보려고 했던 건데, 갑자기 떠올라 예매를 눌렀다. 아무 이유 없었고, 아무 목적도 없었다. 그저 뭔가를 감상하고 싶었다. 무대 위의 배우들은 하나같이 빛났다. 속삭이는 듯한 대사들, 춤추는 몸짓, 그리고 폭발적인 목소리. 그 모든 것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쏟아지는 환호와 박수 속에서, 잠깐씩 눈물이 맺혔다. 몇 번이나 숨을 삼키고, 박수를 치며 울컥거리는 목소리를 애써 삼켰다. 그들의 이야기였고, 관객인 나는 그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에 불과했다.


 2시 시작이던 공연은 금세 끝났다. 여의도에 도착했을 때는 6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겨울의 낮은 길지 않다. 공기는 한층 더 얼어붙었고, 나는 그 상태로 한강까지 걸어왔다. 뮤지컬의 마지막 장면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되풀이됐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결말, 그런데도 끝난 뒤에 서늘한 뒷맛을 남기는 대사들. 이상하게도 그 장면들이 기억 속에 오래 머물렀다. 한편으론 허무했고, 한편으론 아름다웠다.


 바로 그때였다. 강물 위에 희미하게 빛나는 빛줄기가 나타났다. 노란색 불빛이 점점이 이어지더니, 물결을 따라 퍼져나갔다. 마치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형체들이, 형체를 잃고 흘러내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고개를 갸웃하고 다시 바라봤지만, 불빛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한순간 물결에 반사된 불빛이었을 뿐이었다. 웃음이 났다. 이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듯한, 또는 애써 괜찮아지고 싶어 하는 자기 위로 같은. 하찮은 내색도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강변에 떨어진 나뭇잎 하나가 바람에 휘말려 강물 위로 떠올랐다. 한참을 흔들리더니 이내 조용히 가라앉았다. 흘러가던 물속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로. 흩어진 낙엽을 따라가며, 발길은 한없이 멀어졌다. 저물어가는 세상에서,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이 작은 파편들이 어디로 향할지 생각해 보았다.


이윽고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오가는 차들의 불빛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도시의 기계음은 여전히 우렁찼고, 그 속에서 나는 미미하게 들리는 물소리만을 가까이서 듣고 있었다. 이 차가운 소리가 좋았다. 마치 알 수 없는 곳으로 이어지는 통로 같기도 했다. 아득해진 시야가 눈앞의 것들을 모두 잡아먹어 버릴 것 같았고, 오히려 평온했다.


그곳에 서 있는 동안엔 모두가 너무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어야 몇 초, 몇 분 동안만 존재할 수 있는 무언가. 지나가고, 흘러가고, 사라져 버리고, 다시 반복되는 순환. 그러고 나면 잊히겠지. 나도, 이 순간도. 그리고 이 찰나의 감각들이 그 뒤로 어떤 의미를 남기게 될지는 모른다.


밤공기가 훅 들이치는 순간, 강물 위에 불빛들이 도로 자리를 잡았다. 이번엔 조용히 기다렸다. 언젠가 그 빛들이 다시 흩어질 때, 그때의 소리가 과연 어떤 색을 띠게 될까.


모든 것이 물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물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강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그 속에서 어떤 이야기들을 들었다고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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