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시와 콩트만 주야장천 적다가 오랜만에 나를 드러내는 글을 적는 것 같다.
열여덟, 비좁은 칸막이 공간에서 숨죽여 책을 읽었다. 은은하게 책상 위로 내려앉은 조명에 의지하여 단숨에 완독을 했다. <채식주의자>였다. 적나라해서 불편하고 적나라해서 참 좋은 아이러니. 그때는 단순히 감탄에 그쳤던 것 같다. 어떻게 이런 표현을 쓸 수 있을까. 역시 작가는 대단하다. 뭐 그런 생각들 말이다. 당시에는 지금보다도 훨씬 단순하게 독서를 했던 것 같다.
더 이상 낙서가 아니라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가 언제였을까. 드라마에서 새벽을 지새워가며 써낸 연애편지를 죽죽 찢어 휴지통에 집어넣는 장면은 제법 친숙한 클리셰 같다. 내가 바로 그러한 클리셰로 범벅된 인간이었다. 사실 ‘글’을 쓰기 위한 초석이 되어준 글쓰기는 배설에 가까운 행위였다. 어째서 배설이냐면, 다시는 들여다보지 않을 각오로 적어냈기 때문. 힘들었다. 꽤 많이. 뭐라도 털어놓을 대상이 필요했고, 나는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니었을 뿐이다. 종이는 아주 과묵한 청자 같다. 친구한테 고민 상담 한참 해놓고 며칠 지나서 그때 내가 뭐라고 말했는지 줄줄이 다 읊으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나도 종이에게 되묻지 않은 거다. 체내에 남겨두기도 싫었다. 그러니 배설로 명명한 것도 그리 놀라울 일은 아닐 거다.
자주 비워내니까 채우고 싶어졌다. 거의 매일 같이 메모장에 털어놓다 보니, 잘 쓰고 싶어진 거다. 그렇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여전히 글쓰기는 매번 어렵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내가 글쓰기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부끄럽다. 아직도 내 글은 낙서 같다. 그래도 언젠가 내 이상과 실력의 간극이 좁혀나가기 위해서 가열차게 써 내려가보자고 마음을 다잡지만 말이다. 글쓰기는 비정형 계단과도 같아서, 한 칸을 오르고 당장 다음 칸을 훌쩍 오르기도 하고, 그보다는 평지를 오래 걸어서야 다음 칸을 만나게 되기는 일이 더 잦다.
말이 조금 샜는데, 수업이 끝나고 검색할 게 있어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다가 웹 상단에서 띄워진 한강 작가님의 2024 노벨 문학상 한국인 최초 수상 소식을 접했다. 채식주의자는 세 번 정도 읽은 것 같다. 문장과 말하고자 하는 바가 참 예리해서 읽고 나면 속이 체할 때까지 엉켜있던 실타래를 입 밖으로 뱉어내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속이 조금 아파오는 기분. 늘 망설이다가 펼치는 바람에 책장에 자리한 지는 꽤 되었는데도, 그리고 애정하는 책인데도 세 번 정도 읽은 게 전부다. 타인을 기념해 주는 마음이 떠오르면서, 동시에 나에 대한 생각을 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뭘까. 솔직해지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솔직한 글을 썼으면 좋겠어요.”
창피했다. 적당히 잘 감췄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당신은 아는구나 싶었다. 그에게는 글을 몇 번 보내준 적이 있다. 그래서 요즘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는 고백도 했다. 글이 안 써지기 시작하면서부터의 나를 돌이켜보면, 글을 쓸 때 솔직하지 못했다. 보여주기 위한 글이 된 지 오래다. 아니, 애초부터 보여주려고 글을 주변 사람들에게 공유하기 시작했고 특히나 브런치 스토리라는 플랫폼을 이용하긴 했다만. 어째서일까. 그렇다, 두려움. 겨우 글 하나로 나를 판단해 버리는 게 무서워서 더 우울해질 수 있는 거 덜 우울한 글을 썼고 더 적나라할 수 있는 거 점잖은 척했다.
부정적인 게 뭐라고, 술이 뭐라고, 욕지거리가 어떻다고. 섹스가 뭐라고. 모니터 너머의 나는 긍정적으로 살고자 하지만 부정적인 것들, 아픈 것들에 아주 약해서 부러지기 쉬운 것들에 더 자주 시선이 가는 게 사실이다. 내가 잘 볼 수 있는 것들을 내가 바라보는 화질과 구도를 정제된 문장 속에 잘 담아내고 싶다. 잘 담아내서 같이 나누고 싶다. 글로는 가끔 또라이 소리 들어도 좋을 듯하다.
우울감에 파고드는 거 좋아하고 술도 사실 같이 먹는 사람이 중요하지만 적당히 좋아한다. 섹스는 음, 모르겠다. 생각할 지점이 남는 글을 적고 싶었다. 생각이 많아서 힘들 때도 분명 있지만 생각하다 보면 가끔은 돌파구가 마련되기도 하니까. 내가 그랬으니까, 언젠가 힘들었거나 힘들게 될 당신들도 괜찮아졌으면 해서 말이다.
아무래도 배고파야 글이 잘 써진다고 당신은 말했다. 요즘 글이 안 써져, 덜 힘든가 봐. 나는 동의하며 대답했다. 아예 배가 고프거나 아예 배부른 사람이 글을 잘 쓴다는 말을 하더니 덧붙여서 고점과 저점에 비유하는 건 당신다웠다. 그런데 너답다는 게 뭐지. 나답다는 건 뭐지.
계속 변한다. 사람도, 사물도, 기후도 모든 게 그 자리인 듯 보이면서 아주 미묘하게 변한다. 그 미묘함은 훌쩍 큰 변화로 드러나는 것 같다. 나는 말했다시피 내가 소설 쓸 줄 몰랐다. 손가락 두세 마디 정도 되는 두께의 소설책 볼 때마다 감탄했다. 나로서는 긴 호흡을 끌고 가는 게 불가능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시가 도저히 안 써져서 최근에 소설만 적고 있다. 소설이라기에도 분량이 너무 짧지만. 인생 진짜 모르겠다. 내가 예측 가능한 미래는 끽해봐야 한 두 시간 뒤 일정이다. 빨래를 돌리거나 양치를 할 것이다와 같은 정도의 아주 사소한 것들. 그마저도 기계가 고장 나거나 정전이 나거나 갑자기 볼일이 생기면 미뤄진다.
그깟 글 하나로 날 판단할까 봐 무서워서 숨겼다. 평소 초긍정에 가까운 사람인데, 글 쓸 때는 슬픔에 몰입하는 일이 참 좋아서 울적해지는 글을 부러 찾아 적었다. 메모장에는 너무 다크 해서 나만 보는 것들도 있다. 언젠가 나의 주변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써왔던 글 보여줄 때, 뭐야 얘 보기보다 부정적인 애네. 할까 봐. 걱정됐다. 남 시선 의식 안 하려고 하면서 누구보다도 많이 하는 게 나다.
일단 나부터가 나를 매 순간 검열한다. 그럴 필요 없는데도 쉽지 않다. 앞으로 내 일거수일투족을 적겠다는 얘기가 아니라, 내가 하는 생각이나 글을 쓰기 위해 받은 영감을 가감 없이 적고 올려보기로 했단 말이다. 나를 비판하되 비난하지는 않으면서 솔직해지는 연습을 하기로 결심했다. 분명 어려운 길이 될 것 같다. 누군가 글 하나에 나라는 사람 자체를 오해한 건 괜한 자의식 과잉이 아니다. 실제로도 한두 번 겪은 게 아니다. 사랑글을 보여주니 연애하냐며 물었고 우울한 글 적었더니 괜찮냐는 걱정들을 했다. 오해라기보다는 관심과 애정에서 비롯된 말이라는 표현이 맞겠다. 정말 고마운데, 그게 아니란 말이다. 글 하나로 나까지 판단하지 말아 줘요.
만약 언젠가 내가 아주 애정하는 당신들이 내 글을 모조리 보게 될 때를 떠올리며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다. 나도 당신들을 있는 그대로 볼 테니까. 글은 글로 읽고 나랑 직접 대화하고 나를 알아갔으면 좋겠다. 사람을 정말 좋아하기 때문에 내가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억울해지는 입장이 되는 건 무척 슬플 것 같다. 이전에도 현재도 앞으로도 적당히 글에 허구를 섞으려고 한다. 솔직하되, 거짓으로. 그럼에도 그럴싸한 거짓들로 내 진실을 담아낼 예정이다. 내가 글에서 결혼한 사람이 되었다고 갑자기 유부녀가 된 게 아니고, 애연가가 되었다고 해서 흡연을 시작한 게 아니다. 나는 때때로 꼬마도, 남자도, 노인도 되어 보려고 한다.
감성에 허덕이는 나는 누군가는 낯간지럽고 오글거린다 할만한 글들을 훌쩍 올렸다가 금세 지워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자주 쪽팔릴 짓을 하고 이불을 뻥뻥 걷어찬다. 근데 뭐, 좀 쪽팔려도 이게 나니까 인정하기로 했다. 앞으로는 나만의 적나라한 글들을 진솔하게 적어봐야지. 글을 써야만 숨통이 트였던 나날을 가만 떠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