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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반스토니언 Jul 12. 2024

아이에 관심없던 사람도 아빠 만드는 나라

아이사랑에 진심인 사회기풍이 마음을 바꿔놨다


왜 미국인들은 아이를 그렇게 좋아할까. 얼마전 유튜브 쇼츠를 보다가 재밌는 걸 발견했다. 포클레인 운전자가 땅을 파고 있는데 그 옆으로 아이가 자기 노오란색 덤프트럭을 가지고 쫑쫑쫑 다가가더니 근처에 놓고 하염없이 포클레인 움직임을 감상(?)하는 게 아닌가. 기사는 잠시 멈칫 하더니 흙을 한덩어리 퍼서 아이의 노오란 트럭에 우수수 쏟아부어주었고, 아이는 신이 나서 팔짝팔짝 뛰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포클레인 기사는 왜 그랬을까? 대체 왜? 중요한 건, 그가 특별히 유난히 아이를 사랑하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도 어린아이처럼 장난기 많고 영혼이 순수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런 예는 널리고 깔렸다. 일상적이라는 말이다.


우리에게 없는 건 그거다. 여유, 장난기,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 그 모든 걸 돈과 경쟁이 차지한 사회 같다. 사회 각박하기가 개인주의 사회라는 미국보다 더욱 심하다. 미국인들에게 있는 건 여유, 장난기,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들도 한국만큼이나 경쟁이 심하고 양극화가 심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아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그들 표정을 잘 보면, 아이에게서 어떤 것을 기대하고 찾아 배우려는 느낌이 강하다. 그게 무얼까. 그건 바로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무구한 마음’이다. 그들은 정말로 어린아이에게 배울 게 있다고 생각한다. 어린아이를 성인과 똑같은 인격체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아이라고 무시하고 의견 묻지도 않고 그런 게 없다. 무슨 포멀 다이닝 같은 상황에서는 또 칼같이 아이들을 통제한다. 가능한한 아이와 함께 놀려고 애쓴다. 아이로부터 무언가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서. 배우기 위해서.


내가 ‘오바’하는 것일까? 아니다. 얼마 전에 본 또다른 쇼츠영상을 보니, 한국인데, 웬 중학생 되어 보이는 남자애들 셋을 걸음마하는 남아가 ‘형아~’하며 뛰어가는 장면이 있었다. 아이는 너무나 귀엽게 동동동동 형아야들을 쫓아가는데, 형아야들은 뒤를 힐끔 보더니, 그냥 계속 자기들 가던 길을 가더라는 말이다. 이게 뭐람… 물론, 십분 이해는 한다. 아이를 어떻게 대할지 모르고 쑥쓰러워서 그냥 간 거겠지.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겪는 문제다. 하지만 미국 학생들은 다르다. 달랐다.


내가 한인교회 영어사역부 담당전도사를 할 때였다. 여름이면 VBS(vacation bible school: 방학 성경학교)를 매년 진행한다. 여러가지 행사운영을 우리 부서 학생들과 청년들이 함께 한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남녀를 불문하고 중, 고등학생들이 어찌나 진지하고도 재미있게 아이들이랑 놀아주는지. 나만 보면 뚱한 표정을 짓던 사춘기 남자 고등학생도 이제 막 뛰어다니기 시작한 여자아이를 너무 귀여워하며 쫓아다니는 것이었다.


내가 담당하는 이들은 중학생부터 이십대 중반 직장인들까지 한인2세들이었다. 한 번은 교회에서 집으로 가면서 직장인 청년 하나랑 중학생 하나를 태워서 그들 집에 데려다 주는 길이었다. 밤 아홉시 가까이 되었나. 중학생 하나를 먼저 집 앞에 내려줬다. 그리고 ‘바이~굿나잇’하며 차에 타서 가려고 기어를 바꿨다. 그러자 직장인 청년이 나를 유심히 보더니, ‘패스터pastor(목회자) 박, **이 집 안에 들어가는 거까지 봐야하지 않을까요?’ 그런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자기는 중학생 아이가 집 문 열고 안에 들어가는지 확인하고야 자기 집으로 갔다는 것이다. 혹시 집 키가 없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냔다. 아. 안전. 안전. 안전.


내가 시카고에서 살았던 동네는 유명 대학 타운이었다. 그래서 20대 학생들을 매우 자주 본다. 그런데 남학생 하나가 ‘아, 아기 너무 귀여워요! 잘가!’하며 자전거를 타고 휙 지나가는 것 같은 일이 종종 있다. 이쯤되면 ‘아이 사랑하기’가 하나의 문화적 코드(code: 법령이란 뜻도 있지만 암묵적으로 모두가 합의한 일의 뜻도 있다)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 아이들은 어떻게, 누구로부터 자신보다 나이 어린애들도 잘 돌봐주어야 한다고 배웠을까.


적어도 그게 한인교회 어른들로부터 배운 거 같진 않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잘 봤기 때문이다. 설날이었다. 미국에서야 평일이니까 명절인지 아닌지 모르고 휙 지나가는 날이지만 한인교회에는 한복 입은 어르신들이 보였다. 시간맞춰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와 있으라는 담임목사의 지시 그대로 영문 모른채 아이들과 교회 로비에 서 있었다. 예배 끝난 어른들이 우르르 나와 같이 서더니, 갑자기 ‘설날 명절 세배를 하겠습니다~ 아이들이 세배를 하면 어른들은 용돈을 주세요~’ 그런다. 어른들은 소파에 앉고 아이들은 무릎꿇고 세배를 해야 하는데, 바닥이 그냥 차가운 맨바닥이었다. 뭐라도 깔아줄 수는 없었는가 진정. 받아온 세뱃돈 봉투를 보니 중학생부터 스물 몇 직장인까지 똑같이 1달러가 들어있었다. 할 말이 없었다. speechless. 급조한 어른들 행사에 애들을 들러리 세운 것이었다. 아이들도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당연히, 미국인 교회에는 이런 일들이 없다. 오히려 아이들이 사역의 중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부부가 다니던 미국성공회교회(Episcopal Church)에서는 메인 예배 중반까지 아이들이 부모랑 함께 있다가 설교시간이 되면 설교자 신부님이 아이들을 제대 앞으로 불러모은다. 제의를 입은 신부님은 아이들과 함께 계단에 쪼로록 앉아 오늘의 설교내용을 요약한 5분 어린이 설교를 한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대답, 반응을 보며 다함께 까르르 웃는다. 얼굴에는 그윽한 미소들이 잔잔하다. 하지만 어느날에는 그 어린이설교가 어른설교보다 더 감동적이고 인상에 남는 날도 있다. 그리고 아이들은 다른 곳에서 프로그램을 하고, 헌금을 걷고 나서 어른 두명이 헌금바구니를 들고 중앙통로를 걸어 제대로 가는 행렬에 빨간색 자그마한 카트를 밀며 앞으로 같이 나아간다. 그 안에는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아이들이 집에서 가져온 시리얼, 과자 같은 것들이 있다. 더 어린 아기들을 위한 장소가 예배당에 통유리창으로 설치 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흔들의자와 인형들, 펠트천 액자 등 참 아늑하게 잘 꾸며놨다. 장판에 덜렁 성경찬송가만 쌓여있는 한국교회와는 너무 달랐다. 이런 유아실 혹은 수유실은 세계적 미술관인 보스톤 미술관에 가도 비슷한 컨셉으로 조용한 곳에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내가 살았던 일리노이 주는 민주당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블루스테이트’(파란색주)다. 그래서 복지에도 많은 신경을 쓴다. 복지정책 중에 올키즈(All Kids)라는 게 있다. 저소득 가정의 아이들이 18세가 될때까지, 주정부에서 아이들의 병원비용을 대부분 지원해준다. 그 비싼 치과치료는 물론, 교정도 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매우 비싼 안경도 맞출 수 있다. 이 정책은 합법체류하는 외국인 자녀들에게도 해당된다.


 어린이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회 기풍(ethos). 하지만 미국 등 서구도 아이를 존중한 것이 불과 20세기 들어서였다. 그전에는 아이들은 귀찮은 존재라고 집 다락층에서 유모가 키우며 하루 한 두번쯤 부모에게 보여주는 존재였다. 어린이 노동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바뀐 것이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그런 마을로서 역할을 잘 해내는 사회이기에, 충분히 신뢰가 가고 안정감을 주는 사회이기에, 결혼하고 아이 생각이 통 없던 유학생 친구 세 집이 모두 뒤늦게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다. 특히, 아직 미국에 있는 집은 이번에 둘째 아이를 낳는다고 한다. 한국에 간 두 집은? 둘째보고 싶어도 돈과 눈치보게 하는 팍팍한 주변환경 때문에 낳지 못하고 있다.


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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