쉿! 입 다물어야 살아 남는다
트럼프의 당선은 전미국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전까지는 어떤 주요 언론도, 전문가들도, 트럼프 당선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는 식이었다.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여성혐오, 외국인혐오, 동성애 혐오, 흑인혐오, 가짜뉴스 뿌리기, 반정치적올바름주의까지, 이제까지의 정치문법을 다 파괴하는 혐오의 정치인이 자랑스러운 미국 대통령이 된다? 식자층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하고 있었다. 그런 원시시대로의 퇴행은 아무도 예상하고 싶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고 싶지 않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다. 미국 백인의 절반 이상이 트럼프를 뽑은 것이다. 그가 내세운 백인 우월주의에 찬성한 것이다. 그때부터 ‘샤이shy 보수’ 이야기가 나왔다. 차마 트럼프를 지지한다고는 못하겠지만 내심 트럼프의 사상에 찬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이기성을 생각하면 당연한 귀결일까?
배경은 이러하다. 낙태를 반대하는 가톨릭 신자들이 많은 히스패닉 인구는 불법이민의 유입지속으로 꾸준히 늘어나 영어를 못해도 미국에서 얼마든지 자리잡고 살게 되었다. 아시아인들은 온가족이 합세해서 대입자를 밀어줘서 명문대 및 알짜 전문직에 많이 진출했다. 그러면서 아무리 진보적인 민주당 지지 백인이었더래도, 자신들이 베풀던 인종평등의 은총을 이제는 사회가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고, 백인들은 인종차별에 더욱 주의하며 살게 되었다. 어느 순간, ‘어? 이 자식들 봐라? 내꺼까지 넘보네?’가 된 것이다. 거기에서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윤리가 불안과 혐오라는 정서에 밀리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트럼프는 정확하게 백인들의 가려운 곳을 속 시원하게 긁어주었다.
트럼프 지지의 핵심축인 백인우월주의, 미국최우선주의와 함께 또 하나의 기둥은 바로 백인보수주의 그리스도교 정서다. 여기에는 소위 복음주의evangelical 개신교(개인주의적 신앙을 중시하는)와 가톨릭 신자도 함께 포함된다. 가톨릭은 여성의 낙태 반대에 혹했다. 아직도 미국인의 절반은 그리스도교(개신교+가톨릭)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미국인의 절반은 백인들이다. 이 둘의 지표가 상당부분 겹치는 것이 복음주의 개신교다. 복음주의 개신교는 미국은 하나님이 축복하신 특별한 세계적 사명을 받은 국가여야 한다는, 과거의 미국 팽창주의 신앙과 노예제도를 인정했던 보수적 성경해석의 전통, 그리고 돈과 사회에 무책임한 자유시장경제를 추구하는 황금만능주의 신앙이 합쳐진 것이다. 이것은 유럽 그리스도교와는 판이하게 다른, ‘미국판’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대다수 개신교는 그런 미국 보수개신교를 전수받아 따르고 있다.) 종교와 정치가 이런식으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융합되면 막강한 괴물이 된다. 미국 보수개신교가 중시하는 것은 낙태와 동성애 반대 문제다. 트럼프는 독실한 그리스도교인인 척하면서 그들의 관심사를 해소해줌으로서 보수개신교의 지지도 얻었다.
미국은 헌법상으로 국교가 없는 나라이지만 대통령이 성경책 위에 손을 얹고 취임 선서를 하며, 미국 지폐에는 ‘In God We Trust,’ 즉,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안에서,’라 쓰여져 있고, 개별 주의회에 목사를 불러서 축복기도를 받는 전통이 있는 나라다. 백인들은 미국은 역시 개신교 전통 위에 서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만큼, 미국은 ‘백인 주류 국가’로 천년만년 남아야 한다고 믿기도 한다. 그게 미국의 핵심 정체성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WASP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White, Anglo-Saxon, Protestant(백인, 앵글로색슨족 계통, 개신교)의 앞자를 딴 말이다. 백인도 무슨 남유럽 백인은 안 된다. 오로지 파란눈에 금발머리를 한 백인만이 ‘순수혈통 백인’이라는 것이다. 나치의 ‘아리안족 우월주의’가 떠오르지 않는가? 과연 이민자가 아메리칸드림을 이룬다 해서 곧 주류사회도 될까? 아니라는 말이다. 주류사회를 이룬 이민자는 오로지 앵글로색슨계 백인들만 해당된다. 결국 이 눈먼 ‘금발에 파란눈 주의’는 명문대까지 졸업해서 똑똑하다는 엘리자베스 홈즈라는 역사에 남을 대형 사기꾼을 낳았다. 피 한방울로 대부분 질병을 진단한다는 ‘테라노스’기업 사기는 백인우월주의 아니면 불가능했던 일이다. 트럼프도 금발에 파란눈인데, 조상은 독일계 이민자다. (설마 그래서 금발에 파란눈인 러시아도 그렇게 좋아하는건가?)
과거 전통이나 선례를 한국처럼 금과옥조로 떠받들지 않는 미국이지만, 트럼프는 절묘하게 백인들 마음 깊은 곳에 숨어있는 ‘미국만의 위대한 전통’에 호소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런 신념이 깊이 뿌리박혀 있는 곳은, 공화당 전당대회가 아니라 일상의 모든 곳이라는 점이다. 절반 이상의 백인이 평소 자신들이 막연하게만 생각해오던 일을 얼마든지 실천에 옮기고도 안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기득권을 가진 자들의 폭력이었던, 나치 시대의 일상사랑 뭐가 다른가. 약육강식의 동물사회가 된 것이다.
수정의 밤(Kristallnacht: 깨진 유리의 밤)에 나치대원들에 의해 체포된 유대인들
트럼프의 충격적인 당선 소식이 전해지던 날 저녁에 나치의 폭력이 공공장소로 나와 발흥했던 그 역사적인 밤이 불현듯 떠올랐다. 1938년 11월 9일, 독일 전역에서 벌어진 ‘수정의 밤’(Kristallnacht) 폭동사건이다. 나치대원들이 나서서 밤 사이에 유대인 회당과 상점 등을 공격하고 방화하고 유대인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이번에는 바로 내가 유대인이 된 것이다. 흑인들, 아시아인들(자신들은 시민권자라면서 트럼프를 뽑은 보수 개신교인 한인들을 제외한), 일부 히스패닉(자신을 백인으로 여기는 이들을 뺀), 이민자에 대한 폭력이 합법화된 날 밤이었다. 게다가 주동자들은 총까지 들고 다닌다. 시카고의 맹렬한 겨울바람과 함께 소름이 오싹하게 끼치던 날 밤이었다. 우린 이제 내일 아침부터는 조심해서, 눈치 보면서 살아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는다. 유대인들이 달아야만 했던 노란 다윗의 별이 이젠 내 노란 피부가 된 것이다.
그때 당시 나는 미국의 역사 깊은 진보 신학교에서 박사과정에 있을 때였다. 학교로부터는 백인 여성이었던 신학교 총장이 이메일로 ‘우리가 지키고 보호할테니 국제학생들은 안심하라’는 이메일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국제학생처에서는 유학생들을 소집해서, 비자인터뷰가 어려워질테니 조심하라는 안내와 함께, 새로 발표된 트럼프의 반이민정책에 대응하는 법을 안내했다. 앞으로는 미국 입국시에 입국심사관이 합법적으로 입국자의 소셜미디어와 채팅까지 전부 뒤져볼 수 있게 되었으니, 가능한한 미국에 대한 불평이나 비판을 올리지 말라는 재갈이었다. 자기검열이 시작된 것이다.
21세기 대명천지에 미국에 살면서도 20세기 초의 일제시대와 나치시대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었다. 총을 들다못해 사랑하기까지 하는, 그것이 미국 시민의 고유한 자위권 전통이라고 믿는 기득권들이 마음놓고 혐오발언을 하며 설치게 된 나라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모든 백인들을 믿을 수 없었다.
사진-pixabay, Yad Vashem